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99화 (115/203)

99화

내가 봤을 때는 우리 게으른 황제 폐하께서 자식들의 서열을 단순히 나이순으로 재정렬한 것뿐인데,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할 건 뭔지.

물론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막내인 3황자 밀리엄이 말석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황후 소생이었기에 예외적으로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비안도 감히 거기에 비벼 볼 생각은 못하는 눈치였으나, 유디트가 말석에서 탈출한 것만큼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황녀님, 완성된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이리 가져와.”

그사이에 내가 맡긴 물건도 제작이 끝났다. 나는 마리나가 들고 온 것을 확인했다.

보관함에 든 건 언뜻 보면 평범한 장신구들 같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여기에 사용된 건 내 마력을 넣어 가공한 보석이었다. 즉, 다른 마법사들이 보조용으로 소지하는 마력석과 같은 용도였다.

이런 용도의 물건은 당연히 지금까지의 나는 쳐다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마력을 보충해야 할 정도로 능력치가 부족한 마법사들을 비웃었으면 또 몰라.

‘이 정도면 그래도 다른 보석에 섞여 티가 나지 않는군.’

“수고했어. 그만 치워도 돼.”

“네, 황녀님.”

하지만 이제는 나한테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혹시 또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마법 발동이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역시 이런 걸 사용하는 티를 내기는 싫어서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한 게 이렇게 다른 용품으로 탈바꿈해 몸에 소지하는 것이었다.

“황후 전하께서 보시면 기뻐하시겠어요. 지금까지는 선물 받으신 보석을 보석함에 넣어 두시기만 했잖아요.”

아니, 그냥 일회용으로 쓰려고 꺼낸 거야…….

이 보석이 일반 보석이 아니라 내 마력을 넣어 가공한 것이란 사실은 마리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내게 심경의 변화가 있어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받은 보석을 꺼낸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나는 보석함을 들고 다시 방을 나서려 하는 마리나를 보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마리나,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해.”

그러자 마리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잠깐 가만히 보다가 평소처럼 빙긋 웃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쉬세요, 황녀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마리나의 모습을 말없이 주시했다.

마리나는 내 앞에서 여느 때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이번에 만든 마력석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위화감 때문이었다.

-힝, 나 배고파.

그때 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내 사색을 방해했다.

-맛있는 거 준다더니 약속도 안 지키고, 얼마 전에도 너만 맛있는 냄새 풍기면서 들어오고, 나빠!

여전히 방 한구석의 결계 안에 갇힌 보라색 괴물이 자리에서 통통 튀면서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학습이라는 걸 하는지, 이제는 언어를 구사하는 게 전보다 자연스러워진 보라색 생물체에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널 굶기는 줄 알겠구나. 뭐든 다 맛있다고 먹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야?”

녀석은 잡식인지, 뭐든 다 잘 먹었다. 심지어 시험 삼아 동물 사료 같은 것을 줘도 좋다고 죄다 먹어치웠다.

그래봤자 어차피 이 괴물 놈이 빨아먹는 것은 생명체의 마력뿐이긴 했다. 그래도 역시 찝찝해서 육류는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관찰했는데, 이놈은 특이하게도 과일이나 식물 같은 것의 마력을 흡수할수록 몸 색깔이 짙어졌다.

‘그러니까 저 보라색의 정도로 알 수 있는 게, 혈중 마력 농도…… 뭐 그런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몸통의 색이 서서히 옅어지는 걸 확인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계 속에 있는 보라색 생물체를 보다가 손으로 잡아 빼냈다.

이제는 내가 제법 익숙해졌는지, 녀석은 내 손에 들려서도 오들오들 떨지 않았다.

“이상하게 너한테서 그들과 살짝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들?

그 솔렘 왕국의 놈들.

하기야, 저들 마음대로 균열을 여는 놈들이니 거기에서 살다 온 괴물과 뭔가의 공통점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내 동정심과 협조를 얻을 생각으로 자기네들과 유디트의 관계에 대해 술술 불 때는 입이 가볍더니만, 그들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지하 감옥에 있는 라칸이란 놈만큼이나 쓸데없이 말을 아꼈다.

나는 꿈틀거리는 괴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에게 그놈들을 한번 직접 보여 줘 볼까?’

