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S공금]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해 보셔야 그동안의 제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아주실 것 같아서요.”
더 열받게도, 제라드는 방금 무슨 짓을 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소 집요하게 느껴지는 눈길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의 낯짝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해 보였다.
제라드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하나가 깊게 얽혀 있어서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마력은 계속 내 안쪽을 살살 간질여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해?”
“황녀님께서 제게 매번 하던 일이니, 어쩌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느릿하게 말을 이은 제라드가 다음 순간 입가에 어슴푸레한 미소를 덧그렸다.
“이렇게 보니 저와 다를 바도 없으시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소리 없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라드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떼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 있던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제라드는 바로 내 말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손가락 사이로 슬쩍 치켜뜬 눈을 들어 경고하듯이 쳐다보자, 이내 나와 단단히 얽혀 있던 제라드의 손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다시 시선을 내리고 방금보다 살짝 음량이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앞으로 이런 건 자중하도록 하지.”
지금까지 내가 자각 없이 무슨 짓을 해 왔는지 깨달으니 정신적 타격이 작지 않았다.
그동안 나도 이런 식으로 제라드의 속을 거침없이 헤집어 왔던 것을 떠올리자 민망한 기분이 들면서 그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반길 줄 알았던 제라드는 또 뭐가 불만인지, 서서히 느슨해지던 손에 다시 힘을 줘 조금 아플 정도로 세게 내 손가락을 옭아맸다.
“그렇다고 아예 하지 마시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얘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걸 원하고 너도 한번 당해 봐라, 했던 게 아니었어?
“그럼 뭐야? 나더러 뭘 어쩌라고?”
제라드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제라드는 내게 흘려 넣던 마력을 전부 거두어 갔는데, 이상하게도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또다시 속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제라드의 손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놓고, 눈에 힘을 줘 그를 노려봤다.
“무엄한 놈. 아까부터 자꾸 날 내려다보고 있잖아. 당장 무릎 꿇어.”
사실은 조금 전 일로 심술이 더해져서 괜히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
그래도 제라드는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버티지 않고 순종하듯이 바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제라드의 무릎이 바닥에 닿고 그의 몸이 낮추어진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라드가 서 있을 때보다 눈높이가 비슷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해 뜰 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이러고 있어.”
오늘만큼은 제라드에게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소 쌀쌀맞은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을 내린 뒤 먼저 정원을 빠져나가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결국은 잔디 위에 멈춰 선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해 뜰 때까지는 너무 늦으니까 한 시간 후에 들어가든지.”
그런 뒤 이번에는 좀 더 걸음을 서둘렀다.
왠지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거의 뛰다시피 침실로 돌아갔다.
* * *
유난히 길었던 것 같은 사냥제가 드디어 끝나는 날이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조사실에서 사라진 일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도 그를 추적하는 일의 총 책임을 맡아 바빴지만, 오늘은 사냥제의 마지막 날이라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 사냥터에 나왔다.
“지금 거기서 뭘 하고 있지?”
그러다 사냥터를 둘러싼 결계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자리를 옮긴 직후, 곧이어 눈에 띈 광경에 팔짱을 꼈다.
“헉! 베, 벨라 누나!”
2황자 로이드가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앞에 있는 마력석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의 손이 닿아 있던 것을 힐끔 내려다봤다.
로이드가 만지던 건, 사냥터 주변을 둘러싼 방어막을 작동시키는 마력석이었다.
방어막은 각 한 겹씩 총 4개였는데, 그중 로이드가 손을 댄 건 가장 외부에 위치한 1중 방어막이었다.
“이, 이건 있지……. 그냥 궁금해서 본 거야. 올해부터 결계 마력석의 마법 수식 조합이 바뀌었잖아? 그래서 학구적인 호기심이 들어서!”
로이드는 두 눈을 흔들면서 별 같잖은 변명을 늘어놨다.
그러면서 그는 천막 밖에 망을 보는 용으로 세워 둔 제 수행원들을 노려봤는데, 그들은 이미 내가 건 금언 마법에 걸려 식은땀만 흘려 대고 있었다.
나는 마력석에 닿았던 시선을 돌려 다시 로이드를 쳐다봤다.
조금 전에 숲에 근접한 산책로 쪽으로 가던 유디트가 떠올랐다.
분명 비비안이 불러서 간다고 했었는데.
사냥제 첫째 날에 있었던 일로 계속 마음이 쓰였는지, 비비안과 둘이 잘 이야기하고 돌아오겠다며 의지를 다지는 얼굴이었다.
“동생아.”
“으, 으응?”
