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나는 내 이복동생들의 우둔함이 이제 좀 지겨웠다.
예전 같으면 유디트를 비호하던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었지만, 요즘 들어 그들은 나를 자신들과 같은 무리로 묶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래봤자 지금은 패망해서 사라진 솔렘 왕국 따위의 후손인 게 뭐가 대수라고…….”
“내 동생들이 여기가 황실의 내원인 줄 아나 보구나.”
더 이어지려던 그들의 대화는 중간에 내뱉은 내 말에 잘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을 느릿하게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황실 연회에 참석한 게 몇 년이며 그 횟수는 또 몇 번인데 아직도 이곳이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면 대화할 내용은 좀 가려서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권유하듯이 말했지만, 다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듯했다.
지금 이렇게 황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유디트의 얘기를 해 봤자, 군침을 흘리며 이쪽을 주목하는 이들에게 맛 좋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밖에 안 되었다.
가뜩이나 요즘은 황족들을 대상으로 한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벨라 언니는 속도 좋아. 언니도 지금 사람들 반응이 이상한 거 알잖아?”
하지만 역시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들으면 내 동생들이 아니지.
리리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죽인 채 속닥거렸다.
“유디트가 노예 태생인 줄 알았다가 사실은 옛 마법 왕국의 피를 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바마마도 지나치게 걔를 챙기고 말이야.”
“맞아. 제국민들 반응도 이상해. 유디트의 촌스러운 모습이 소박하고 친근한 황녀님인 걸로 포장되면서 이상하게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니까?”
“귀족들 중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알고 보니 유디트가 가장 순수한 피를 가진 황족이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언니는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
얘네들은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연회장에 와서 이러지?
하긴, 그동안 내가 바빠서 같은 황궁 안에 있어도 따로 만날 시간이 없긴 했구나.
그나마 조금 전의 내 말을 듣고 목소리를 작게 낮춰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 동생들이 속닥거린 말을 듣고 나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나를 자극하려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니란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물론 카뮬리타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황족이 나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하루하루 늘 비슷하게 흘러가던 사람들의 일상에 혜성처럼 새로 나타난 신선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노예 소생으로 태어나 황실 사람들과도 잘 섞이지 못하고 밖에서도 거의 잊혀 가고 있던 반쪽짜리 황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정통성 있는 핏줄을 가지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렇게 아름답고 상냥한 황녀님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니!
이는 당연히 사람들이 환장할 만한 소재였다.
유디트의 남다른 과거는 금방 사람들의 연민을 샀고, 그녀의 꾸밈 없는 모습은 쉽게 호감을 이끌어 냈다.
이것은 분명 늘 선망의 대상으로 제국민들의 위에 군림하려 노력해 온 다른 황족들이 따라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황족들과 유디트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 자체가 달랐다.
유디트가 본격적으로 영상 마력석을 외부에 풀고 세드릭 황제의 계획하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큼 급상승했다.
나는 내가 세계의 이면에서 봤던 미래의 내용을 떠올렸다.
확실히 지금의 이런 상황은 꿈에서 본 책 속의 내용을 연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동생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일 시간에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언니!”
“누나!”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복동생들이 인상을 구겼다.
오직 밀리엄만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내 동복 남동생이 저렇게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만족스러웠고, 그래서 밀리엄의 머리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디트 카뮬리타 4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바로 그때, 유디트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다른 황자, 황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유디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진작 내게 연락을 취해 오늘 황궁 연회에 같이 참석하면 안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유디트가 이번에는 어쩐 일로 조용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뒤를 이어 연회장에 울린 이름을 듣고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세드릭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심통 난 참새들처럼 내 앞에 서 있던 황녀, 황자들이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이번에는 눈살을 설핏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연회장 안에 우리들의 부친인 세드릭 황제와 유디트가 함께 나타났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유디트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우리 부황께서는 요즘 중도란 걸 모르시는군.’
나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리리아나를 포함한 황녀, 황자들의 말대로 요즘 세드릭 황제는 유디트를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유디트가 마력을 개화시켰을 때도 그동안 무심하던 딸에게 급격한 관심을 갖기는 했었다.
오랫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딸에게 나름대로의 죄책감이라도 느껴졌는지, 뒤늦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 주기도 했고.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황제인 그가 직접 연회 자리에 유디트를 데리고 나오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유디트가 솔렘 마법 왕국의 황족이란 사실을 알게 되니까 옆에 끼고 있을 마음이 든 거지.’
세드릭 황제가 그동안 노예에게서 본 유디트를 자신의 유일한 오점으로 생각한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쓸모없는 돌멩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황금이었다고 하니, 세드릭 황제로서는 기껍기도 할 것이었다.
게다가 백야의 전당 마법사들이 유디트가 진짜 솔렘 왕국 후손이라면 이후에 또 한 번 각성을 통해 여기서 마력 양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확언한 데다, 지금까지 유디트의 가장 큰 흠이라 할 수 있던 혈통적인 문제도 해결된 셈이었다.
그래서 세드릭 황제는 역시 유디트의 모친을 선택했던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역겨운 자부심마저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래봤자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런 꼴 전부가 웃길 뿐이었다.
물론 유디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그래도 거의 처음 받아 보는 부친의 애정에 설레 기뻐하고 있을지.
아무튼, 밖에서도 유디트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진 데다 세드릭 황제가 요즘 거의 유디트만 옆에 끼고 다니자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래 나한테만 맡겼던 공식적인 일정도 몇 개는 유디트에게 주어졌고, 그녀는 그것을 곧잘 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동생들처럼 유디트에게 질투심이 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유디트의 목걸이를 레반테온에게 알리게 한 것에 대해 후회하느냐고 하면…… 글쎄. 그건 아니라고 확답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형식상의 미소를 띤 얼굴로 연회장에 입장한 유디트와 세드릭 황제를 보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것을 환영하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오.”
간단한 황제의 축사가 끝난 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유디트를 직접 연회장에 데려온 것으로도 모자라,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동안 그녀를 옆에 계속 데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꼴이 뒤늦게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 딸을 배려해 귀족 사회에 쉽게 섞여들 수 있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희귀한 장식품이라도 옆에 달고 나온 양 혼자만 신이 나서 으스대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래도 유디트가 저 자리를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면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닐 테지만, 그녀의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유디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다른 곳에 닿았다.
나는 옆에 있던 세드릭 황제가 슬쩍 쳐다볼 정도로 몸을 움찔 떨면서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는 유디트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늦게 연회장에 도착한 듯한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있었다.
“아바마마.”
“오, 1황녀. 3황자도 같이 있었구나.”
나와 밀리엄이 다가가자, 생각에 잠긴 듯이 가라앉은 눈으로 한곳을 응시하던 유디트가 퍼뜩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그래, 오늘따라 연회장의 술이 달구나.”
나는 황제 폐하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웃는 낯으로 유디트를 쳐다봤다.
역시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에는 혈색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 뒤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제라드가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눈을 설핏 가늘게 떴다.
“아바마마께서 즐거우시다니 저희도 기쁘군요. 참, 유디트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이가 있는데, 지금 그녀를 데려가도 될까요?”
“지금 말이냐?”
세드릭 황제가 마뜩잖다는 듯이 유디트를 힐끔 쳐다봤다.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유디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역시 몸이 안 좋은데 황제 폐하께 억지로 끌려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말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그냥 유디트를 이 정신없는 곳에서 빼내 가려고 둘러댄 것임을 누가 모를까.
“아니요.”
그런데 뜻밖에도 유디트가 먼저 내 제안을 거절했다.
“1황녀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조금만 더 아바마마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유디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거부의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유디트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아 나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