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뭐야, 진짜야?”
“아니요, 아니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웬만한 일로는 화 한 번 낸 적이 없던 유디트가 클로에의 말에 울컥한 티를 냈다.
“됐어요. 좋은 꿈도 아니고, 말이 씨가 된다고 하니까 굳이 얘기 안 할래요.”
게다가 입술이 오리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는 걸 보니 삐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저 그만 갈게요. 2황녀님도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으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중간에 꼭 쉬러 가세요.”
유디트는 더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지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클로에에게 마지막까지 당부를 남기고 갔다.
클로에는 멀어지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보면서 표정을 찡그렸다.
“뭐야……. 쟤 설마 지금 끝까지 내 걱정하고 간 거야?”
그러나 ‘허 참, 기가 막혀.’ 하고 덧붙이는 클로에의 얼굴은 어딘가 이상했다.
‘진짜 바보 아닌가? 내가 예전에 자기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예전에는 몰랐던 감정이었으나, 왠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보통 그런 것을 죄책감, 혹은 미안함이라고 불렀지만 클로에는 아직 거기까지 제 감정을 인정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괜히 ‘기가 막혀, 어이없어.’ 하고 툴툴거리면서 다과 모임이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응……? 그런데 저거 마리나 아니야?’
그리고 그러던 길에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 * *
사냥 대회가 진행될 동안 열린 다과회에는 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자리했다.
천장에서부터 드리운 차광막이 꽃가지와 함께 하늘하늘 흔들리며 잔디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르벨라가 앉은 곳은 황족석이었지만, 귀족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도 바로 옆에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
“1황녀님, 올해 사냥제 때는 월계관을 노리지 않으시나요?”
“네. 올해에는 황비님들과 즐겁고도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어머, 저희는 언제든 대환영이에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3황비 소피아가 아르벨라의 말을 듣고 웃었다.
“정말 1황녀와 이렇게 사냥제 첫날부터 차를 드는 건 오랜만이네요. 황후 전하께서도 반가우시겠어요.”
2황비 카타리나도 가늘게 미소 지은 얼굴로 샤렐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족들 중에서는 2황자 로이드와 3황녀 리리아나, 그리고 5황녀 비비안이 숲에 들어갔다.
비비안은 원래 사냥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 없었으나 아까의 일로 마음이 상해, 다과회에 참석하기보다 평소에 친하던 리리아나와 제 동복 오라비인 로이드를 따라간 것 같았다.
그 외에는 그리 특이할 게 없었지만, 다른 때라면 황후와 황비들이 앉는 테이블에 동석하는 것까지는 허락받지 못했을 유디트가 지금은 황족석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귀족들도 그것을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유디트가 이례적으로 후천적인 각성을 통해 대단한 마력을 깨우치게 된 일로 요즘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황궁 밖으로도 알음알음 소문이 흘러나간 상태였다.
“혹시 4황녀 때문에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남은 건가요, 1황녀? 1황녀가 유독 4황녀와 돈독하게 지냈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아르벨라는 카타리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카타리나는 여전히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폐하의 명으로 4황녀의 마법 전반을 가르치게 된 스승도 1황녀와 일찍이 친분이 있던 백야의 전당 소속의 마법사라고 하던데. 젊은 나이에 여섯 개의 월계수 잎을 단 인재라지요?”
레반테온 얘기였다. 카타리나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4황녀가 폐하께 1황녀를 뛰어넘을 정도의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은 게 그 덕분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무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벨라는 속으로 황제를 욕했다.
아까 그가 경솔하게 입을 놀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속을 긁을 건수를 하나 내주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하지만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는 아르벨라의 얼굴에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 걸려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백야의 전당에 앞서 권유하시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말씀드렸을 거랍니다. 2황비님의 말씀처럼 저와 유디트의 사이가 각별한데 아무에게나 교육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카타리나의 웃는 얼굴이 살짝 깨졌다.
“신기하게도 예전부터 아바마마와는 이렇게 굳이 논의하지 않아도 깜짝 놀랄 만큼 의견이 일치할 때가 많더군요. 제가 동생들보다 일찍 태어나 아바마마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 그런 걸까요?”
“아무렴 다른 황녀, 황자들보다 아르벨라 네가 폐하와 가깝지.”
2황비 카타리나의 말이 거슬렸던 건 아르벨라뿐만이 아니라, 샤렐 황후도 옆에서 딸을 거들어 주었다.
“폐하께서 황녀, 황자들 중에 이 정도로 본인과 비슷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건 너밖에 없노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샤렐 황후의 말에 아르벨라는 짐짓 겸손한 척했다.
“참 기쁘고 감사한 말씀이지요.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답니다.”
“이미 충분한걸요! 황후 전하의 말씀대로 1황녀님은 폐하께도, 또 저희 카뮬리타의 온 제국민들에게도 남다르신 존재죠!”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던 샤렐 황후의 시녀들을 선두로,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씩 말을 얹었다.