내가 가만히 입을 열어 자신을 부르자 로이드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너 혼자 꾸민 일이니, 아니면 다른 동생들과의 합작이니?”
“그게…….”
“너 혼자 독박 쓰겠다고? 알았어.”
“비, 비비안이랑 같이 한 거야!”
로이드는 의리도 없고 패기도 없었다. 결국 배신자가 되어 진실을 실토한 로이드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기꺼이 그의 기대대로 마력을 움직여 로이드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그런 뒤 그를 수행원들에게 던져 줬다.
“으악! 푸, 풀어 줘! 나더러 이러고 밖으로 나가라고?”
나는 꽥꽥거리는 로이드를 무시하고 마력석들에 보호 마법을 건 뒤 먼저 천막을 나섰다.
“로이드, 네가 유디트하고 동갑이었지. 그럼 너도 벌써 열여섯 살인데 이제 그만 철 좀 들어라.”
가뜩이나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언제까지 내가 이 녀석들의 뒤를 닦아줘야 하는 건지, 원.
“유디트.”
“아르벨라 언니!”
산책로로 가자 나무 뒤쪽의 으슥한 곳에서 유디트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비비안도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벨라 언니? 언니가 왜 여기에……. 너, 네가 언니한테 오라고 한 거야?”
“아니에요!”
“곧 사냥제가 마무리될 시간이라 데리러 온 거야.”
나는 자기가 로이드와 꾸민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유디트를 향해 적반하장으로 눈을 치켜뜨는 비비안에게 대답한 뒤, 유디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둘이 얘기는 다 끝났어?”
“글쎄요…….”
유디트의 미묘한 얼굴을 보아하니, 비비안이 제대로 된 대화는 하지 않고 괜히 시간만 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비비안의 입장에서는 유디트와 정말 화해하기도 싫을 테고, 그렇다고 또 지난번처럼 성질을 부려 유디트가 자리를 떠나게 만들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만 자리로 돌아가자. 비비안, 유디트와 꼭 지금 더 나눠야 할 얘기가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황궁으로 돌아가서 마저 대화하도록 해.”
“벨라 언니, 그래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난 유디트랑 조금만 더…….”
“참. 로이드도 먼저 자리로 돌아가 있단다, 비비안.”
나는 경고 어린 시선으로 비비안을 내려다봤다.
비비안은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로이드와 꾸민 짓거리가 내게 탄로 났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키며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았다.
“나, 나는…… 그럼 먼저 갈게!”
결국 내 싸늘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비비안이 먼저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언니, 우리도 가요.”
나는 그 뒷모습을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보다가 유디트와 함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하기 시작한 고민이 또다시 마음을 어지럽혔다.
“유디트. 네 어머니가 줬다는 목걸이, 아직도 매일 하고 다니니?”
“목걸이요? 네! 언니가 지난번에도 이음새랑 체인을 고쳐 주셔서 아주 튼튼해요!”
유디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다.
밀리엄의 납치를 사주했던 놈들은 분명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었고, 그건 지하 감옥에 아직 갇혀 있는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유디트의 출신이 밝혀져 자칫 그들과 잘못 엮이기라도 하면, 그녀는 카뮬리타 황실 내에서 지금보다 더 열악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었다. …라는 생각을 얼마 전에도 나 혼자 합리화하듯이 머릿속에 되뇐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유디트를 위해 그녀의 출생을 숨기고 있다는 말은 비겁한 핑계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 유디트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유디트가 언제까지나 내게 속해 있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내 새장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비열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영원히 비밀에 부쳐지는 한, 유디트는 계속 반쪽짜리 황녀로 내 옆에서 살아가야 할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내가 바라 온 게 바로 그것임에도, 언젠가부터 나는 유디트가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어딘가 하자 있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거, 다음에 레반테온에게 보여줘 봐.”
그래서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평소에 하지 않던 도박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 운이 유디트에게 따라 줄지, 내게 따라 줄지, 어느 쪽이든 확신할 수 없었지만.
유디트는 ‘레반테온 선생님에게요?’라고 의아한 듯이 물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날, 제라드는 정말 숲에서 집채만 한 황금색 마법 생물을 사냥해 와 내 눈앞에 가져왔다.
“1황녀님. 원하시던 금빛 갈라시아를 잡아 왔습니다.”
제라드에게 선수를 빼앗긴 킬리안이 뒤에서 슬쩍 눈매를 찡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제라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금빛 갈라시아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처음 숲에 들어갔을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 나서 내 손을 잡아 거기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제 유일한 주인께 영광을.”
어쩌면 그때 나는 불현듯 깨달아 버렸던 것도 같다.
어쩌면 내 미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