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확실히 조금 전에 보여 준 유디트의 마법은 이제 막 마력 각성을 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사람치고 아주 훌륭했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그녀에게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태도는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리던데, 제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 봅니다.”
“1황녀.”
나도 걸음을 떼 황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내심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황제 폐하께서 나를 보고 눈매를 움찔거렸다.
“어서 와요, 1황녀. 마침 4황녀의 마법 실력이 1황녀보다 출중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폐하께서 하고 계셨답니다.”
2황비 카타리나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상 밖의 마법 실력을 보인 데다 황제에게 보기 드문 극찬을 들은 유디트를 살짝 경계하는 눈으로 보더니, 그 일로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 기회는 또 놓치지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 유디트가 카타리나의 말을 듣고 입술을 달싹이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황제도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한 듯했다.
“크흠. 유디트가 방금 마법을 사용했는데, 역시 1황녀가 동생들을 잘 돌봐서 그런지 그 성취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앞에서까지 대놓고 유디트와 나를 비교할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황제가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는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러셨군요. 동생들의 성취가 뛰어난 것은 기뻐할 일이지요.”
“그렇지. 그럼…… 다들 자리에 앉아라. 조금 전처럼 괜한 일로 소란 부리지 말고.”
상황이 더 길게 이어지는 건 피곤해서 피하고 싶었던 듯이, 황제가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확연히 5황녀 비비안을 향한 것이었다.
방금 유디트와의 자리싸움을 먼저 시작한 비비안에게 황제의 마뜩잖은 시선이 닿았다. 비비안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다른 황녀와 황자들도 하나둘씩 나를 따랐다.
비비안도 울상을 지은 채 마지못한 듯이 그토록 앉기 싫어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확실히 날이 덥긴 하구나. 음료는 됐고, 시원한 물이나 한 잔 새로 가져와.”
내 명령을 받은 시종이 곧바로 움직였다.
조금 전부터 유디트가 계속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테이블 위의 음료를 전체적으로 교환하러 온 시종들의 몸에 가려져 유디트의 얼굴은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 우리 아바마마지만 가끔은 진짜 어이없어. 방금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클로에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작게 들려왔다.
“아르벨라, 오늘은 좀 늦게 왔네. 방금 상황 되게 거지 같고 우스웠는데 말이야. 이런 꼴같잖은 상황도 피해 가고 역시 우리 누이는 타이밍이 좋다니까.”
라미엘도 얼굴에 찡그린 듯한 미소를 띤 채 가볍게 말했다. 나는 손에 든 부채로 팔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는 둘 다 오늘 어디 아프니? 안색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오늘도 눈 튀어나오게 아름답기만 한데.”
“아름다운 게 다 죽었어?”
“그건 벨라 언니 말이 맞아. 오빠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짜증 나니까 그냥 입 다물어.”
“야, 클로에. 너도 내 얼굴을 하고 하루만 살아 봐. 이런 말을 안 할 수가 없을 거라니까.”
“어우, 뭐래.”
얼마간 여느 때처럼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조금 전의 일들 때문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테이블의 공기가 살짝 이완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빈말을 한 건 아니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 앉은 라미엘과 클로에 남매는 확실히 오늘따라 얼굴들이 안 좋아 보였다.
특히 라미엘의 얼굴은 어째 날이 갈수록 병약미가 더해져 가는 듯했다.
그는 오늘도 아주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얼굴의 창백함이 더 눈에 띄었다.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오죽하련만.’
나는 차를 마시는 라미엘을 가늘게 좁힌 눈으로 조용히 응시하며 부채로 손을 툭툭 두드렸다.
라미엘이 무엇 때문에 몰래 바쁘게 움직이는지는,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리리아나.”
“응?”
“비비안의 옷매무새를 다시 만질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네가 같이 가서 도와주지 않을래?”
내 말을 듣고 리리아나가 의아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정말 많이 속상한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는 비비안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금방 테이블을 떠났다. 그래도 잠깐 머리를 식히고 오면 진정이 되겠지.
