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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31화 (147/203)

131화

“올해는 우리 카뮬리타의 황족이 마법사들의 대표로 축제를 빛낼 차례인데, 누구를 앞에 세우실지 결정하셨나요?”

유디트가 말한 이 10월 축제는 다름 아닌 마법사들의 축일이었다.

그래서 카뮬리타에서 가장 공신력 있다고 인정받는 마법사가 선출되어 모두의 앞에서 화려한 마법을 선보이곤 했다.

주로 백야의 전당에서 월계수 잎을 여섯 개 이상 단 마법사나, 황제가 직접 임명한 황족이 한 해마다 번갈아 대표로 나서는 게 보편적이었다.

이 경우 황제가 직접 임명한 황족은 보통 다음 옥좌에 앉을 후계자로 여겨졌다.

하여 지금까지 이런 자리에는 내가 나가는 게 불문율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세드릭 황제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 올해도 1황녀가…….”

“아바마마, 제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뒤이어 유디트가 예상 밖의 말을 내뱉은 순간, 식당 안에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요즘 그레이엄 후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라미엘의 입에서 ‘하!’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미쳤냐? 그 자리가 어떤 거라고 네가…….”

이내 라미엘이 입술을 비틀며 살벌하기까지 한 음성을 내뱉었다.

“아바마마, 저런 헛소리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유디트, 네가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모양인데, 그 자리에는 아무나 설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유디트를 향한 다른 황녀, 황자들의 눈길도 곱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디트, 네가 말이냐?”

유디트에게 되묻는 세드릭 황제의 목소리는 뜨뜻미지근했다.

지금까지 세드릭 황제가 유디트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선보이긴 했지만, 지금 이 10월 축제의 역할 같은 것은 확실히 아직 유디트가 맡기에 위험 부담이 있었다.

혹여나 마법을 숙련한 지 오래되지 않은 유디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수라도 하면 황실의 명예가 이만저만 실추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벨라 언니만큼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저도 카뮬리타의 지고한 태양이신 아바마마의 딸이니 한번 믿고 맡겨 주시면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유디트는 황족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여전히 차분한 낯을 한 채 말을 이었다.

“황실에 누를 끼치는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게 영광된 차례가 온다면 레반테온 선생님도 기꺼이 도와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세드릭 황제가 선뜻 허락하지 않자, 유디트가 살며시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아직 제 정통성으로 입방아를 찧는 자들이 있으니, 카뮬리타 황실의 위엄을 바로 세우기에도 나쁘지 않은 기회가 아닐까 하고요…….”

“뭐라고? 아직도 너에 대해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단 말이냐?”

“제 어머니께서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셨다는 게 밝혀진 지 오래되지 않았기도 하고, 또 그동안 뛰어난 황실 사람들 중에 저 혼자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가련하게 고개를 숙이며 아릿한 미소를 짓는 유디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유디트를 보고 나도 모르게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유디트가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 부황을 잘 구워삶을 줄 알게 되었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의혹을 자극한 건, 유디트가 세드릭 황제에게 이런 청을 올린 이유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이 10월 축제 때 벌어졌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유디트를 보는 시선이 나도 모르게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바마마. 유디트가 이렇게 먼저 아바마마께 무언가를 부탁드린 건 처음이니 한번 맡겨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겉으로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입매를 당겨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 황제에게 말했다.

“아르벨라!”

라미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나는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어엿한 황실의 일원인 유디트를 아직도 무시하고 폄하하는 자들이 있다니, 카뮬리타의 황족이자 언니로서 묵인할 수 없네요. 마법사들의 축일에 유디트가 황족 대표로 나가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면 더는 허튼소리를 지껄일 자도 없겠죠.”

나까지 유디트의 말을 거들자 결국 세드릭 황제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유디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당연히 다른 황자, 황녀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상징적인 자리에 유디트가 나선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눈치였다.

오찬이 끝난 후 나는 바로 라미엘과 함께 세드릭 황제를 따라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을 추적한 결과에 대해 먼저 보고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뒤 이번에는 내가 최근에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세드릭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레이엄 후작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던 중에 그가 자선 활동을 하던 고아원에서 몇 년 전까지 수상한 경로로 사라진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뭐?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사라져?”

“네. 제 생각에는 몇 년 전 웨이스턴 남작을 포함한 일부 귀족들이 처벌받은 인간 사냥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드릭 황제가 쾅, 하고 책상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렸다.

“이 미친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이들한테까지 손을 댔단 말이냐……!”

그레이엄 후작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죄목이 나오자 그는 노발대발했다.

