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22화 (138/203)

122화

25. 두 명의 황녀님

4황녀 유디트의 황태자 책봉식 날, 황궁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4황녀님! 하늘이…… 하늘이 열리고 있습니다! 분명 지난번의 균열이 마지막일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유디트는 복도를 물들인 경악 어린 음성에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지옥이라도 본 듯이 넋을 놓고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디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하늘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크게 벌어졌다.

그 광경은 꼭 악마가 눈을 뜨는 것처럼 끔찍해 보였다.

“4황녀님! 폐하께서 황녀님을 찾으십니다!”

“4황녀님, 마법사 부대에서 지금 속히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애타게 유디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 언젠가 닿지 않을 선망을 담아 몰래 아르벨라를 따라 마력으로 만들었던 황금빛 카나리아도 나타나 비상사태를 알렸다.

유디트는 현재 카뮬리타에서 최고라 할 정도로 강한 마법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뮬리타의 자랑이자 온 마법사들의 우상이던 1황녀 아르벨라가 살아 있을 때도 유디트는 그녀와 유일하게 어깨를 견줄 황족으로 평가받았다.

아르벨라가 불미스럽게 죽은 이후에는 특히나 유디트를 두고 카뮬리타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자 빛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 카뮬리타 하늘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열렸던 균열을 가까스로 닫고, 타락한 1황녀를 처단한 일로 모두가 유디트를 영웅이라 칭송했다.

그리하여 참으로 고단했던 인생의 여정 끝에, 결국 유디트는 세드릭 황제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선택받아 오늘 책봉식을 앞두고 있었다.

언젠가 반쪽짜리 황녀라 무시 받던 볼품없는 소녀가 지금은 이렇게 모두의 축복과 사랑을 받는 여인이 되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약속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앞에 꽃과 금으로 꾸며진 길만이 놓여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유디트는 1황녀 아르벨라가 죽은 뒤부터 단 하루도 미소를 보인 날이 없었다.

특히나 책봉식이 예정된 오늘 아침부터는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모습을 보여 시녀들의 의문을 샀다.

그녀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인 이유는…… 유디트 스스로 이 자리가 정당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가질 수 있는 게 있던가?

그 아르벨라조차 생명력과 맞바꿔야 했던 힘이었다.

하물며 어느 날 갑자기 유디트에게 예고도 없이 주어진 이 강대한 마력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유디트가 강해지는 대신 이 세상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고작 열여섯 살 먹은 어리석은 소녀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그리고 그녀의 마법사들이 뭣도 모르고 저 힘을 빌려 쓴 탓에……. 그 옛날 솔렘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 진짜 이유도 모르고.

사람들은 1황녀 아르벨라가 수많은 이들을 해한 죗값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이 죄악의 대가를 어떻게 치러야 할까?

2황녀 클로에와 3황자 밀리엄을 포함해 그동안 균열 때문에 죽은 이들과 또 앞으로 죽을 수많은 생명을 어찌하면 좋을까?

“아, 아아……! 맙소사, 신이시여…….”

대관식 장소까지 유디트와 함께 이동하던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중 일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기도 했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균열이 지평선 너머의 하늘까지 빠른 속도로 뒤덮어 가고 있었다.

1황녀 아르벨라가 죽을 때 유디트와 마법사들이 겨우 닫아 낸 균열조차 이 정도 크기는 아니었다.

유디트도 균열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마력에 압도당한 몸이 벌벌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이 바로 이 카뮬리타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득한 절망감 속에서 유디트는 죽은 1황녀 아르벨라를 떠올렸다.

늘 아름답고 고귀하고,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 따위는 추호도 보인 적이 없던 유디트의 이복 언니.

유디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여동생으로 대해 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사를 죽여 불온한 마법의 제물로 삼기까지 한 그녀를 지금도 미워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자신이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아르벨라의 등을 바라보며 언젠가 그녀의 옆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꿈꾸었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녀님……!”

사실 유디트는 철이 들 무렵부터 그녀가 닮고 싶던 아름다운 황녀님을 늘 무리해서 흉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실 그녀가 억지로 꾸며내 뒤집어쓴 휘황찬란한 껍데기 속에는 겁쟁이 소녀만이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지금도 유디트는 이 상황이 너무 두렵고 버거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만들어진 가짜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구원자로 여기는 사람이 사실은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금 바로 균열로 이동하겠다.”

결국 유디트는 늪에 빠진 듯이 무거운 발을 움직여, 기어이 자신을 집어삼켜야만 만족할 지옥의 문으로 향했다.

