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 *
숲으로 들어간 제라드는 사냥감의 기척이 왕성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냥 대회의 참가자들은 대개 동쪽과 남쪽으로 향한 것 같았다.
첫날부터 무리해서 강한 마법 생물을 잡으려 하는 이는 드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곧바로 말을 달려 위험한 사냥감이 주로 서식하고 있는 숲의 서쪽과 북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아르벨라가 명령한 황금빛 갈라시아를 신속히 잡아 돌아가는 것이었다.
황금빛 갈라시아는 가장 포획하기 어려운 사냥감이니, 그것을 잡는다면 다른 사냥감을 잡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우승을 노려볼 만할 것이다.
아르벨라의 명령을 받고 나온 이상 제라드는 초라한 성과를 안고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냥 대회 내내 숲에 들어가 있느라 아르벨라의 곁을 비울 생각도 없었다.
‘물론 황녀가 정말 원하는 건 내 우승이 아닐 테지만.’
제라드는 자신을 포함한 1황녀궁의 다른 수행원들에게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아르벨라의 그런 강인하고 고고한 면모를 존경했다.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다 보면, 이런 것이 황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걱정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하는 아르벨라에게는 조금 화가 났다.
물론 아르벨라에게 그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제라드를 종속 기사로 삼은 것도 정말 호위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아르벨라는 카뮬리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감히 그녀에게 위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라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만큼, 얼마 전 납치 사건에서 그 강한 황녀가 그렇게 엉망인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제라드가 맞이한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로서는 아르벨라가 어째서 그 사건의 잔당들을 살려 두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르벨라에게 다른 생각이 있어 남겨 둔 것이겠지만, 제라드는 그들을 본 순간 아주 오랜만에 진심 어린 살의를 느꼈다.
스스로도 어째서 이만큼이나 강한 분노가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히 아르벨라에게 손을 댄 자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은 욕망마저 솟구쳤다.
제라드는 아직 살인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만약 그때 아르벨라가 제라드에게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마음 한구석에 생겨난 욕망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예전부터 들어 왔던 말처럼, 어쩌면 제라드는 정말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인간인 건지도 몰랐다.
감히 아르벨라가 아주 가끔이라도 믿고 등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품다니.
하지만 만약 아르벨라가 여전히 누구에게도 여린 부분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제라드는 그런 그녀의 고귀한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 주고 싶기도 했다.
“크르르.”
바로 그때, 눈앞에 덩치 큰 마법 생물 하나가 나타났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길을 돌아가는 것이 더 큰 시간 낭비였다.
그러나 제라드가 그것을 처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마력을 담은 검기가 제라드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베고 날아가 사냥감을 절명시켰다.
“미안하군. 먼저 온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
제라드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쓰러진 사냥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숲에 단풍이 일찍 들어서인지 붉은 머리가 눈에 띄지 않더군.”
흰 말을 탄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제라드를 보며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흠 잡을 곳 없는 사과였으나 제라드를 향한 그의 눈빛은 냉정하여, 방금의 일이 고의임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너도 금빛 갈라시아를 노리고 있나?”
킬리안의 물음에 제라드도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짤막한 대꾸에 킬리안의 눈썹이 작게 휘었다. 킬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던 수행원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뭐 저런 건방진……!”
킬리안이 손을 들어 수행원을 막았다.
“황녀님께서 네게 관대하긴 하신 것 같군. 아무리 유서 깊은 라스너의 혈통이라고는 하나 이제 더 이상 그 이름은 남지 않았으니 좀 더 스스로를 낮추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제라드는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킬리안을 보며 말했다.
“황녀님께서는 내게 다른 사람에게 굴종하는 법을 배우라 지시하지 않으셨다.”
킬리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제라드에게 불쾌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아르벨라와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제라드를 볼 때마다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렇게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자는 확실히 드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제라드와 오래 대치할 생각은 없는 듯, 킬리안이 먼저 말고삐를 쥐고 방향을 돌렸다.
“그래. 너도, 나도, 1황녀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게 노력할 뿐이지. 물론 네게 어디까지 운이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휘익!
킬리안의 앞으로 첨예한 검기가 날아든 건 바로 그때였다. 공기가 베이며 머리 위의 나뭇잎이 우수수 흩어져 날렸다.
하얀 말이 놀라서 우는 것과 동시에, 제라드의 공격에 당한 사냥감이 쿠오오, 단말마의 소리를 내지르며 나무 밑으로 쿵 떨어졌다.
“실례. 하필 그쪽으로 움직일 줄 몰라서.”
제라드가 이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킬리안처럼 툭 내뱉듯이 말한 뒤 검은 말을 타고 먼저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킬리안이 그 뒤에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2황녀님, 시간이 되었어요. 이제 다른 분들이 모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지금 가면 되잖아.”
