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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09화 (125/203)

109화

‘대부분 진짜 사람 크기잖아.’

원래 이런 인형은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 본 것처럼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인 게 보통이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거나, 장식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런데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발견한 이 갈색 머리 인형들은 거의 다 실제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걸 깨닫고 나자 왠지 나를 노려보는 듯한 인형들의 눈빛이 한결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레이엄 후작이 인형 수집가 중에서도 취향이 특이해서 그냥 이런 인형을 공방에 주문해 만들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려 내가 방금 들어온 문밖을 내다봤다.

그곳에는 동물 박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 그런 미친 짓을 할까 싶긴 한데…….

이미 한번 찜찜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한 인형 앞에 서 있던 제라드가 손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작게 줄였다. 이내 제라드의 손가락이 인형의 얼굴에 소리 없이 닿았다.

“어때?”

소리 낮춘 음성으로 묻자 제라드가 나를 돌아봤다.

“차갑습니다.”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손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낮은 음성도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왠지 기분이 나쁘네요.”

나도 제라드의 말에 동의했다. 이 장소나, 이곳에 있는 인형들이나 똑같이 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궁금하시면 직접 만져 보셔도 될걸.”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아서 말이지. 일단 뭐로 만들었는지 조사는 해 보는 게 좋겠네.”

방 안에서 다른 마법적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이만 철수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후작저를 나서는 길에 제라드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도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이었어?”

제라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것이 긍정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후작이 숨기려고 한 게 이 방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후작저에 숨겨져 있는 건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은 결국 다른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후작저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오십니까. 소신의 저택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까지도 시위하듯이 결계 밖에 꼿꼿이 서 있던 그레이엄 후작은 그것 보라는 듯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약이 오르거나, 분노가 치밀지는 않았다.

원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 후작저를 조사한 첫날부터 단번에 쥬논 그레이엄의 덜미를 잡을 만한 중대한 약점을 발견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방을 숨기고 있더군, 후작.”

나는 떠보듯이 그레이엄 후작에게 박제품과 인형들이 가득 차 있던 방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레이엄 후작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평범한 수집품들입니다. 이제는 제 취미까지 관여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멋진 물건들이던데 왜 그동안 자랑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저는 수집품을 모아 혼자 감상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그러고는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찾은 사람 형상의 인형은 특별히 따로 조사할 것을 명했다.

그런 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미레이유 양은 어디에 있지?”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내 마력 사슬에 묶여 있었다. 오늘은 제라드와 동행하지 않고 나 혼자 그들을 보러 왔다.

“무리한 탓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아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런, 균열을 여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다 알면서도 시킨 거면서…….”

미레이유 대신 나를 맞이한 마법사가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솔렘 왕국의 마법사 중에 나와 비슷한 또래로 가장 어려 보이는 외모를 가진 진녹빛 머리칼의 소년 마법사였다.

혼잣말을 작게 속닥거린다고 한 것 같지만 그의 말은 내 귀에도 무리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꼬투리를 잡아 어린 마법사를 가지고 놀지는 않았다.

“몇 년 동안 줄기차게 균열을 열어대 카뮬리타 제국을 혼란에 빠트린 자들이 고작 이런 걸로 엄살을 부리면 쓰나.”

“오해십니다. 그 모든 균열들을 저희가 만든 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사람이 불편한 듯이 몸을 옴짝거렸다.

나는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라.”

“……저요?”

“그래, 너.”

내 부름을 받은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긴장한 듯이 굳어졌다.

그는 곧 도움을 청하듯이 주위를 둘러봤으나, 다른 마법사들은 그 시선을 피했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당한 마법사가 결국 체념한 듯이 고개를 밑으로 떨군 채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제법 불쌍해 보였다.

물론 나는 그가 나를 무서워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으로 오자마자 목적을 위해 손을 붙잡았다.

“헉!”

그 순간 마법사가 소스라치며 크게 몸을 떨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마법사의 몸에 내 마력을 밀어 넣었다.

“으흐, 앗! 잠깐……! 도대체 뭘 하는……!”

왠지 예전의 제라드가 생각나는 반응이었다. 진녹빛 머리칼을 가진 마법사는 어떻게든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런 일은 나도 익숙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법으로 마법사를 한 손에 제압한 뒤, 그가 보유한 마력을 샅샅이 훑었다.

잠시 후 내가 손을 놨을 때, 마법사는 튕기듯이 자리를 박차 단숨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는 경계심이 가득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지, 지금,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예전의 제라드를 떠올리게 하는 반응이었다.

“어, 어떻게, 일국의 황녀라는 자가 이런 무도하고 방탕한 짓을……!”

그런데 내가 뭘 했다고 무도하고 방탕하대? 제라드도 나한테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이놈은 더 시건방졌다.

심지어 나와 마력 파장이 썩 잘 맞는 느낌도 아니라 도중에 불쾌해져서 금방 손을 뗐는데도 그랬다.

“이상하구나, 너희가 마법을 사용할 때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마력이 완전히 다른 느낌인데.”

나는 곰곰이 조금 전의 느낌을 떠올리면서 다시 앞에 있는 마법사에게 까딱까딱 손가락질했다.

“너, 다시 이리 와서 아무 마법이나 한번 사용해 봐.”

이전에 이들이 마법을 사용했을 때, 내 마법사의 열병이 완화되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내게는 마법사의 열병을 낫게 할 방법을 찾는 게 인생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의 느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나한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나타난 게 아니라 별다른 효과가 없을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 말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입술을 깨물며 나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특히 조금 전에 나한테 방탕하다고 했던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는 방금과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힌 채 이를 빠드득 세게 갈기까지 했다.

“우리 솔렘 왕국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바로 눈앞에서 어떤 마법을 써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거냐?”

딱히 부정하지는 않고 팔짱을 꼈다. 솔직히 저런 마음으로 내 앞에서 마법을 사용해 보라고 시킨 게 사실이었으니까.

“우리는 절대 카뮬리타 황실에 굴복하지 않아! 아무리 4황녀님을 볼모처럼 손아귀에 잡고 있다 해도……!”

아무래도 얘네들은 유디트를 마왕의 손아귀에 잡힌 가련한 왕녀님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카뮬리타 황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중에서도 이들을 핍박하고 있는 내가 마왕 역할인가 본데.

물론 이 솔렘 왕국 마법사들이 내 말을 잘 듣게 하려고 유디트의 이름을 앞에서 거론한 적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게 협박에 가까웠던 것도 맞았고.

대충 ‘너희가 내 말을 잘 안 들으면 유디트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해라.’ 같은 소리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설령 이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진짜 유디트한테 못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기껏 그것을 동력 삼아 순순히 내 말을 잘 따르고 있는 놈들에게 굳이 진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난 공격 마법을 사용하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나 보지? 단번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내가 느릿하게 꺼낸 말을 듣고 진녹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움찔했다.

이놈은 역시 솔렘 왕국 마법사들 중에 가장 어려서 그런지, 자기 감정을 제일 잘 숨기지 못했다.

“또 그런 말장난…….”

“그만해, 카챠.”

그가 또 울컥한 듯이 입을 열었을 때, 미레이유가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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