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 *
그레이엄 후작이 돌았나?
카타리나의 응접실을 나서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를 받는 중에 탈출이라니, 이래서야 자신에게 켕기는 구석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되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알아서 증거 불충분으로 그가 한 일에 비해 훨씬 가볍다고 할 수 있는 형이 떨어졌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아니……. 이 경우에는 그레이엄 후작이 아니라 라미엘이 돌았는지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1황녀궁이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조금 더 걷자, 내가 보고자 한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아직 제 외숙부의 소식을 모르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한 채 걷고 있는 라미엘에게 다가갔다.
“너 뭐 한 거야?”
“뭐가?”
“시치미 떼지 말고.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알잖아?”
그와 내 뒤에는 각자의 수행원들이 딸려 있었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라미엘은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질문한 순간, 라미엘이 나를 향해 웃었다.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입매를 끌어당겨 소리 없이 지어 보인 그 예쁜 미소에 어째서인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곧 황제 폐하께서 우리 외숙부를 잡으러 수색대와 추격대를 보내겠지?”
“…….”
“3황자를 해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있으니, 황후 전하의 면을 봐서라도 분명 총 책임은 네게 맡기실 테고. 하지만 아르벨라, 조금만 더 기다려.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는 거 너도 알잖아.”
라미엘은 꼭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그와 내 생각이 일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도 라미엘이 지금 무엇을 원해 이런 짓을 벌였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너도 고작 팔이나 다리 정도 잘라내자고 시작한 일은 아닐 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리고 너는 종신형 정도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라미엘은 꼭 선물 상자를 눈앞에 둔 아이처럼 묘하게 들뜨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달콤하게 웃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우리 외숙부에 대해서는 나도 지분이 있어.”
분명 머리 위로 내리쪼이는 햇빛은 따사로운데, 기묘한 안광으로 번들거리는 라미엘의 푸른 눈은 내게 한기를 느끼게 했다.
라미엘이 무슨 수를 써서 그레이엄 후작을 조사실에서 내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든 것은 오히려 나보다 한술 더 뜬다고 할 만했다.
“1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황제궁에서 나온 시녀가 나와 라미엘의 앞에 서서 황제 폐하의 호출을 알렸다.
“가 봐, 아르벨라. 나도 곧 황제 폐하를 뵈러 갈 생각인데 너한테 먼저 순서를 양보할게.”
라미엘은 여느 때처럼 설탕을 바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살짝 찡그린 눈으로 그런 라미엘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너…… 일단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그를 남겨 둔 채 먼저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가 벤치에 누웠다.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다.
예상대로 황제 폐하께서는 그레이엄 후작의 도주 소식에 크게 진노했다.
바로 그를 찾으러 황궁 기사들이 소집되었지만, 결국 범인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라미엘의 말처럼 그레이엄 후작을 붙잡아 오는 일에는 내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라미엘 역시 수색대에 속하게 되었다. 그가 먼저 황제 폐하께 찾아가 주청드렸기 때문이다.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의 조카였기에 처음에는 당연히 반려당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자신이 앞장서 조금이라도 외가인 그레이엄 가문의 죄를 덜고 싶다며, 모친인 2황비와 클로에를 봐서라도 재고해 달라는 부탁에 결국은 황제가 져 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낮에 나눈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라미엘의 목적은 그레이엄 후작을 하루 속히 잡아 오는 것이 아닐 터였다.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시간에 정원에 나오신 건 오랜만이군요.”
그렇게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정원의 벤치에 누워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목소리가 귀에 익다 못해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내가 있는 정원에 조용히 나타났다.
“오늘은 어쩐 일로 밤 산책을 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밤의 고요함이 깃든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풀잎 우는 소리에 실려 내 귀에 날아들었다.
“얼마 전부터 좀처럼 제게 곁을 주시지 않아 일부러 단둘이 있을 자리를 피하시나 했더니.”