어느새 아르벨라가 원한대로 변한 분위기에, 카타리나가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도……! 요즘 레반테온 선생님께 아르벨라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많이 이야기 들었어요.”
그때, 아까부터 불편하게 입술을 달싹이고 있던 유디트가 용기를 낸 듯이 말했다.
“카뮬리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만 모인 백야의 전당에서도 연구할 때 아르벨라 언니한테 의견을 구하는 일이 많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제법 아르벨라의 체면을 살려 주는 소리였다.
유디트의 성격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리도 없었지만, 테이블 위의 분위기를 살피고 일부러 이런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누가 키웠는지 잘 크기도 했지, 하고 아르벨라는 무심코 생각했다.
“역시 보기 좋네요. 4황녀가 1황녀를 보고 배워 이렇게 훌륭해진 모양이에요.”
황족 중에서는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1황비 플로라가 2황비와 아르벨라 사이의 분위기를 완화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2황비 카타리나는 얼굴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이 이상 아르벨라를 더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간이 되었군. 그걸 가져와라.”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황후가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후 그들이 가져온 건 연분홍색 액체가 든 작은 크리스탈 병이었다.
고급스러운 보라색 리본이 달린 그것은 꼭 공방에서 만든 향수병처럼 예뻤다.
“시음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아니다. 네 말처럼 좋은 것은 함께 즐겨야지.”
아르벨라가 인사하자 샤렐 황후가 한순간 멈칫한 뒤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아르벨라에게 어마마마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다들 시음해 보게나. 이번에 우리 황실 식구가 후원하는 상단에서 새로 발표할 마법약일세.”
찻잔 옆에 하나씩 놓이기 시작한 크리스탈 병에 모두 흥미를 보였다.
“1황녀님이 새로 개발하신 걸까요?”
“이전보다 화려해진 느낌이네요.”
“그러고 보니 2황비님께서도 작년부터 비슷한 마법약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이건 2황비님의 스타일과 조금 더 가까워 보이는데.”
오늘 사냥제 때 시음회가 열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황족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오직 2황비 카타리나만이 예상했던 일을 맞이한 듯이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듯이 1황녀 아르벨라는 마법식 연구 외에, 마법약 실험에도 취미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시켜 피로 회복, 활력 증강, 집중력 상승 등의 효과를 보이는 마법약을 만들어 출시했다.
이는 아르벨라가 즐겨 마시던 미성년자들의 술……. 즉, 마력 회로를 살짝 건드려 들뜬 기분을 들게 만드는 음료에 착안해 개발한 것이었다.
효과가 좋은 것은 둘째치고 차에 넣으면 찻잎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향과 맛을 즐길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아 현재에는 기호품으로 널리 상용화되어 있었다.
이후로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마법약을 따라 만들어 시작한 사업도 제법 많이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2황비 카타리나와 그녀의 외가인 그레이엄 후작가였다.
그들은 아르벨라의 마법약보다 효과는 다소 떨어지나, 그 안에 식용 가능한 보석 가루와 꽃을 넣거나 값비싼 용기를 사용하는 등 외적인 부분을 좀 더 고급화시켜 나름의 차별성을 노렸다.
그리고 이 전략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병이 참 예쁘기도 해라. 신경을 많이 썼네요, 1황녀.”
어쩐 일로 카타리나가 상냥한 말씨로 아르벨라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장 중요한 내용물에 대한 칭찬은 다 빼놓고 병만 에쁘다고 하는 게 그녀다웠다.
“저야말로 2황비님이 후원한 그레이엄 후작가의 상단에서 곧 신제품 마법약을 출시한다는 소식을 앞서 듣고 어찌나 기대되던지. 그래서 오늘은 저도 특별히 신경 써 준비해 봤답니다. 2황비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르벨라도 그녀에게 화답하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1황녀가 이렇게 세심하게 준비한 만큼 사람들의 반응도 좋기를 바라요.”
“아무렴요. 훌륭한 마법약이니 그럴 겁니다.”
카타리나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아르벨라를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이어서 사람들이 병 안에 든 액체를 잔에 떨어뜨리자 그 안에 든 찻물이 화사한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어머나, 정말 색이 곱네요.”
“향도 좋고요.”
“정말 냄새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다들 찻잔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음?”
그때 옆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레이엄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후작님?”
“아……. 아무것도 아닐세.”
다른 이가 그에게 의문을 표했으나, 그레이엄 후작은 말을 아꼈다.
이제 본격적인 시음회가 시작되어, 모두 찻잔을 들어 마법약이 섞인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너 모금 정도 차를 마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터졌다.
“그런데…… 저만 그런가요? 갑자기 속이 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저도, 우웁……!”
다과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구역질을 하며 이상한 부작용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이들의 피부에는 그새 눈에 띄는 발진이 돋아 있기까지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당장 의원을 불러와라!”
놀란 사람들이 사냥터에 대기중인 의원들을 서둘러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