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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101화 (117/203)

101화

나들이용의 산뜻한 원피스를 입고 보닛 모자를 쓴 비비안은 오늘 꽤 귀여운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녀의 푸른 눈에는 오기와 분노로 점철된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잘 보니 비비안의 뒤에 선 시녀들도 유디트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불순한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게 앞을 잘 보고 걷지 그랬어? 갑자기 이상한 마력 각성인지 뭔지를 했어도 마력 감응 능력은 떨어지나 보지?”

더군다나 비비안은 유디트에게 누가 봐도 허울뿐인 사과를 대충 툭 내뱉은 뒤 이런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까지 늘어놓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람의 마력 파장 정도는 눈치채고 알아서 피했어야 할 것 아니야!”

마력 감응 능력과 옆에 있는 사람의 발을 피하지 못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분명 비비안도 지금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품위 없이 찻잔까지 깨트리고, 이게 뭐니? 나한테 파편이라도 튀어서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입에서 어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오려고 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황자, 황녀들 중 가장 얌전한 편이었는데, 애가 한순간에 저렇게 되는구나.

황제 폐하의 명으로 유디트와 좌석이 바뀐 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던 건가?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말석이나 말석 옆자리나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문제인 모양이니, 뭐.

“너희는 왜 가만히 서 있어? 당장 여기 치워. 그리고 너는 가서 새 찻잔 가져와. 아, 그리고 내 구두에도 찻물이 튀었네. 넌 이리 와서 내 구두 닦아.”

심지어 비비안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 앞 좀 잘 보고 다니고. 나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 거야.”

먼저 발을 걸어서 유디트를 넘어질 뻔하게 만든 건 비비안인데, 지금 상황은 꼭 비비안이 선심 써서 유디트를 용서해 주는 듯했다.

비비안의 만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하, 더워. 시원한 음료 좀 마셔야겠어.”

마지막까지 헛소리의 연장선으로 별 시답잖은 경고를 남긴 비비안이 유디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명이 있기 전까지 원래 그녀의 자리이던 말석 옆자리에 앉았다.

비비안의 얼굴을 보니 무심코 저지른 실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얼렁뚱땅 말석을 유디트에게 넘기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유디트의 평소 성격이라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굳이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지 않고 그냥 참으리란 생각에 더 뻔뻔하게 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바로 다가가지 않고 잠깐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동안에는 내 보호가 있었기에 유디트와 다른 황족들 사이에 이런 직접적인 마찰이 일어난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집중된 시선 속에서 유디트가 옷자락을 꽉 쥐는 게 보였다.

그리고 유디트는 비비안의 기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거긴…… 제 자리예요. 비켜 주세요, 5황녀님.”

“뭐라고?”

“거긴 제 자리이니 비켜 달라고 말했어요.”

비비안의 반문에 재차 울린 목소리는 차분하고 조용했으나, 그 파급력은 작지 않았다.

당연히 비비안이 가장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유디트가 이렇게 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요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색이었다.

“야, 너 지금 어디서……!”

비비안의 동복 오빠인 2황자 로이드도 기가 막힌 듯이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곧 흠칫 몸을 떨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꼭 누가 주변에 없는지 먼저 확인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로이드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린 것으로 보아, 평소에 유디트를 비호하던 내가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얼굴을 빨갛게 붉힌 비비안이 유디트에게 따졌다.

“여기가 왜 네 자리야……?! 네 자리는 가장 끝이잖아. 원래 여긴 내가 앉던 자리였어!”

“그건 얼마 전까지의 일이잖아요.”

“너, 너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 지금 그깟 마력 양 좀 늘었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폐하께서 지정해 주신 자리를 5황녀님이 혼동하신 듯해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흥분한 비비안과 달리 유디트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분을 못 이겨 울먹이는 비비안이 더 철없어 보였다.

“웃기지 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잖아……!”