나는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조사해 보겠다고 말한 뒤 세드릭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한동안 세드릭 황제를 상대하느라 먹먹해진 귀를 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귀가 따갑구나. 요즘 부황께서 확실히 전보다 쉽게 흥분하고 열을 내시는 것 같은데…… 혹시 중년의 갱년기 같은 건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불경하다 할 소리였지만, 나를 뒤따르던 마리나가 눈치 있게 내 말을 효심으로 포장해 줬다.

“1황녀님께서 폐하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마침 폐하께서 정기 진찰을 받으실 시기이니, 황궁의가 이번에는 더욱 성심성의껏 옥체를 살피도록 먼저 살짝 귀띔하는 게 좋겠네요.”

“역시 마리나가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마리나와 나는 그렇게 장단을 맞추며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궁전을 빠져 나왔다.

“아르벨라, 너 유디트한테 너무 무른 거 아니야?”

그런데 나보다 먼저 집무실 밖으로 나온 라미엘이 자신의 궁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회랑의 기둥에 기대듯이 서 있었다.

나를 본 그가 몸을 똑바로 세우며 입술 끝에 싸늘한 미소를 매달았다.

“넌 네가 거둔 게 귀여운 아기 새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아니거든.”

라미엘은 요즘 들어서는 처음 보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뒤돌아섰다.

“조심해. 그러다 뱀 새끼한테 물어뜯기지 않게.”

나는 멀어지는 라미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오찬 시간에 있었던 일로 유디트는 다른 이복형제들에게 미운털이 더욱 단단히 박힌 듯했다.

하지만 나한테 저런 충고를 하다니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지 싶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해 준 라미엘에게 조금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황도를 따라 걸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황성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가 포착되었다.

“저건 무슨 돼지 우는 것 같은 소리야?”

나는 깊은 의구심을 느끼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2황자 로이드와 5황녀 비비안 남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지?”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그들을 올려다봤다.

“읍읍! 읍!”

나를 발견한 로이드와 비비안이 마구 몸부림쳤다.

그들은 언젠가 내가 로이드에게 그랬던 적이 있듯이, 덩굴 식물에 몸을 칭칭 감긴 채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입도 줄기에 막혀 있어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물론 그들의 주위로 빛이 흩어지는 걸 보니, 나무에서 내려오려고 계속해서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마법진만 번번이 깨져 반짝이면서, 오히려 주변에 있던 새들의 흥미만 끄는 것 같았다.

짹짹! 짹!

흥분한 새들까지 날아들어 푸드덕 푸드덕 정신 사납게 날갯짓을 하는 통에, 특히나 새의 날개에 뺨이며 이마를 얻어맞은 로이드의 얼굴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가 이 상황을 설명해 보라는 듯이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시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서둘러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오찬 시간이 끝나고 2황자님과 5황녀님, 그리고 4황녀님께서 잠깐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4황녀님께서 갑자기 이렇게…….”

“이런 짓을 한 게 유디트라고?”

나는 팔짱을 낀 채 입술에 미묘한 미소를 그렸다.

범인이 유디트라니 의외라면 의외였고,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였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유디트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착해서 누가 그녀를 괴롭혀도 반격하기는커녕, 동네북처럼 마냥 당하기만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 오찬 자리에서도 그렇고, 이제는 유디트도 변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지금 시녀는 내게 로이드와 비비안, 유디트 이 세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지만, 그게 정말 말 그대로의 순수한 대화였을 리는 없었다.

아까 식당에서도 씩씩거리면서 유디트를 쫓아가던 녀석들이니, 보나 마나 또 먼저 유디트를 붙잡고 시비를 걸었겠지.

나는 도와 달라는 듯이 나를 간절한 눈으로 응시하는 로이드와 비비안을 한심하게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 아이들이 한 짓에 비하면 유디트가 그동안 많이 참긴 했지.”

“으읍!”

“게다가 그동안 나도 입이 아프도록 경고한 게 몇 번인데, 이렇게 또 금방 헛짓거리를 하다니.

두 사람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도와주지 말고 놔둬라.”

언니와 누나로서 잘 알아듣게 얘기하고 꾸중하는 데도 한계가 있지, 지칠 줄도 모르고 유디트를 자꾸 건드려 대는 이 녀석들에게 이제는 나도 신물이 났다.

오죽하면 그 맹탕 같던 애도 더 못 참고 이런 짓을 다 했을까?

이제는 유디트가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혼자 있을 때도 이들에게 반격할 수 있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르벨라 언니.”

그리고 1황녀궁에 거의 다다랐을 때, 꼭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디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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