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네 밑에 거슬리는 벌레들이 붙어 있구나. 죄다 터트려 죽여 버리기 전에 주인으로서 단속을 좀 더 잘하는 게 어떻겠어?”
꿈에는 아르벨라 황녀도 나왔다.
지금처럼 짧은 머리가 아니라, 융단처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아르벨라 황녀였다. 나이도 현실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지금보다 나이가 서너 살 정도 더 들어, 완전한 성인 여성이 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꿈속의 아르벨라는 유디트에게 무척이나 냉혹했다.
사냥제의 첫날, 클로에와 악몽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농담을 하듯이 ‘혹시 아르벨라 언니가 너 같은 건 싫다고 하더냐?’라는 소리를 했을 때, 정곡을 찔린 듯이 유디트가 울컥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꿈속의 아르벨라는 유디트를 볼 때마다 싸늘히 식은 얼굴을 한 채로 차가운 말들만 내뱉기 일쑤였다.
“너와 내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며 한가롭게 인사나 나눌 사이던가? 그럴 시간에 네 궁으로 돌아가서 황족으로서의 소양이나 한 글자라도 더 익혀. 아바마마께 정식으로 인정받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네 행동과 말투에서 풋내가 나도 너무 나는구나. 이래서야 카뮬리타 황실의 오점이라는 평가가 네게서 영영 떨어지지 않아도 별수 없는 일이지.”
꿈에서의 유디트는 그런 쌀쌀맞은 아르벨라도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더 지난 나중에는,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단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는 아르벨라에게 점점 원망 어린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도 이제는 1황녀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게요. 황녀님의 피는 분명 냉정한 황족들 중에서도 가장 짙푸른 색일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제가 먼저 1황녀님께 말을 걸고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아,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꿈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꿈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자신을 향한 아르벨라의 냉정한 태도 따위가 아니었다.
그 꿈에서 결국 아르벨라는 죽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손에.
그리고 또 그 이후에는…….
유디트는 꿈의 내용을 또 다시 상기하고는 몸 안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이 체온이 식는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밀리엄이 물었다.
“왜 그래? 추워?”
“네, 조금 한기가 드네요.”
“클로에 누나하고 같이 있더니, 너도 감기 옮은 거 아니야?”
“그건 아니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3황자님.”
“걱정이라니, 내가 네 걱정을 왜 해? 난 그냥 네가 지금 나한테까지 감기를 옮길까 봐 그런 것뿐이야!”
그러나 결국 꿈은 꿈일 뿐이었다. 유디트는 애써 불길한 꿈의 내용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나저나, 지금 지하 감옥에 갇힌 그 납치범의 배후에 있는 게 그레이엄 후작일지도 모른다니.
만약 그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엄청난 대역죄였다.
유디트는 사냥제의 첫날에 그레이엄 후작가 위로 연달아 세 개나 열렸던 균열을 떠올렸다.
몇 년 전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균열.
그것을 멀리서 볼 때마다 유디트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하늘에 틈을 벌리고 생겨난 균열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1황녀궁에서도 얼마 전부터 균열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살짝 드는데.’
멀리 솟아 있는 아르벨라의 1황녀궁을 한번 스치듯이 쳐다본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궁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만한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건 또 하나 더 있었다.
유디트는 다시 고개를 내려 밀리엄을 마주했다.
“그런데 3황자님, 얼마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전부터 늘 같이 다니시던 시녀는 어디에 있어요? 요즘 통 안 보이네요.”
“누구 말하는 거야? 지금 데리고 있는 시녀들이 전부인데.”
“네? 연두색 머리에 주황색 눈을 가진 시녀요. 이름이 미레이유 하이어스였나…… 그랬잖아요?”
“무슨 소리야? 그런 시녀는 없었어.”
유디트와 밀리엄은 비슷하게 의혹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유디트는 밀리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야? 내가 내 시녀 이름도 모르는 멍청이일까 봐?”
그러나 밀리엄은 정말 진심으로 유디트의 말이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유디트도 그에게 관련한 이야기를 더 묻지 못하고 의문만 끌어안은 채로 화원을 나서야 했다.
* * *
‘언제 봐도 기분이 나쁘네.’
