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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11화 (127/203)

111화

“그건…….”

마리나는 내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말하기 좀 어려운 모양이었다.

“마리나. 네가 알지 모르겠는데, 지금 너한테 문제가 좀 있어.”

“문제……요?”

“그런 게 아니라면, 나도 굳이 이 시점에 너한테 이렇게 지나간 일을 캐묻지는 않았겠지.”

나는 팔짱을 낀 손으로 팔을 툭툭 두드리며 눈앞의 얼굴을 보다가, 마리나에게 사실을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마법약 시음회 때 약을 건드린 건 네가 맞아.”

“네?! 제가 왜……! 그럴 리가 없어요!”

당연히 마리나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저는 정말 맹세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걸요. 진실을 판별하는 마법을 사용했을 때도 반응이 없었잖아요?”

“그건 네가 네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어서야.”

“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 너한테 그레이엄 후작이나 카타리나 황비 쪽과의 연관성을 물은 것도 그래서고.”

아연해하는 마리나에게 내가 챙겨 둔 영상 마력석을 보여 줬다.

사냥터에서 사람들에게 공개된 영상 마력석과는 달리, 마리나가 마법약을 건드리는 모습이 자세히 찍힌 마력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게 질려 있던 마리나의 얼굴이 이제는 정말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저는…… 저는 정말 이런 일을 한 기억이…….”

“그러니까 마리나. 일단 짐작 가는 게 있으면 그게 뭐든 다 말해 봐.”

마리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다가 잠시 후, 주저하던 마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은 이랬다.

마리나의 가문은 뿌리가 깊어 귀족 중에선 그럭저럭 명망 있다 할 수 있었지만, 그 이름에 비해 그리 실속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나가 어릴 때 그녀의 부친은 인맥 형성을 위해서 쥬논 그레이엄 후작과 연줄을 이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러던 차에 어째서인지 하루는 마리나를 데리고 그레이엄 후작가에 방문했다.

“제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이니 아마 열다섯, 열여섯 살 때쯤일 거예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후작님이 하는 일에 조금만 도움을 주면 된다고 했어요.”

당시에 마리나의 가문은 재정 상태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레이엄 후작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굴었고, 마리나에게도 그의 비위를 잘 맞출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저는 그 방에 들어갔어요.”

갑자기 마리나가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그걸 다시 보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굉장히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고, 마리나가 말했다.

그리고 당시의 일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아도 자신의 아버지 역시 그 무서운 일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의 일로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나한테 그 일을 말하는 걸 주저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그레이엄 후작님이 어떤 마법을 사용했고, 결국 실패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뭔가가 뜻대로 안 되었는지 짜증을 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그 자리에 카타리나 황비도 있었어?”

“아마… 아니요. 그곳에는 그레이엄 후작님만 있었어요. 아……. 하지만 그날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간 뒤에 황비님을 언뜻 봤던 것 같기도 해요.”

마리나의 말을 들은 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나, 손 좀 줘 봐.”

마리나의 마력 상태를 살폈다. 역시 다른 마법적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오랫동안 마리나의 몸속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마리나의 마력과는 미세하게 다른 느낌을 띤 희미한 한 가닥의 마력이 잡혔다.

한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조금 전 1황녀 궁으로 돌아오기 전에 만났던 솔렘 왕국 사람들이 떠올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오늘 직접 면밀하게 살펴봤던 솔렘 왕국 사람들의 마력의 파장이 이런 느낌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했다.

솔렘 왕국 사람들 특유의 독특한 마력과 마리나의 몸속에 있는 이질적인 마력의 느낌이 왜 이다지도 흡사하지?

물론 미레이유가 내 어머니 황후 전하와 밀리엄에게 이상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마리나도 그런 종류의 마법에 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그 마법을 시전한 자의 마력적 흔적에는 차이가 나야 했다.

‘혹시 솔렘 왕국 사람들과 그레이엄 후작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니면…….’

일단 마리나의 안에 있는 이질적인 마력을 건드려 보았다.

순간 마리나가 몸을 움찔 떨면서 고통스러운 듯이 신음했다.

그걸 보니 지금 당장 마리나에게 걸린 마법을 섣부르게 해제하려 하는 건 위험할 듯했다.

“마리나, 역시 네 몸에 마법의 흔적이 있어.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나는 마리나에게서 마력을 거두며 손을 뗐다.

마리나는 자신이 마법에 걸린 게 맞다는 말에 안심해야 할지, 더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을 해제할 방법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어. 혹시 아프거나 불편한 점은 없어?”

“그런 건 없어요. 황녀님이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걸요.”

“그럼 다행이고. 일단은 내가 더 알아볼 테니까 너도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 줘.”

“네. 알겠어요, 황녀님.”

그런데 내가 막 방에서 나가기 전에 마리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제가 정말 무서운 걸 봤던 곳은 그 인형들이 있던 방이 아닌 것 같아요. 역시 기억이 흐릿해서 황녀님께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정보를 더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요…….”

“아니야, 지금 그 말만으로도 도움이 됐어.”

역시 그레이엄 후작이 감추고 있는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방금 마리나에게서 느꼈던 마법의 흔적과, 솔렘 왕국 사람들에게서 느낀 마력의 파장을 곱씹으며 방을 나섰다.

그레이엄 후작에게 켕기는 부분이 있는 건 확실한데, 지금까지 모인 정보로 당장 그를 잡아서 조사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잠깐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황성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 *

일단 표면적으로 사냥제는 지속되었다.

하늘에 열렸던 균열은 모두 정리되었고, 그 일로 피해를 본 사람도 그레이엄 후작밖에 없었다.

“오늘 2황비님은 안 보이시네요.”

“당연히 그렇겠죠. 나 같아도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을 거예요.”

이튿날부터 2황비 카타리나는 사냥제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냥제 때마다 매일 얼굴 도장 정도는 찍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라 할 만했다.

사람들은 사냥제의 첫날, 시음회가 열린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시끄럽게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 대상에는 당연히 그레이엄 후작도 들어가 있었다.

그는 현재 봉쇄된 후작저가 아닌 2황비 카타리나 소유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사냥 대회가 이어질 시각에, 황실 기사단이 그레이엄 후작이 있는 저택으로 들이닥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쳐들어와!”

그레이엄 후작이 진노해 외쳤으나, 황실 기사단의 총책임자인 오귀스트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쥬논 그레이엄 후작님, 조사를 위해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뭣……! 조사라니?”

그레이엄 후작의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혹시 후작저를 조사하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나 싶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빠져나갈 구멍을 완전히 준비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훨씬 시기가 일렀다.

하지만 이어서 그레이엄 후작에게 떨어진 오귀스트의 말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었다.

“얼마 전 3황자님의 납치를 시도했던 자가 배후에 그레이엄 후작이 있노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실 말씀이 있다면 잠시 후에 하시지요.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속히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레이엄 후작님.”

그레이엄 후작이 황망함에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오귀스트가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잠시 후, 아르벨라는 그레이엄 후작이 황실 기사단에 의해 이송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놨다.

아직은 모든 것이 증거 없는 혐의일 뿐이고 주어진 시간은 짧으니, 일단은 뒤에서 허튼 짓을 못하게 수상한 놈을 먼저 잡아 놓고 시작하는 게 나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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