시녀의 독촉에 클로에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할 사람들은 이제 모두 숲에 들어갔다. 그러니 이제는 남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교의 장을 열 시간이었다.
아르벨라의 생각대로 오늘 클로에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빴다. 지난밤에 꾼 꿈 때문이었다.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잠잠하던 악몽이 또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이런, 너희들. 허락도 없이 친구를 데려오면 어떻게 하니.”
어릴 때, 클로에는 오빠인 라미엘과 함께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여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날은,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쥬논 그레이엄이 숨겨 둔 비밀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는 그레이엄이 아닌 자를 공격하는 주문이 새겨져 있단 말이다.”
조금 전에 발동한 마법진의 흔적으로 간간이 빛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클로에와 라미엘은 외가인 그레이엄의 피를 이었기에 마법진이 발동할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클로에가 황궁 밖에서 사귄 첫 친구는 영원히 사라졌다.
“쯧,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군.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그래도 우리 조카님의 친구이니 살려 줄까?”
“네, 네! 살려 주세요……!”
“하지만 이 친구는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 멀리 보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니?”
클로에는 울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쥬논 그레이엄은 클로에가 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에 특별히 친구를 살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이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구나.”
짐짓 다정한 척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서 썩은 고목 나무의 수액 같은 악취 나는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래……. 마침 이 아이도 갈색 머리이니, 이 방에 있는 것들 중 하나에게 네 친구 이름을 붙여 줄까? 분명 이 아이 이름이…….”
그날 본 쥬논의 미소를 떠올릴 때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브리엘이었지.”
오늘 아침에도 그 꿈을 꾼 뒤, 클로에는 진저리를 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떨 때는 사브리엘이 피투성이가 되어 꿈에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클로에는 자신 때문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잘못을 빌면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원래도 클로에가 이런 식으로 시끄러운 아침을 맞는 건 가끔 있었던 일이라 시녀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태연한 시녀들의 얼굴이 또 괜히 신경에 거슬려서, 클로에는 시중을 들러 온 그들에게 성질을 부리며 베개를 던져 댔다.
“2황녀님, 괜찮으세요?”
그때, 잔디밭을 가로지르던 클로에의 옆에서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눈을 치켜떴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을 가진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유디트는 꽤 걱정스러운 눈으로 클로에를 보고 있었다.
“오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내 안색이 좋든 나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클로에는 정곡을 찔린 기분에 괜히 유디트에게 성질을 부렸다.
“이럴 시간에 벨라 언니한테나 가 보지 그래? 조금 전에 너랑 비교당한 일 때문에 언니가 마음 상했을지도 모르잖아? 물론 그게 네 탓은 아니지만!”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아르벨라 언니를 찾아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2황녀님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요즘 어쩌다 보니 너랑 내가 전보다 자주 얼굴 보고 있는 게 맞긴 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막 엄청 친해졌다고 착각하지는 마!”
“네, 그런 생각은 안 해요.”
하지만 유디트가 너무 단칼에 클로에의 말을 부정하자 거기에는 또 마음이 상했다.
‘뭐야? 내가 예전과 달리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주고 있는데?’
“전 그냥 걱정돼서 그랬어요.”
그러다 클로에는 유디트가 더 가까이 다가와서 소리를 낮추어 속삭인 말에 얼굴을 굳혔다.
“혹시 또 악몽을 꾸셔서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건가 해서.”
“너…….”
클로에의 눈이 구겨졌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유디트가 생각났다.
4년 전 유디트와 아르벨라가 처음으로 동석한 무도회 직후, 클로에는 유디트에게 경고를 하러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날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것은 클로에였다.
“그러니까, 2황녀님. 저는 사실 이 황궁에 있는 사람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아요.”
“뭐…… 뭐라고?”
“2황녀님이 가진 비밀도 저는 알고 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는지.
꼭 유디트가 자신의 모든 치부를 다 아는 듯해서, 이후로도 그녀를 볼 때마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사실 저도 얼마 전부터 이상한 악몽을 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 이번에도 입 가벼운 시녀들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자신을 협박하려는 건가 싶었으나, 이어진 유디트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즘 잠을 잘 못 자고 있는데, 2황녀님도 그러신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어요.”
뾰족해졌던 클로에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너 같은 애도 악몽을 다 꾸는구나? 요즘은 너한테 좋은 일뿐일 텐데 왜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그것도 되게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이어서…….”
“왜, 아르벨라 언니가 꿈에 나와서 너 같은 애 싫다고 말하기라도 하던?”
클로에로서는 어디까지나 의미 없이 그냥 한번 던져 본 말이었다.
유디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아르벨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유디트는 멈칫하며 얼굴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