아르벨라는 그레이엄 후작의 수집품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레이엄 후작가를 조사한 지 나흘째. 오늘도 아르벨라는 제라드와 다른 수행원 없이, 혼자 이곳에 방문했다.
지금은 늦은 저녁이라, 엄밀히 말하면 시간 외 추가 근무였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만든 불빛을 제외한 자연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암실.
이 안에는 여전히 그레이엄 후작의 동물 박제품과 갈색 머리칼의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 먼저 조사차 보냈던 사람 모양 인형은 다행히 아르벨라가 의심했던 것처럼 실제 인간으로 만든 박제품이 아니라, 밀랍으로 만든 뼈대 위에 동물 가죽을 덮어씌워 만든 진짜 인형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봐도 생김새가 섬뜩할 정도로 진짜 사람 같이 정교해서, 몇 번을 봐도 참 징그러울 만큼 섬세하게 잘 만든 인형이다 싶었다.
아르벨라는 박제품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녀는 솔렘 왕국 사람들의 마력과 마리나의 몸에 남은 마법의 흔적을 조사했을 때 직접 체감했던 느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그 느낌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방 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었다.
이미 이틀 연속으로 반복한 일이었고, 그동안 아르벨라의 탐색에 걸려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오히려 더 세밀하게 마력을 움직여 방을 훑고 또 훑었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이 방은 단순히 그레이엄 후작이 자신의 취미 생활이나 하던 평범한 수집품 방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아르벨라의 마력이 방 안 곳곳을 탐색했을까?
“……!”
마침내 아르벨라는 작은 실밥처럼 아주 미세하게 튀어나온 마력의 흔적을 붙잡았다.
찾았다. 발견했다.
드디어 틈을 찾는 데 성공한 아르벨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력식을 해제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파앗!
눈앞에 하얀 섬광이 몇 번이나 폭발했다.
과연 그레이엄 후작이 꽁꽁 숨겨둔 마법식답게 흉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법식을 두고 이렇게 꼭 살아 있는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건 웃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마법식은 아르벨라가 건드리자마자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라도 된 양 불청객을 삼키려고 사납게 날뛰어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존재감 없이 공기 중에 파묻혀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단 꼬리를 잡은 이상, 마법식과의 쫓고 쫓기는 힘 겨루기에서는 아르벨라가 더 우위에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의 끈질긴 공방 끝에 마법식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끼이익…….
그리고 마침내, 지금까지 아무런 마법적 흔적도 발견할 수 없던 바닥에 거짓말처럼 계단이 나타났다.
아르벨라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이미 박제품이 전시된 지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는 다른 공간이 더 남아 있던 모양이다.
꼭 지옥의 문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공간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 어차피 이렇게 발견될 거 그동안 쓸데없이 애먹이고 말이야.”
아르벨라는 다시 마법으로 허공에 빛을 띄운 뒤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 층 더 밑으로 내려가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앞에는 문이 하나 솟아 있었다.
방금 아르벨라가 깬 흔적이 남지 않는 마법식을 신뢰하고 있었는지, 문에는 다른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르벨라의 손이 주저 없이 그 문을 밀었다.
“윽…….”
그리고 아르벨라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문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 안쪽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무언가가 썩는 듯한 지독한 냄새가 밖으로 풍겨 나와 코를 찔렀다.
무언가를 직감한 아르벨라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녀의 옆에 둥둥 떠 있던 마법의 빛 구체가 어두운 방 안을 밝혀 주었다. 그 직후 아르벨라의 시야에 비친 광경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바닥에 크게 펼쳐진, 피로 그린 붉은 마법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잘린 짐승의 머리와 한쪽에 쌓여 썩어가는 동물 사체.
심지어 한쪽 구석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람도 한 명 널브러져 있었다.
아르벨라는 이런 것을 바로 얼마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황성 밖의 도서관에 들렀던 날, 불길한 보라색 빛기둥을 발견하고 제라드와 함께 갔던 바로 그곳에서.
“하, 이게 뭐야.”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레이엄 후작저에서 이런 적나라한 현장을 발견할 줄은 몰랐던 아르벨라의 입에서 황당함을 담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카뮬리타에서 엄격하게 금기시된 금단술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