하지만 이것 역시 유디트의 잘못은 아닌데, 그녀는 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비비안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혼자 굳세게 제 권리를 지켜내더니, 이럴 때 보면 여전히 어릴 때처럼 맹탕인 부분이 느껴졌다.
“유디트.”
“아, 네……?!”
“너도 더워 보이는구나. 시원한 차를 좀 마시렴.”
내가 말을 걸어 줘서 비로소 안심했는지, 유디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잠시 후 내 말처럼 차를 마시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편안해 보였다.
매년 사냥제 때마다 그래왔듯이, 잠시 후 황제 폐하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끝나고 나도 곧바로 앞에 나가서 올해의 사냥제를 기념한 연설을 짧게 읊었다.
“1황녀님, 올해 사냥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뒤 단상 아래로 내려가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다가왔다.
“그렇게 되었어. 이번에는 다른 이들에게 우승의 기회를 양보하기로 했지.”
내 말을 들은 킬리안이 감복한 듯이 대꾸했다.
“황녀님께서 우승 후 최고의 사냥감을 자신에게 헌정하시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는 보지 못한다니 아쉽군요.”
참고로 나도 이제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해 봤다.
지난 4년 동안 나라고 해서 늘 킬리안에게 지기만 한 건 아니라 이 말이었다.
그리고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대로, 나는 우승할 때마다 승자의 권리를 적용해 가장 훌륭한 사냥감을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사했다.
처음에는 내 진취적이고 파격적인 발상에 놀란 듯하던 사람들도 이내 모두 감탄한 눈치였다.
“대신 올해는 내 종속 기사가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으니까.”
“황녀님의 종속 기사가요?”
킬리안의 시선이 내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곳에는 지금 내가 말한 제라드가 서 있었다.
기분 탓인지, 킬리안의 눈빛은 무언가를 가늠하고 재 보듯이 살짝 차갑고 건조했다.
제라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킬리안은 금방 평소의 산뜻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럼 1황녀님의 기사와는 오늘 처음 실력을 겨루게 되겠군요.”
“그래? 소공작도 대회에 참가할 건가 보군.”
“예, 황녀님과 함께 말을 타고 숲길을 거닐던 즐거움이 각별했는데 이번에는 역시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킬리안과 별생각 없이 대화하다가 멈칫했다.
‘얘는 꼭 한 번씩 이렇게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 그냥 말버릇인가? 아니면…….’
이쯤 되자 나도 슬슬 미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그걸 아는 척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킬리안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수고해. 올해 월계관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기대되네.”
“감사합니다. 제가 우승하면 1황녀님께 사냥감을 바치고 싶은데 혹시 원하시는 게 있을지요?”
“글쎄, 금빛 갈라시아 정도일까?”
“기대를 충족시켜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킬리안이 뭇 여인들의 가슴을 떨리게 할 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그런 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의 킬리안과 비슷한 눈을 한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제라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숲에 들어가야겠네. 너도 가서 준비해.”
내가 입을 열자 제라드가 고개를 숙여 나를 응시했다.
머리 위로 높게 자라난 나무가 그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 그림자를 품은 제라드의 얼굴에도 스민 것 같았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황녀님의 기사지요.”
곧 그의 입술이 열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러니 숲에 들어가기 전에 승리를 기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뜸을 들인 것치고 제라드가 요구한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네게 월계관의 영광이 있기를 바랄게. 아쉽게도 기원을 담은 물건은 따로 준비하지 못해서 너한테 줄 만한 게 없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꼭 그 대신이라는 듯이, 제라드가 내게 손을 뻗었다. 약간 서늘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곧 내 앞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위로 나무 그림자와 햇빛이 뒤섞여 흔들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손등을 간질이고, 그 다음으로 이마가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입술이 스쳤다.
제라드가 내 손으로 그 많은 일을 할 동안 어째서인지 나는 굳은 듯이 선 채 그를 떨쳐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원하시는 결과를 안고 돌아오겠습니다.”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던 일련의 행동 뒤에 내 손을 놓은 제라드가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후에도 얼마간 가만히 그곳에 서 있다가, 나를 부르는 사람이 온 후에야 나무 그림자 밑에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