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 *
라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나는 놀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그 솔렘 왕국의 마법사 놈은 아주 멀쩡했었다.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건, 놈의 사인이 자살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본 그 라칸이란 남자는 삶에 대한 열망이 아주 컸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찾고 있던 솔렘 왕국의 유일한 후손인 유디트에 대한 마음도 절절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든 감옥에서 벗어나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이렇게 느닷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야 라칸이 오랫동안의 지지부진한 취조와 모진 고초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 여기는 듯했으나, 나는 이 상황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감시용 영상 마력석에 잡힌 사람도 없었고, 경비병들도 지하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유야 어쨌든 간에 차라리 지금 라칸이 죽은 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라칸이 알아서 죽지 않았다면, 조만간 내가 나서서 그를 정리했을지도 몰랐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디트 때문이었다.
유디트가 솔렘 마법 왕국의 후손이란 사실이 밝혀졌으니, 밀리엄의 납치 건과 연관된 마법사들의 존재는 그녀를 위해서 차라리 밝혀지지 않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라칸은 내가 그레이엄 후작과 엮어 두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더욱이나 유디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물론 유디트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들을 지켜 주려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그들은 유디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유디트도 유일한 솔렘 왕국의 왕족으로서 그들을 보호해 주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 천지 분간 못 하는 마법사 놈들이 밀리엄을 납치했을 때부터, 그리고 그걸 나한테 들켰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다소 매몰찬 생각을 하며, 남은 솔렘 왕국 마법사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지금 바로 치워 버리기엔 조금 아까웠는데, 그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내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옅어지는 것 같았던 부분에 대해 아직 명확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녀님, 제라드 경이 지금 완전히 황궁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리나가 고한 말을 듣고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하여 뛰어난 마법사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해 황금기를 맞이했던 솔렘 왕국의 멸망 원인은 이 기록에 남은 ‘재앙’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아, 그저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압도적인 천재지변이 갑작스럽게 닥친 것이 아닌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창 부흥하던 전성기의 왕국이 하루아침에 이런 참극을 맞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솔렘 왕국의 멸망사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는 책은 영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찾은 자료마다 죄다 비슷비슷한 내용만 적혀 있어서, 이것도 더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제라드가 없는 동안 롬벨 경을 다시 불러와.”
“알겠습니다, 황녀님.”
마리나에게 명령을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에 구석에 있는 괴물 녀석에게 잠깐 눈이 닿았는데, 놈은 자고 있는지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이상하게 얌전하단 말이지.’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싶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너 요즘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 너도 곰이나 다람쥐처럼 겨울잠이라도 자는 거야?”
물론 지금은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었지만, 밥도 잘 안 먹고 볼 때마다 방구석에 엎어져 있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이 녀석을 놀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기 때문에, 혹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은근히 아쉬울 것 같기도 했다.
괴물이 아프다고 해서 의사를 불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런데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녀석은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괴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너 왜 이래? 진짜 어디 아파?”
괴물은 내가 건드리자 몸을 파르르 떨다가 끈끈한 젤리처럼 내 손에 들러붙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뭐가?”
하지만 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라 꾸물거리면서 내 팔을 타고 기어 올라와, 아예 품에 철썩 달라붙었다.
내가 이 녀석을 애완동물 삼아 기른다고는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나한테 엉겨 붙은 적은 없어서 그런지 살짝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황녀님은 의외로 애완동물하고 잘 놀아 주시는 것 같아요.”
그때 내게 다가온 마리나가 어쩐지 묘한 어투로 말했다.
하긴, 마리나한테는 괴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으니, 그녀의 눈에는 내가 이 녀석을 상대로 혼자 자문자답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요즘 먹이도 잘 안 먹는 것 같던데,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닐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살짝 어색하게 괴물 녀석을 안은 채로 몸통을 토닥여 주며 이놈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다음 일정이 있어 밖으로 나가 봐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괴물과 얘기해 보기로 하고 일단 1황녀궁을 나섰다.
