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110화 (126/203)

110화

그녀는 아주 초췌한 얼굴이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미레이유는 솔렘 왕국 사람 중에서는 지금의 상황에 가장 빠르게 적응해 비교적 마음의 평안을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새 병마라도 걸린 것처럼 핼쑥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다른 마법사들에게 들은 말처럼 정말 균열을 여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긴 했나 보다.

“너, 이제 괜찮은 거야?”

“좀 더 누워 있지.”

“괜찮아. 아무렇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모여 세상 애틋하게 속닥거리는 모습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막 방에서 나온 미레이유를 둘러싸고 안부를 확인하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면 도대체 누가 악당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을 듯했다.

나는 고개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마법사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도 내가 얼마나 많이 봐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저렇게 설치네.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두고 속으로 혼자 무언가를 재 보며 의자의 팔걸이를 느리게 툭툭 두드렸다.

“1황녀님이 오신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날 걸 그랬네요.”

그나마 미레이유가 개중에서는 제일 나았다. 그녀가 나를 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제가 없는 동안 카챠가 무례를 끼친 일이 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확실히 무례하긴 했지.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어.”

확실히 오늘의 나는 조금 너그러웠다.

그걸 느꼈는지, 미레이유가 가늠하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물려 있던 입술을 뗐다.

“혹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내 앞에서 아무 마법이나 한번 사용해 보라는 권유를 하고 있었지.”

“그건 카챠 대신 제가 해도 될지요?”

“그래, 한번 해 봐.”

미레이유가 내 허락을 받고 바로 움직였다.

또 특이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오르면서 얼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한번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지나치리만큼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게 이상하더니,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 나한테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것은 곧 내 보호 마법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마법사들이 긴장해 숨을 죽였다.

그러나 미레이유는 꼭 시키는 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듯한,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내 앞에서 정면으로 공격 마법을 쏴 보내 재롱을 부린 미레이유를 벌하는 대신 다시 명했다.

“한번 더 해 봐.”

내 말을 들은 미레이유가 다시 한번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미레이유의 마력에 주의를 집중했다.

미레이유는 간이 커서 이번에도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내가 허락해서 정당하게 공격할 기회가 있을 때 틈을 노리려는 수작임이 느껴졌다.

이내 마법식이 사라지고 마력의 움직임도 멈췄다. 나는 잠깐 가만히 앉아 미레이유를 주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그 상황을 몇 번 더 반복하자, 미레이유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더.”

“1황녀님! 미레이유는 지금 큰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 후유증이 남아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그때 아까부터 미레이유의 상태를 걱정하는 듯하던 마법사가 외쳤다. 이번에도 나를 향한 눈빛이 악당을 보는 듯했다.

“그럼 네가 해 봐. 처음부터 내가 너한테 시킨 일이었잖니?”

이번에는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와 달리 정말 심기가 불편한 듯한 내 얼굴을 보고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이번에는 조용히 다가왔다.

“아, 넌 마법 쓰기 전에 아까처럼 나한테 손 한 짝 줘 봐.”

아까처럼 마법사가 몸을 굳혔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꽉 깨문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파앗!

이번에는 마법진이 떠오른 순간, 그것을 시전한 마법사의 몸에서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확인했다.

내 마력이 들어간 순간, 진녹빛 머리를 가진 마법사가 아까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손을 피하지는 못했다.

잠시 후, 나는 황당하게 읊조렸다.

“너희, 마법을 사용할 때 체내에 보유한 마력을 쓰는 게 아니구나?”

방금 확인했을 때, 이들이 마법을 사용한 순간에 그들의 체내에 있는 마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특이한 일이었고, 적어도 내가 살아온 동안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전례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데 솔렘 왕국 마법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어떤 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얼굴이 내게 답을 구하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한평생 이렇게 살아와서 특이한 걸 모르는 거구나. 그럼 저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생각에 잠긴 동안 저절로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런 내 얼굴을 살피던 미레이유가 조금 전보다는 나아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여쭈어 보지 못했네요. 혹시 오늘 제가 한 일은 1황녀님께 도움이 되었나요?”