“그런 적 없어요. 좌석 배치가 불만이시면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유디트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유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은근히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하지만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유디트의 손은 긴장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뭐 하는데? 야, 둘 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대충들 앉아.”

그때,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는 라미엘이 손에 느른히 턱을 괸 채 실소했다.

그 역시 나처럼 이 말석 싸움을 웃기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라미엘 오빠 말이 맞아. 그냥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클로에도 옆에서 짜증스러운 어투로 거들었다. 어쩐 일로 유디트의 편을 들어 주는 듯한 말이었다.

결국 눈총을 못 이긴 비비안이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사실은 유디트가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를 들먹였으니, 비비안으로서는 더 버틸 재간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 대신, 비비안은 유디트의 시녀들에게 한결 더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뭐 해? 당장 여기 치우라니까! 그리고 넌 이리 와서 내 구두 닦으라고 했지? 이제 보니까 옷에도 찻물이 묻었잖아! 이건 어떻게 할 거야?”

유디트를 어쩔 수 없으니 유디트의 시녀라도 잡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에서 엿보였다.

“죄송하지만…… 5황녀님이 시키신 일은 제 시녀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이번에도 유디트의 침착한 목소리가 비비안을 가로막았다.

“어지럽혀진 자리를 정리하는 건 이번 사냥제를 위해 발탁된 시종들이 할 일이고, 5황녀님의 구두를 닦는 건 황녀님의 시녀가 해야 할 일이지요. 그래도 저 때문에 구두가 더러워졌다고 하니…….”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유디트가 손을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유디트의 마력이 약동했다.

대기가 부드럽게 춤을 추듯이 움직이며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하늘하늘 흔들리게 만들었다.

잠시 후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유디트는 꼭 물의 정령이 현신한 것처럼 보였다.

이내 동그란 물방울이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비비안에게 날아가 찻물이 묻은 옷과 구두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빛으로 터져 사라졌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어요?”

황족석이 조용해졌다. 유디트가 직접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목격한 황자, 황녀들의 눈빛도 단숨에 변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아까부터 연속된 의외의 광경에 놀란 듯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비비안은 그게 또 창피한지 몸을 파르르 떨었지만, 애초에 소란을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 건 비비안 본인이었다.

“4황녀의 마력 운용 능력이 아주 뛰어나구나.”

황제 폐하께서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앗! 폐하.”

“아바마마!”

꼭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절묘한 개입이었다.

그의 뒤에는 황후 전하와 다른 황비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조금 전의 상황을 전부 목격한 것 같았다.

황녀와 황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황실의 웃어른을 맞았다.

가까이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갓 마력을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으니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직 햇병아리와 마찬가지일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하다니.”

그러나 황제 폐하는 오직 유디트에게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는 방금 본 상황이 아주 기꺼운 듯이, 눈에 이채를 띤 채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게다가 옆에 있는 물을 움직여 이용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더냐? 마법을 정식으로 배운 지 이제 고작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구나. 이 정도면 1황녀만큼이나, 아니, 1황녀보다 마법 실력이 더 뛰어난 듯한데.”

“아바마마! 어떻게 이제 겨우 마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유디트와 벨라 언니를 비교하세요?”

이어진 황제의 말에 클로에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가시 돋친 시선이 유디트에게 꽂혔다.

조금 전에 비비안과의 마찰에서 유디트를 살짝 편들 듯이 말해줬을 때와 달리, 그 눈빛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황제 폐하의 뒤에 서 있던 내 어머니, 황후 전하의 낯빛도 아주 싸늘해졌다.

오늘도 그녀와 동행해 사냥터까지 함께 온 밀리엄도 얼굴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공기도 한결 서늘해진 걸 보니, 내 수행원들도 주인이 다른 황녀와 비교당하는 상황에 기분이 언짢아진 듯했다.

정작 유디트부터도 황제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아르벨라 언니에 비견할 수 있겠어요.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폐하.”

“4황녀가 아주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오직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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