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밤에 가까운 늦은 저녁 시간이라, 하늘은 짙은 남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낮의 열기가 한풀 꺾여 서늘하게 식은 바람이 제라드의 붉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제라드는 먼저 테라스로 나간 유디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유리문 앞에 멈춰 선 채 거리를 둔 상태로 말했다.
“짧게 본론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디트 역시 황녀인지라 그의 말투는 아르벨라를 대할 때처럼 정중하다면 정중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유디트는 불빛이 반짝이는 테라스에 서서 그런 제라드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그 눈빛은 꼭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아릿해서, 제라드는 그것이 못내 의아했다.
“4황녀님.”
유디트에게 시간을 오래 내줄 마음이 없었던 제라드가 독촉하듯이 부르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라드 경은…… 지금 1황녀님의 밑에서 행복하나요?”
그런데 유디트에게서 마침내 나온 질문이란 게 참으로 맥락 없었다.
하물며 친분이 없는 관계에서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디트는 제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재차 이상한 질문을 이어갔다.
“1황녀님이 제라드 경에게 잘해 주세요?”
제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것을 묻다니, 유디트가 지금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유디트는 제라드가 아르벨라의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제법 친밀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르벨라와 함께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던 두 사람이지만, 유디트는 아르벨라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제라드에게 호의를 품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런 선 넘은 행동이라니.
“1황녀님께는 늘 과분한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조금 전보다 한결 메마른 목소리로 짤막하게 답했다.
딱히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판에 박힌 정석적인 대답이었지만, 그만큼 성의 또한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제라드의 반응에 유디트가 살짝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겠죠. 1황녀님이 제라드 경에게 베푼 것들은 저도 그동안 직접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어쩐지 유디트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후로 그녀는 제라드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내보였다.
하지만 제라드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유디트의 이상한 물음은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혹시 1황녀님이…… 제라드 경을 옆에 둔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시던가요?”
그 말을 듣고, 제라드는 무의식중에 아르벨라를 처음 만났을 무렵의 일을 떠올렸다.
“네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아직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제라드는 그 시절에 아르벨라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기억했다.
하다못해 그녀와 함께 있던 순간의 달빛이 얼마나 찬란하게 밝았는지, 또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보며 어떤 식으로 미소를 지었는지,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그 모든 것이 전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라드. 네가 온실에서 그랬지. 어디든 너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다고.”
“그러니 갈 곳이 없다면 내 옆에 있어. 너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지금 떠올려도…… 아니, 그것을 떠올린 것이 지금이기에 더욱 달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아르벨라의 입에서 나온, 그를 원한다는 말은.
만약 지금 아르벨라가 그를 불러 다시 한번 저런 말을 해 준다면…….
제라드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고민했냐는 듯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도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제라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르벨라에게 저 말을 들은 과거의 바로 그 순간, 제라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각인되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과, 또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는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4황녀님께 답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제라드의 입에서 다소 무엄하게도 느껴지는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순간 얼어붙듯이 굳은 유디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감정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유디트는 마치 제라드에게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럼 이것 하나만, 정말 이것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없을까요?”
하지만 유디트는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고요한 눈을 들어 다시금 제라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라드 경은 1황녀님에게 진심으로 충성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만약 1황녀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충심이 깊으냐는 뜻이에요.”
제라드는 정말 진심으로, 평소에는 제법 눈치도 있고 선을 지킬 줄도 알던 4황녀가 오늘은 왜 이렇게 정도를 모르는지 의혹이 생겼다.
물론 이 또한 답변하기 쉬운 질문이기는 했다. 더군다나 이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라드가 아르벨라에게 품은 감정은 결코 단 한순간도 기사의 기본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충성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제라드의 눈에 선득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혹시 이 어린 황녀가 지금 그에게 이따위 질문을 꺼낸 이유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제 주인이신 1황녀님께는 언제나 충정 어린 마음으로 신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제라드는 그 어느 때보다 유디트에게 두꺼운 벽을 친 상태로 거짓말을 했다.
유디트가 그런 그에게 또 뭐라고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벌렸으나, 제라드가 허용하지 않았다.
“4황녀님.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는 질문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1황녀님의 기사로, 4황녀님께는 제게 이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으십니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냉혹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고 나서야 유디트는 찬물을 맞아 정신을 차린 듯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실수했다는 듯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잠깐 침묵했다.
“네, 그래요. 맞아요. 제라드 경의 말이 합당하네요. 제가 자격 없는 질문을 했어요.”
잠시 후 다시 입을 연 유디트의 모습은 이제야 평상시의 그녀 같았다.
묘한 이질감을 풍기던 조금 전의 기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유디트는 본래의 총명한 빛을 띤 눈으로 제라드를 보았다.
“그냥, 제라드 경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제 질문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겠지만……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혹시 나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언제 집요하게 굴었냐는 듯이 깔끔한 사과까지 이어졌다.
제라드도 먼저 고개를 숙여 오는 유디트에게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제라드는 이곳에 더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유디트에게서 돌아섰다.
먼저 테라스를 나서는 제라드의 등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꽂혔다.
하지만 거기에 그를 돌아서게 할 만한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사람들의 숱한 시선을 받으며 테라스에서 나와, 그의 주인인 아르벨라에게 돌아갔다.
* * *
‘뭐지?’
나는 조금 전에 본 광경을 떠올리며 의문을 느꼈다.
춤을 추면서도 시선은 간간이 지금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분명 연회장의 한구석에 서 있던 유디트와 제라드가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그런데 도대체 왜 둘이 같이 움직인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세드릭 황제와 함께 있을 때도 유디트는 내 뒤에 선 제라드를 유심히 쳐다봤었다.
연이어 발생한 유디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황녀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그러다 문득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테라스 쪽을 힐끔거리던 눈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와 춤을 추던 남자가 수려한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1황녀님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곳은 연회장이고 또 제게 허락하신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좀 더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까 유디트가 주위의 시선도 모두 잊은 것처럼 빤히 쳐다보던 사람은 제라드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지금 나와 춤을 추고 있는 남자, 킬리안 베른하르트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 사람 사이의 묘한 공통점에 의혹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다른 때 같으면 내키지 않아 핑계를 대서 거절했을 킬리안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모처럼의 기회인 걸 알면 내가 다른 곳에 한눈 팔지 않게 재미있는 얘기라도 해 보지 그랬어?”
방금 킬리안이 한 말에 일부러 도발적으로 응수하자,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다른 이들은 전부 제 얼굴만 봐도 즐겁다 하던데.”
나는 킬리안의 말에 기가 찼다.
아니, 물론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건 사실이지만, 보통 본인 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나?
게다가 킬리안의 말처럼 만약 내가 누군가의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르고 즐거운 경우가 있다면, 그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뿐일 터였다.
하지만 뒤이어 귀를 파고든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생각대로 콧방귀를 뀌며 킬리안을 비웃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제 손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테라스 쪽을 보시느라 이후의 말들을 전부 흘려들으신 건 1황녀님이십니다.”
음악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나는 그제야 킬리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킬리안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늦가을의 서리가 내린 듯했다.
나는 지금 킬리안의 기분이 살짝 날카롭게 날 서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킬리안의 말을 듣고 그와 춤을 추는 동안의 일을 곰곰이 되짚어 생각했다.
‘정말 킬리안이 나한테 뭐라고 얘기를 했는데 내가 전부 다 흘려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