* * *
“오늘따라 날씨가 좋군. 벌써 가을이라니, 갈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구나.”
오찬 시간, 세드릭 황제가 유독 온화한 얼굴로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카뮬리타 황실과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풍요롭고 평온한 건 모두 폐하의 은혜 덕분이지요.”
나도 입술을 당겨 미소를 지으며 거의 관성적으로 세드릭 황제를 향한 건조한 찬사의 말을 읊조렸다.
“벨라 언니의 말이 맞아요. 아바마마 같은 성군이 계신 건 카뮬리타의 큰 복이에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아바마마.”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황녀와 황자들도 나를 따라 단체로 영혼 없는 눈빛을 한 채 세드릭 황제가 듣기 좋아할 말을 한마디씩 보탰다.
“허허허, 다들 갈수록 아부가 느는구나!”
세드릭 황제는 자식들의 재롱에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유디트의 모친이 일반적인 노예가 아닌 솔렘 왕국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황실 가족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날도 늘어났다.
진열장에 보석들을 넣고 구경하듯이, 자신의 자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감상하는 취미가 요즘 세드릭 황제에게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테이블에 둘러앉은 황녀, 황자들을 훑어보는 그의 눈에는 흐뭇함이 어려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그의 자식들이 모두 보석에 준할 만큼 결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던 가장 큰 오점이 사라져서 그런지, 이렇게 자식들을 모아 놓고 보았을 때 세드릭 황제가 느끼는 만족감도 예전보다 확연히 높아졌다.
물론 그 커다란 오점이란, 유디트의 출신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황녀, 황자들도 세드릭 황제를 따라 모두 미소를 짓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황실 가족의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상은 다들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깨작깨작 식사를 이어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유디트가 아니라 세드릭 황제 때문에 이 식사 자리가 벌써부터 짜증스러워졌는데, 그래도 그의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보다는 비위를 맞춰 주는 게 피곤함이 덜했기에 조금 참기로 했다.
사실 요즘 세드릭 황제의 기분은 들쑥날쑥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물론 유디트의 일로 기분이 좋은 날이 많긴 했지만, 심기가 불편해질 때는 한도 끝도 없이 날카로워져 자식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며 쥐 잡듯이 잡아대기 일쑤였다.
그 대상에 그레이엄 후작의 추적을 맡은 라미엘과 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황녀, 그리고 1황자. 그러고 보니 죄인의 추적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아니나 다를까, 슬슬 한 번 더 얘기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세드릭 황제가 우리에게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화제로 나온 죄인이 그레이엄 후작을 의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세드릭 황제의 진노는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조사받던 중에 탈출해 이렇게 종적을 감춘 건 황실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했다.
그나마 오늘은 세드릭 황제의 기분이 정말 좋은지, 우리에게 묻는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쓴 소리는 듣기 싫고 단 소리만 듣고 싶어진다더니, 그래도 성가심을 참고 비위를 맞춘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조만간 폐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태연히 말했다.
입맛이 없는 듯이 삐딱하게 앉아 음식을 뒤적이고만 있던 라미엘이 내 말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틀리냐는 듯이 라미엘을 쳐다봤다.
라미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기묘한 미소를 그렸다.
곧 그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며 내 뒤를 이어 세드릭 황제에게 답했다.
“아르벨라 말이 맞습니다. 이번에 흔적을 발견했으니, 곧 은거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 말에 아까부터 유디트를 힐끔거리면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던 클로에가 퍼뜩 시선을 돌려 라미엘을 쳐다봤다.
나는 반색하는 세드릭 황제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폐하, 추가로 보고드릴 사항이 있는데 오찬 후 따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럼 아르벨라와 라미엘은 오찬이 끝나고 잠깐 나를 따라와라.”
세드릭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이후에는 잠깐 식탁 위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바마마, 곧 10월 축제가 열리겠네요.”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