제라드의 말은 퍽 직설적이었다. 눈가를 가린 손을 치우지 않은 채 나도 작게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 잘도 내 앞에 나타났구나.”
나는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의중을 알면서도 굳이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고 나타난 제라드를 무엄하고 괘씸하다 할 만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뭘 먹고 그리도 간이 큰지, 내게 뻔뻔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녀님께서는 제게 이곳에 오면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명령할 테니 어서 가 버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데 조금 전부터 방해되는구나.”
“원래 지금은 제 취침 시간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황녀님께서 제게 관여하실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제가 정 거슬리시거든, 차라리 황녀님께서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여기십시오.”
“뭐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눈을 가린 손을 뗐다.
제라드는 달빛을 받고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제라드의 궤변에 기가 막혀서 한 소리 해 줄 생각뿐이었는데, 그 순간 이상하게 입이 다물렸다.
어째서인지 먼저 시선을 끊어낼 수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제라드와 가까이에서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물론 그동안 제라드와 함께 움직인 적은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와 시선을 길게 맞대는 걸 은연중에 피했었다.
“……넌 가끔 보면 정말 건방질 때가 있어.”
하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제라드가 이런 태도를 보여도 허용해 주는 내가 문제였다.
정말 싫었다면 따끔하게 벌을 내리든, 진지하게 혼을 내 주든 하면 되었을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또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나자 나는 괜히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네 본분을 잊지는 않았겠지? 정 돌아가기 싫다면 이리 와서 날 일으켜 주기나 해.”
그래서 제라드가 제 발로 가지 않겠다면 저절로 가고 싶어지게 만들어 줄 생각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제라드의 눈이 살짝 가늘게 떠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걸음을 떼 내게 다가왔다.
앞으로 내밀어진 제라드의 손을 잡자 상체가 단번에 위로 끌려 올라갔다.
거의 동시에 나도 마력을 움직여 맞잡은 손으로 흘려보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몸 안의 마력을 확인하는 걸 제라드가 싫어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한 짓이었다.
“황녀님은…….”
그런데 이번에는 제라드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굳게 닫혀 있던 제라드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듯이 건드릴 때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상함을 느낀 순간, 갑자기 맞잡은 손을 타고 뭔가가 내 안을 파고들었다.
나는 곧바로 당황해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딱딱한 손마디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나를 더 깊게 옥죄었다.
“그러니 이렇게 겁 없이 자꾸만 사람을 들쑤시는 거겠지.”
마주한 눈빛에 뜨거운 불씨가 박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제라드의 마력이 뭉텅이로 더 많이 밀려 들어와 내 안 깊숙한 곳을 휩쓴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 하는 신음을 삼켰다.
귀까지 홧홧하게 열이 오르고, 나조차도 도대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를 곳이 간지럽고 울렁거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라드가 맞잡은 손을 당겨, 벤치에 앉은 채로 비틀거리는 몸을 그에게 기대게 했다.
나는 제라드를 뿌리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비어 있는 손으로도 그의 옷을 붙잡았다.
그동안 누구도 감히 내게 이런 것을 시도한 적 없었다.
아주 어릴 때 내 병을 진단한 마법사들이 마력을 살핀 적은 있었지만, 그건 지극히도 건조한 의료 행위에 불과했다.
그래. 이렇게 집요하고 탐욕스럽기까지 한 느낌으로 감히 내 안을 진득하게 훑고, 제 흔적이라도 새기려는 것처럼 질척하게 마력을 얽어 오는 건…….
“너, 이…… 이 무엄한…….”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제라드의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제라드가 그랬던 것처럼 숨을 얕게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달아오른 눈가와 귀가 뜨거웠다.
이제야 그동안 제라드가 왜 내가 같은 일을 할 때마다 내게 파렴치한 짓이라도 당한 것처럼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건 너도 한번 당해 보라는 제라드의 복수인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건 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말 나한테, 나한테 직접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들어 흐트러진 숨을 씨근덕거리면서 제라드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