그레이엄 후작저 위로 생겨난 균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꽤 재미있긴 했지.”

내가 긍정하자 미레이유는 안심한 듯했다. 그러다 그녀가 조금 전보다 한결 조심스러운 어투로 조용히 덧붙였다.

“혹시 1황녀님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될까요? 라칸은… 지금 어떤가요?”

상당히 포괄적인 물음이었다. 그만큼 이런 질문을 한 그녀의 얼굴 또한 복잡한 감정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어떻기를 바라는데?”

나는 아까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손에 고개를 기댄 채 미레이유에게 반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긴 하나 봐. 하긴. 동료가 죽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 동료가 산 채로 고문을 못 이겨 비밀을 누설하는 것도 원하지 않을 테니.”

내사 정곡을 짚었는지, 솔렘 왕국 마법사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들은 어떻게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라칸이라는 남자를 직접 황실 지하 감옥에 처넣은 게 나였으니까.

물론 나로서는 이런 그들이 가소롭기만 했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르겠구나. 가만히 있는 나를 먼저 건드린 건 너희인데.”

“1황녀님은 4황녀님이 가엾지도 않으신가요?”

그때, 미레이유가 한순간 솟구치는 감정을 참지 못한 듯이 내게 불쑥 말했다.

아마도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해서 참지 못한 듯한데, 그래 놓고 그녀는 제풀에 놀라 흠칫했다.

자기도 모르게 꺼낸 소리를 살짝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어차피 말한 거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미레이유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여기서 유디트 얘기가 왜 나오지?”

“이러고 있는 동안 4황녀님의 정당한 신분이 밝혀지는 시기도 늦어지게 될 테니까요. 더군다나 황실에 잡혀 있는 라칸이 이러다가 더 못 버티고 4황녀님에 대해 말하기라도 하면, 그분 또한 난처해지실 수도 있는…….”

궤변 중의 궤변이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서 그게 전부 내 탓이기라도 하단 말이냐?”

나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려 내 앞에 있는 미레이유와 다른 솔렘 왕국 마법사들을 비웃었다.

“애초에 너희가 그 하잘 것 없는 대의를 핑계 삼아 애꿎은 사람을 이용하고 납치하려 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전부 스스로 자처한 일인데, 어디서 뻔뻔스럽게 내 탓을 하고 있는 거지?”

오늘 미레이유가 한 말은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우스웠다.

“미레이유 양은 그래도 조금 말이 통한다고 여겼는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좀 실망스러운데.”

나는 그들을 더 상대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황녀님, 저는 그게 아니라…….”

미레이유가 말실수를 했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굳이 듣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마리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너 혹시 그레이엄 후작 가문 사람이야?”

“네? 절대 아니에요!”

1황녀궁으로 돌아와 마리나의 방에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직설적으로 던진 물음에 잠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멍한 얼굴을 하다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이 부릅떠진 눈을 보니, 마리나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그런 마리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처음에는 그런 의도로 내 궁에 들어왔다거나.”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리나가 서둘러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맹세코 1황녀님께 해를 끼칠 마음을 품고 곁에 있던 게 아닙니다. 다만 예전에… 정말 예전에 제 가문과 그레이엄 후작 가문 사이에 짧은 교류가 오갔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정말 오래전의 일이고, 제 부친이 작위에서 물러나며 끊긴 인연입니다.”

그녀는 호소하듯이 내게 말했다.

“제가 황궁에 들어오기 한참 전의 일일 뿐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 절대로 그동안 다른 마음을 품거나 1황녀님을 거짓으로 모셨던 적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일어나. 널 무릎 꿇리려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야.”

나는 마리나를 일으켜서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볼게, 마리나.”

그런 뒤 이번에는 마리나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지난번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갈색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인형을 보고 놀랐잖아. 그거 왜 그런 거야? 사실은 내가 오늘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그것과 비슷한 걸 봤거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