* * *

“1황녀님. 다음 일정이 시작되기 30분 전입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나는 날이면, 늘 깊은 심해에 몸이 가라앉았다가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귀에 꽂힌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무거운 잠에서 건져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익숙한 방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손에서 힘이 빠지며 그 안에 꽉 쥐고 있던 무언가가 밑으로 흘러내리듯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설핏 눈을 가늘게 좁힌 뒤, 방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가 기대앉은 소파 옆에 서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고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다음 일정까지 30분이 남았다고?”

“네, 시녀를 안으로 들일까요?”

사냥제가 끝난 뒤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흘러갔다.

사실 수면 부족이야 나한테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요즘은 특히나 피곤했다.

할 일이 많아 바쁘기도 했고, 불면증도 전보다 심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제라드를 잠깐 세워 놓고 보고서를 읽다가 이렇게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들어 버릴 정도로.

그냥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척하기에는, 방금 손에서 놓친 종이가 밑으로 떨어져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어느새 내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기까지 했다.

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시계를 확인하는 동안 제라드는 방금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웠다.

나는 담요를 옆으로 치우며 제라드에게 까칠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잠들었으면 깨워야지, 이렇게 더 자라고 담요를 덮어 주면 어떻게 해? 나 바쁜 거 몰라?”

“여유 시간이 좀 있는 듯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라드는 나한테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요즘 밤마다 잠을 잘 못 이루시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는 담담하게 종이를 모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직설적인 그의 말에 담요를 잡고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원래 내 성격이라면 감히 나를 걱정하다니 아직 십 년은 이르다고 힐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제라드의 눈을 정면으로 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말이 입 밖으로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짧은 시간이나마 자고 일어났더니 아까보다는 정신이 좀 맑아진 것 같아서 제라드를 더 책하기도 뭐 했다.

나는 작게 혀를 찬 뒤 제라드에게 명령했다.

“시녀를 안으로 들여. 넌 잠깐 나가 있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도 밖으로 나갔다.

다음 일정을 위해 황도를 걸어 이동하던 길에 라미엘과 마주쳤다.

“아르벨라. 너도 회의실에 가는 길인가 보네.”

늘 요란할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던 라미엘은 요즘 적응이 되지 않을 만큼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고 나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어쩐 일로 오늘은 황실 회의에 불참하지 않나 보지?”

라미엘은 내 질문에 온몸으로 귀찮다는 내색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한 번씩 얼굴은 비춰 줘야 불호령이 안 떨어질 테니까. 요즘 내가 수색대 핑계를 대면서 자주 빠지긴 했잖아?”

“알긴 아는구나. 가뜩이나 그레이엄 후작 문제로 예민하시니까 눈치 챙겨.”

“그래도 요즘은 친애하는 4황녀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지신 것 같던데. 사실 오늘 회의도 반쯤은 그것 때문에 여는 것 아니야?”

나는 입술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라미엘의 말을 듣고 침묵했다.

사냥제 이후로 여름도 끝나고, 계절이 바뀌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유디트의 태생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파생된 변화 또한 작지 않았다.

“너랑 잡담하다가 늦겠네. 길 막지 말고 비켜.”

나는 내 얼굴을 살피듯이 다소 집요하게 응시하는 라미엘을 뒤로한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라미엘이 나를 부르며 따라왔으나 무시하고 그냥 걸었다.

라미엘까지 상대하기에는 오늘 내가 너무 피곤했다.

* * *

“앗, 황녀님……!”

며칠 동안 이상하게 몸 상태가 계속 별로더니, 결국 코피가 났다.

내 옷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피가 떨어지는 코를 막자 하얀 장갑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옷도 다 갈아입었는데 이게 무슨 짜증스러운 일이람?

“괜찮으세요, 황녀님? 어쩐지 요즘 너무 무리하신다 했어요!”

마리나가 황급히 손수건을 가져와 피를 지혈했다. 오늘도 건방지게 나를 책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무리했다고 그래? 원래 계절이 바뀔 때는 혈관이 약해져서 코피가 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랬어.”

“19년 동안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면서 무슨 소리세요!”

마리나……. 한동안 얌전하더니, 오늘따라 박력 터지네.

이런 마리나는 전투력이 급상승해서 내가 제 주인인 것도 잊곤 했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되돌려 주곤 했기 때문에, 나도 그냥 그녀와 실랑이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되자 시녀들이 이번에는 피가 묻은 내 옷에 손을 대려고 했다.

“아, 됐어. 그냥 놔둬.”

하지만 이제 와서 씻고 옷을 바꿔 입기에는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마법으로 해결했다.

이미 오늘 저녁에 있을 큰 연회를 위해 단장한 참이라, 처음부터 그 과정을 반복하자니 몹시 귀찮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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