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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18화 (134/203)

118화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냥. 이번에 세계의 이면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게 좀 생겼는데, 혹시 레반테온도 아직 연구 중인가 궁금해서.”

역시 레반테온은 눈치가 빨랐다.

내가 딱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그는 알아서 숨겨진 뜻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흐음.’ 하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원래 자료 공유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1황녀님과는 예전부터 도움을 주고받던 사이이기도 하고……. 또 이전에 1황녀님께서 주신 세계의 이면에 대한 정보가 연구에 어느 정도 참고가 되기도 했으니 특별히 그동안 제가 정리한 내용을 보여 드리지요.”

“어머나,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고마워라. 레반테온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박히도록 자세히 살펴볼게.”

나는 빈말로도 거절하지 않고 지난 몇 년 동안 레반테온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담긴 그의 자료들을 날름 손에 넣었다.

“참, 그런데 백야의 전당 앞에 있는 석판 말이야. 볼 때마다 느낀 건데 위치가 너무 별로지 않아?”

“백야의 전당 소속 마법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이요? 그런가요?”

“그래, 지리학적으로도 좋은 위치가 아니야. 최대한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

“1황녀님 말씀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위에 제가 말씀드려 보지요.”

그러고 나서 나는 살짝 시원한 마음으로 백야의 전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때, 눈에 익은 시녀 한 명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1황녀님, 2황비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지금 잠깐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벌써 사흘째 나를 찾아오고 있는 2황비 카타리나의 시녀였다.

나는 내 앞에 조아린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무슨 말씀을 그리 간곡히 하려 하시는지 어디 한번 들어 보지.”

* * *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

그레이엄 후작은 황궁 조사실에 거의 감금된 상태였다.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후작이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라미엘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틀 내로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 이 굼벵이 같은 놈! 이렇게 늦은 이유가 뭔지 입이 있으면 어디 변명이라도 해 봐!”

며칠 내내 라미엘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엄 후작이 성난 얼굴로 호통을 쳤다.

하지만 라미엘은 그레이엄 후작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그저 피곤한 듯이 대꾸했다.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여기까지 몰래 오기가 어려웠거든요.”

“뭐?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라미엘의 말에 일순간 흠칫하던 쥬논 그레이엄이 곧 알 만하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개돼지 같은 것들이 또 이 쥬논 그레이엄의 흠을 잡았다고 신이 나서 달려들어 너도나도 물어 뜯어대고 있는 거겠지. 그런 놈들이 떠드는 소리는 하등의 쓸모도 없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또 바닥에 납작 엎드려 내 발이라도 핥으려고 들 벌레 새끼들이야. 그러니 중요한 건 폐하의 의중뿐이다.”

그레이엄 후작은 마음을 한결 가라앉힌 듯이 다시 의자에 앉아 라미엘에게 물었다.

“그동안 시간은 충분했으니 알아볼 만큼 알아봤겠지? 폐하께서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다더냐? 어차피 내가 직접 금단술에 손을 댔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어 형벌을 내리기도 어려울 텐데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지, 원.”

비록 죄를 의심받아 이렇게 황궁 조사실에 붙들린 신세라고는 하나, 그레이엄 후작에 대한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조사관들의 고개는 건방질 정도로 뻣뻣했으나, 그렇다 해도 다른 죄인을 대할 때처럼 그레이엄 후작에게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해 취조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그레이엄 후작이 한 말처럼, 그의 죄를 확정 짓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저택에서 금단술의 현장이 발견된 것 자체로도 이미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게 그레이엄 후작이 금단술을 직접 실행했다는 의미와 상통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그레이엄 후작은 이미 자신의 죄를 뒤집어 쓸 희생양도 간신히 시간을 맞춰 준비해 놓았다.

설령 심증은 있다 해도 어차피 그레이엄 후작 정도 되는 고위 귀족이면 다들 눈 가리고 아웅 해 주는 법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레이엄 후작이 짊어질 죄는 가솔을 단속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뿐이리라.

그러니 이렇게 적당히 조사를 받는 척하다가 뒤에서 세드릭 황제에게 이점이 될 만한 무언가라도 한두 개 떼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동안 자숙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될 터였다.

그런 확신을 하고 있던 그레이엄 후작이기에, 사실상 지금 라미엘에게 물은 것도 세드릭 황제가 자신에게 어디까지 뜯어낼 생각이냐는 확인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이후에 이어진 라미엘의 말은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폐하께서 외숙부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실 것 같습니다.”

쥬논 그레이엄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면서 또 한 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어! 종신형이라니……! 어떻게 내게 그런 선고를 내린단 말이냐!”

라미엘은 유감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그런 그레이엄 후작을 보며 답했다.

“여론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도 생각 이상으로 냉정한 반응이시고요. 금단술의 현장을 들키기 전에 3황자의 납치 사주범으로 몰린 게 컸어요. 황족 시해와 금단술, 그 두 가지가 묶였는데 반역죄로 몰리지 않는 게 이상하죠.”

“빌어먹을, 난 3황자 놈을 납치하려 한 적이 없단 말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우다니, 이 무능한 놈들! 때려죽일 천것들!”

그레이엄 후작은 잔뜩 흥분해서 사나운 욕설을 쏟아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억울하고 분한 듯했다.

“감히 날 범인으로 몬 간 큰 놈을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라! 내가 직접 그놈의 입을 찢어 놓을 것이야!”

처음에는 라미엘의 말에 아무리 그래도 설마 싶었으나, 생각할수록 세드릭 황제의 의중이 정말 의심스러웠다.

어쩐지 자신을 이곳에 처박아 놓고 아무런 말도 전해 오지 않더니만.

게다가 조사관들 역시, 자신을 3황자의 납치 사주범으로 지목한 놈과 직접 만나게 해 달라는 그레이엄 후작의 요청을 몇 번이나 거절했다.

아무리 큰 보상을 걸어 달콤한 말로 현혹시켜도, 그들은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사실은 그래서 라미엘과 이렇게 연락을 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세드릭 황제가 자신을 등지기로 결정한 것 같기도 했다.

라미엘의 말에 의하면, 카타리나 황비 역시 계속 황제궁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레이엄 후작의 그런 의심스러운 마음에 불을 지피듯이, 라미엘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이런 말씀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보다 더한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해요. 이건 반역죄로 묶일 수도 있는 일이니 혹시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가서 차라리 종신형이 더 나았다 싶을 수도 있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세드릭 황제가 노망이 난 게야!”

급기야 그레이엄 후작은 이를 갈면서 황족 모독죄를 물을 수 있는 소리까지 입 밖에 냈다.

라미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벌겋게 뜬 채 씨근덕거리는 그레이엄 후작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레이엄 후작은 분노에 눈이 멀어 몰랐으나, 그런 라미엘의 눈빛은 아주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외숙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상황이 더 여의치가 않아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따로 살길을 찾아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뒤이어 라미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차분한 음성을 듣고 그레이엄 후작이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대로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느니, 차라리 뭐라도 해 보는 게 낫겠죠.”

“그 말은…….”

라미엘의 말에 함의된 뜻을 알아차린 그레이엄 후작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말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거냐?”

“가망이 있어 보였다면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런 시간 낭비를 하고 있겠어요? 외숙부도 아시잖아요. 제가 외숙부에게 불리한 일을 할 리 없다는 거.”

물론 그건 그레이엄 후작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라미엘은 꽤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레이엄 후작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만 믿으세요. 제가 조용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드릴 테니까.”

낮게 속삭여진 목소리가 꼭 조용히 먹잇감을 옥죄는 뱀처럼 밀실 안에 소리 없이 똬리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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