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27화 (143/203)

127화

“그래?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는데?”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으셨다는 걸 너무 깔끔하게 인정하시는군요.”

킬리안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그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 내 태연한 반응이 약간 허탈한 듯했다.

나는 정해진 스텝대로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에게 말했다.

“이미 다 눈치챘는데 괜히 아닌 척해 봤자 기분만 더 나쁘지 않겠어?”

“어떻게 제가 감히 1황녀님께 그런 불순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미 눈빛으로 말하고 있으면서 말은 잘한다.

게다가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나한테 은근히 얄밉고 건방지게 굴었던 게 하루 이틀 전의 일인 것도 아니었다.

“불순한 자로 치자면 베른하르트 소공작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이신지.”

딱히 킬리안을 달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기분도 좀 나아진 듯했다.

곧 눈동자 속의 날카로운 냉기를 한풀 꺾은 킬리안이 조금 전에 내가 던진 질문에 답했다.

“오늘 1황녀님의 파트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내 파트너? 밀리엄 말이야?”

“더 정확하게는, 제 에스코트 신청을 거절하시고 누구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실까 했더니 3황자님이라 조금 의외라고 말씀드린 참이었죠.”

킬리안의 말을 듣고 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별로 시답잖은 얘기도 아니었는데 나한테 무시당했다고 방금 성질을 부렸단 말이지?

“딱히 의외라 할 건 없지. 밀리엄은 내 동생이니까.”

“그렇지요. 우애 좋은 모습이 보기 좋아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킬리안이 이제 와서 정중한 신사인 척하며 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만개한 꽃처럼 펼쳐지고 머리 위의 샹들리에 불빛이 함께 춤을 췄다.

그러다 언뜻 옆을 스쳐 지나간 커플을 보고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어느 영애의 긴 머리카락이 몸을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파트너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참사를 눈치채지 못한 듯이 춤에 열중해 있었다.

“저도 1황녀님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러나 여기서 웃음을 흘리면 킬리안을 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목이 간지러워도 참았다.

그때 킬리안이 지나가듯이 내게 말을 꺼냈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를 가볍게 겨냥한 그의 물음은 제법 예리했다.

“1황녀님이 조금 전부터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건, 유달리 아끼시는 여동생과 종속 기사 중 어느 쪽입니까?”

킬리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답했다.

“당연히 유디트지.”

“왠지 그렇게 답변하실 것 같았습니다.”

킬리안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는 조금 미묘해서, 왠지 그 안에 뭐라고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킬리안과 이 화제로 더 얘기하기 껄끄러워져서 말을 돌렸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오늘 유디트와 인사를 나눴어?”

“제가 연회장에 들어와 1황녀님께 처음 인사드린 것이 조금 전 춤을 청할 때였지요. 그러니 그보다 먼저 4황녀님과 인사를 나누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꼭 유디트보다 나를 더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요즘 유디트에게 관심을 가진 귀족들이 많던데,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제법 무덤덤해 보이네.”

“물론 4황녀님께서 자리에 맞는 영광을 누리게 되신 것은 축하할 일이나, 달리 동요할 이유는 없지요.”

그의 말처럼, 황실에서의 위치가 변한 유디트에게 갑자기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몇몇 귀족들과 달리 그녀를 대하는 킬리안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조금 전에 본 유디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킬리안의 얼굴을 살피듯이 주시했다.

“베른하르트 소공작은 유디트에게 다른 관심은 없나?”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를 떠보았다.

아까 킬리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유디트의 모습을 보고 의심 어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이면 한창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본 미래에서는 유디트와 킬리안이 맺어지기도 했었고…….

물론 유디트가 제라드도 오래 쳐다보긴 했지만, 지금까지 내 옆에 있는 제라드와 마주칠 때마다 딱히 그런 종류의 호감을 품은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다른 관심이라니, 혹시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로 물어보신 게 맞는지요?”

한편, 킬리안은 내 말이 굉장히 황당한 듯했다. 오죽하면 한순간 춤의 박자까지 놓쳤을 정도였다.

“물론 4황녀님은 충분히 매력적이시지만, 제가 관심을 갖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신데요.”