솔렘 왕국 놈들을 보고 와서 떠봤을 때, 이 괴물 녀석은 균열을 여는 인간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혹시 직접 보면 뭔가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지.

-에잇!

살살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보던 연보라색 괴물이 탈출을 시도한 건 바로 그때였다.

녀석은 내 손이 느슨해진 틈에 튕기듯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 열린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퍽!

-꾸엥!

그러나 보라둥이 녀석의 반란은 너무도 간단히 끝났다.

마침 창문 밑에 있던 사람이 아래로 뛰어내려 돌진하는 녀석을 한 손으로 덥석 붙들어 저지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 청년이 고개를 들어 창문 앞에 있는 나를 올려다봤다.

“제라드, 그거 이리 던져.”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제라드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방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냥 밑에서 던지라니까.”

“어떻게 황녀님께 그런 무엄한 짓을 하겠습니까.”

평소에 무엄한 짓을 잘만 하던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잠깐 사이에 급격히 쪼그라든 듯한 보라색 덩어리를 제라드에게 받았다.

“감히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앞에서 탈출을 시도하다니 아주 용감해졌구나.”

-꾸헤에엥…….

“차라리 백야의 전당에 보내 줄까? 요즘 연구실의 표본이 부족하다고 하던데. 더군다나 이렇게 살아 있는 표본이라면 대환영할 거야.”

-흐아, 아냐! 나 그런 거 싫어! 난 여기 있는 게 좋아.

녀석이 재빨리 내 손에 몸통을 비비적거렸다.

-동족 중에 네가 제일 좋아! 그러니까 맛있는 거 주면서 날 옆에 둬라.

역시 학습이란 걸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약한 척하면서 매달리면 내가 화를 덜 낸다는 걸 알고 수작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나와 괴물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드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황녀님께서는… 버려진 것을 주워서 키우는 취미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왠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다른 듯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역시 제라드의 눈은 약간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전에 주운 자들도 이대로 살려 두실 겁니까?”

이내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괴물 녀석을 다시 결계 안에 넣었다.

지금 제라드가 말한 건, 그렇지 않아도 내가 방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솔렘 왕국의 마법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납치극 사건이 있었던 날 밤 그들을 따로 만나러 갔을 때, 본의 아니게 제라드와 동행했었다.

당연히 원래는 나 혼자 황궁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와 나는 종속 각인 때문에 연결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그날따라 제라드는 한밤중에도 내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듯, 내가 침실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따라붙어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뒤따르는 게 마음에 안 드시면 롬벨 경이라도 데려가십시오.”

제라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런 자리에 황제의 사람인 롬벨 경을 데려갈 리가 있나?

나는 그날 내 앞에 버티고 선 제라드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결국 그의 동행을 수락했다.

그래서 제라드도 내가 그 납치범들을 황실에 넘기지 않고 따로 감금시켜 둔 걸 알고 있었다.

제라드는 또 그때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그날, 숲의 창고에서 본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나를 보자마자 무섭게 굳어졌던 제라드의 얼굴을 생각하면 썩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었을 것 같다.

‘라칸이었나, 그 미친놈이 있는 힘껏 후려치긴 했지. 마차랑 창고 바닥에서 굴러서 옷차림도 더러웠고.’

그래서인지 제라드는 그 후로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더불어 내가 따로 살려 둔 솔렘 왕국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그럼…… 무엇을 바라시나요?”

“저희를 바로 라칸처럼 황궁에 끌고 가지 않고 남겨 두신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게 뭐죠?”

“한동안은 살려 둘 거야. 써먹을 데가 있거든.”

나는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사과 하나를 들어 결계 안에 집어넣었다.

괴물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그것을 냉큼 받아 마력을 쭉쭉 빨아먹었다.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와는 생각보다 말이 통하겠구나. 그럼 일단은 너희가 만들어 낸 그 균열 말이야…….”

그런 괴물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옆에 서 있는 제라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열자.”

그날, 지금처럼 웃으면서 꺼낸 내 말에 당황하던 솔렘 왕국 사람들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저절로 싸늘하게 비틀렸다.

마침내 내일로 다가온 사냥제가 제법 기대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