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29화 (145/203)

129화

벽에 길게 그려진 검은 그림자에서 조용히 튀어나온 라미엘이 주위를 살폈다.

‘지독한 냄새로군.’

밀폐된 방 안에 고인 동물의 사체가 썩는 냄새가 역했다.

라미엘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 손을 댔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마력이 마법진 안으로 흘러들어 회로를 손상시켰다.

그레이엄 후작은 지금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그가 무수히 많이 시도해 온 금단술의 실패 요인은 바로 라미엘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레이엄 후작이 하는 일을 방해하자마자 왈칵 피를 토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조금 속이 쓰리고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는 정도였다.

라미엘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피가 섞인 침을 옆으로 뱉어 낸 뒤,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들였다.

이후에 그가 향한 곳은,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그레이엄 후작의 침실이었다.

그림자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잔이 날아왔다.

“1시간이나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라미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레이엄 후작이 던진 것을 피했다.

“최대한 빨리 온 거예요. 외숙부도 제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그레이엄 후작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라미엘이 대충 대꾸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건들거리는 모양새가 예전만큼 공손하지 않고 퍽 시건방졌다.

그레이엄 후작은 그런 라미엘이 거슬리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라미엘이 그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예전처럼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는 라미엘의 마법은 아르벨라와 다른 마법사들도 꼬리를 잡기 어려워, 지금처럼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꽤나 유용했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나 말해 봐라.”

“지금까지와 비슷하죠. 그나저나 외숙부. 요즘도 계속 시도하고 있는 마법은 진척이 없나 보네요?”

“닥쳐라! 적당한 제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 당연한 것 아니냐?”

그레이엄 후작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짓씹듯이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서 초조함마저 엿보였다.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은 예전과 비교해 확연히 초췌해져 있었다.

황궁 조사실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도피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데다, 요즘은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금단술을 계속 시도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금단술을 사용하는 건 시전자의 체력도 많이 갉아먹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래 후작저에 있을 때는 다른 마법사들을 이용했으나, 라미엘의 도움으로 황궁의 조사실에서 탈출한 이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금단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원래 그레이엄 후작이 사용하려 했던 금단술은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을 서서히 죽어가도록 만드는 것으로, 금단술 중에서는 고위험군의 마법에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단술은 역시 까다로워서, 그레이엄 후작은 번번이 실패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레이엄 후작이 이번에 사용하려는 것은 더 어려운 마법이었다.

원래는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아르벨라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이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토록 그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니, 그레이엄 후작에게는 판을 완전히 뒤엎을 만한 더 강한 한 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정도 고위험군 마법을 사용하려면 그 제물로는 반드시 더 큰 것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이었고, 그중에서도 혈연이 이어진 자를 제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았다.

“라미엘. 클로에는 도대체 언제 데려올 생각이냐?”

라미엘은 탐욕으로 눈을 빛내는 그레이엄 후작을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조만간 기회가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그레이엄 후작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레이엄 후작은 라미엘의 말에 조금 기이할 정도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다 문득 묘한 느낌이 그의 등줄기를 스쳤다.

갑자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그는 라미엘의 말을 지나치게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사실 황궁 조사실에서 라미엘이 몇 마디 꺼낸 말을 듣고 바로 탈출을 결심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특히나 라미엘이 한마디만 하면 마음의 불안이 가라앉고 화가 누그러졌다.

그러다 문득 그레이엄 후작은 왠지 목이 따끔거려서 손으로 피부를 긁었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오른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간 라미엘이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지금 외숙부가 의지할 곳은 저밖에 없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다들 외숙부를 외면할 때 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있잖아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달리 그레이엄 후작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은 아주 싸늘했다.

거기에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불빛을 등진 라미엘의 얼굴이 그림자에 먹혀 있어서 그레이엄 후작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래전부터 방법을 찾아왔다.