그리고 이내, 킬리안이 살짝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덧붙인 말이 단호해도 너무 단호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든, 앞으로도 4황녀님께 제 열정을 바칠 정도로 마음이 끌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장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순간 내 입에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온 건,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반박이었다.

“유디트가 뭐 어디가 어때서?”

내 불쾌함이 나조차도 의아했다.

킬리안도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는 나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킬리안이 좀 괘씸하게 여겨졌다.

오늘 유디트가 나한테 데면데면하게 군 건 둘째 치고, 어쨌거나 지금의 유디트를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애를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물론 그 속에 흑심이 들어 있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이날 이때까지 나는 나름대로 유디트를 고이 잘 키워 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게 되었나 보다.

킬리안의 말에 왠지 내 자존심이 묘하게 상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내 생각은 모순적이었다.

원래 나는 유디트가 누구나 볼 수 있는 햇빛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게 아니라, 계속 내 그늘 속에 조용히 머물기를 원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유디트가 내가 만든 새장 속에서 나가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럼 1황녀님께서는 제가 지금 4황녀님께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면 기분이 더 좋으셨을 거란 말입니까?”

킬리안과 나는 거의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때마침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음악이 끝나서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해 시선을 집중 받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내가 순간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걸 깨닫고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방금 소공작의 말이 좀 무례하게 들렸던 건 사실이야. 그래도 먼저 민감한 질문을 꺼낸 내 탓이기도 하니까 방금 나눈 대화는 우리 둘 다 잊기로 하자.”

딱히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살짝 찌푸렸던 표정을 펴고 덧붙였다.

그러나 킬리안의 굳은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몰랐다.

춤이 끝나 인사까지 마치고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한 사람들 틈에서 킬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얕은 실소를 내뱉는 그는 왠지 아까보다 더 허탈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손을 내려 내 앞에 드러난 킬리안의 눈에는 마치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킬리안과 얼굴을 마주한 적은 많았지만 이런 표정을 지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잠깐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에, 킬리안이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나도 그냥 입을 다물고 댄스 홀에서 벗어났다.

바비 몬테라를 비롯해 나한테 춤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금 테라스에서 나온 제라드가 다가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 내게 물었다.

“소공작과 다투셨습니까?”

“몰라.”

나는 괜히 머리가 좀 아파졌다.

‘바보같이 나한테나 호감을 품고 말이야.’

굳이 내색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지금까지 그냥 모른 척하고 있긴 했지만, 나도 눈치가 그렇게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말했지 않은가? 자매간의 치정은 질색이라고 말이다.

물론 앞으로 유디트가 킬리안을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아는 미래의 내용이 그렇다 보니 쉽게 방심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제라드가 나온 테라스에서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유디트가 보였다.

그녀는 바로 다른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다시 내 시야에서 가려졌다.

다른 때라면 당장 유디트를 저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구출해 주러 갔을 테지만, 오늘은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가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오늘 유디트에게 두 번은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좀 쉬고 싶네. 조용한 데로 가자.”

그래서 작게 혀를 찬 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밀리엄도 또래의 어린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느라 바쁜 듯해서, 지금 굳이 내가 방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넌 유디트랑 무슨 얘기했어?”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밀이라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내놓은 제라드에게 막 눈을 흘기던 찰나에, 누군가 나한테 몸을 부딪칠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제라드가 손을 들어 바로 그 사람을 막아냈다.

연회장에서 술을 조금 많이 마신 듯한 사람이 얼른 사과한 뒤 옆을 지나쳐 갔다.

“일단 자리를 옮긴 뒤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를 살짝 잡아당겨 보호하듯이 옆쪽을 팔로 막고 있던 제라드가 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아까 킬리안이 내게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1황녀님이 조금 전부터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건, 유달리 아끼시는 여동생과 종속 기사 중 어느 쪽입니까?”

무심코 눈매를 움찔 찡그렸다.

예기치 못했던 질문에 당황하기라도 한 듯이 아까 킬리안에게는 곧바로 유디트라고 말했지만, 사실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유디트와 제라드 둘 모두가 신경 쓰였다.

한 명은 내 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내 기사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니 딱히 남에게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굳이 남에게 들키기 싫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는 점에서, 내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진심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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