그 보람이 있어, 이제 라미엘에게 걸린 마법은 그레이엄 후작에게 조금씩 옮겨가고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러나 그레이엄 후작이 완벽하게 파멸하는 날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에 가려진 라미엘의 입술이 음습한 미소를 그리며 길게 찢어졌다.

* * *

“아르벨라 언니.”

연회가 끝난 후, 뜻밖에도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찾아왔다.

그때 아르벨라는 1황녀궁으로 돌아와 막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며 먼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부터 떼어내던 참이었다.

그러다 유디트가 1황녀궁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벨라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유디트, 늦은 시간인데 네 궁에 가서 쉬지 않고 여기는 어쩐 일이지?”

아르벨라의 손을 떠난 귀걸이가 보석함 속으로 떨어졌다.

아르벨라는 방으로 들어온 유디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였다.

유디트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거울에 비친 아르벨라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 순간 아르벨라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연회 중에는 내 얼굴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 같더니.”

결국 오늘 연회 중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곁에 오지 않았다.

연회가 거의 끝날 때쯤에는 아예 먼저 연회장에서 사라져 다시 모습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중에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따로 찾아온 것은 의외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말에 또 잠깐 말이 없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싫어지셨어요?”

그런데 유디트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아르벨라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유디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 작게 손짓해 방에 있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네가 나를 속 좁은 사람으로 여기는구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자 그제야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가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화려한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나며 바닥에 펼쳐졌다.

그런 뒤 아르벨라의 다리에 얼굴을 기대오는 유디트의 격식 없는 행동에 아르벨라가 그녀를 일으켜 앉히려 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고집스럽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오늘 너무 피곤해요. 그냥 이대로 잠깐만 쉬게 해 주세요.”

그렇게 속삭이는 유디트의 얼굴이 그 말처럼 몹시도 지쳐 보여서, 결국 아르벨라는 유디트를 그대로 놔두었다.

어쩐지 오늘 연회장에서도 낯빛이 안 좋아 보이더니, 역시 요즘 갑자기 주변 환경도 바뀌고 할 일도 많아져 무리한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쉰 아르벨라가 잠깐 망설이다가 유디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언니는…… 제 목걸이가 솔렘 왕국의 것인 걸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한동안 얌전히 아르벨라의 손길을 받던 유디트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래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아르벨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되지 않았어.”

유디트의 질문에 아르벨라는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확신한 것도 아니었고. 나도 혹시 모를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너한테 레반테온에게 그 목걸이를 보여 줘 보라고 말했던 거야.”

아르벨라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담담하기만 해서, 그녀에게서 누구도 거짓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유디트는 또 얼마 동안 말이 없었다.

아르벨라는 혹시 유디트가 이 문제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인가 싶었다.

“내가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밝혀야 했다고 생각해서 원망하는 거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러나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럼 도대체 왜 유디트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지 아르벨라는 의아했다.

“저는요, 언니가 왜 저를 옆에 두셨는지 그게 늘 궁금했어요.”

잠시 후,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아르벨라의 드레스 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아르벨라는 유디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실은 저 같은 사람을 쉬이 가엽게 여기실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거든요.”

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 순간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움직이던 아르벨라의 손이 멈췄다.

“그래도 제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동정하는 척은 해 주셨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제가 언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어요.”

“유디트.”

“예전에도…… 그런 걸 간절히 바랐을 때가 있었어요.”

아르벨라가 유디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져서 너무 기쁜데…… 이상하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슬프기도 해요.”

“…….”

“언니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어요?”

오늘의 유디트는 확실히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지금까지 아르벨라가 겪어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고개를 든 유디트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티 없는 미소만이 어려 있었다.

“죄송해요. 오랜만에 만나서는 이상한 투정만 부렸네요.”

아르벨라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디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셔야죠. 전 가 볼게요. 그럼 좋은 꿈 꾸세요……. 언니.”

유디트가 뒤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인 미소가 어쩐지 아르벨라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아르벨라는 멀어지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지하 감옥에 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 라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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