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하이어스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이 일과 무관합니다.”
“그건 내가 판단해. 제대로 해명한 적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무죄를 주장하다니, 너무 성의가 없는데.”
그래도 하이어스 백작 가문의 일가가 참형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지, 미레이유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물론 아르벨라는 거기에 눈곱만큼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듯하고. 노먼 하이어스의 전시회에서 본 그림도 유디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그림……이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여자 그림.”
그 순간 미레이유의 눈빛이 변했다. 아르벨라는 지금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아주 어릴 때 본 적이 있는 유디트의 모친이 딱 그렇게 생겼던 것 같네?”
“그런 건 그냥 우연…….”
“아래 서명까지 우연일까? 글록시니아(Gloxinia)라고 떡하니 이름까지 박혀 있던데, 이건 어떻게 변명할래?”
물론 아르벨라도 솔렘 왕국 사람들 사이에 있는 미레이유를 본 후에야 노먼 하이어스의 전시회장에서 본 그림과 유디트의 모친을 겨우 연결시킨 것이긴 했다.
노예 출신인 유디트의 모친에 대한 정보는 황궁 안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르벨라의 성격상 유디트의 모친의 진짜 신분을 몰랐던 예전에는 특히나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 유디트의 모친을 황궁 안에서 한두 번 직접 마주친 적도 있었음에도, 그녀의 얼굴과 언뜻 들었던 이름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노먼, 그 멍청한 놈이…….”
그림의 서명 이야기까지 나오자 미레이유도 더 발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는 울컥한 듯이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보니, 아무래도 전시회에 그런 그림이 올라간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다.
“노먼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그림이 전시회에 올라간 건 정말 우연이에요. 이번 일도 하이어스 가문에서는 저 혼자……!”
“하이어스 영애.”
다급한 목소리로 노먼과 하이어스 가문을 두둔하기 시작한 미레이유를 아르벨라가 가로막았다.
아르벨라의 손톱이 의자의 손잡이를 느릿하게 두어 번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영애는 지금 내가 정말 관심 있는 게 그딴 거라고 생각해?”
“…….”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거면 아주 실망스러워.”
미레이유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향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미레이유처럼 긴장감과 혼란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마른침을 삼키자 뻣뻣하게 굳은 미레이유의 목이 작게 움직였다.
그녀는 눈을 한번 길게 감았다 뜬 뒤, 조금 전보다 한결 침착해진 눈으로 아르벨라를 마주했다.
“……1황녀님이 어떻게 저희의 정체를 단번에 간파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4황녀님의 모친 되시는 글록시니아 님과의 연관성까지 꿰고 계시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쉬울 수도 있겠지요.”
결국 미레이유는 아르벨라에게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솔렘 왕국의 동료 중 일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느껴졌지만 미레이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예상하신 대로 저희는 솔렘 왕국의 후손들로, 예전부터 고귀한 피를 이은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4황녀님을 지켜보고 있던 중, 이번 마력 각성을 통해 그분께서 솔렘 왕족의 유일한 혈통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했고요.”
대략의 이야기는 아르벨라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미레이유는 아르벨라의 생각대로 진짜 하이어스 가문 사람이 아니며, 솔렘 왕국의 마법을 이용해 카뮬리타에 숨어들었다고 했다.
“1황녀님은 4황녀님과 사이가 돈독하시지요.”
아무래도 미레이유는 아르벨라를 회유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호소하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로 아르벨라에게 부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3황자님의 옆에서 지켜봐서 알아요. 그러니 4황녀님을 위하신다면 1황녀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세요.”
“싫은데.”
“예?”
“싫다고.”
그러나 아르벨라는 미레이유의 말을 냉정할 정도로 단칼에 싹둑 잘라냈다.
손에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희가 내 발밑에 납작 엎드려서 간절히 애원하며 빌어도 생각해 볼까 말까 한 문제야.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한 짓은 부탁하는 사람들이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니었잖아?”
“그건 저희의 실수…….”
“심지어 넌 지금 네가 말한 대로 밀리엄의 최측근 시녀로 몇 년이나 황궁에 있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 애를 꾀어내 목적을 이루려고 했지.”
“…….”
“만약 오늘 납치된 게 밀리엄이었다면 지금 황궁 지하 감옥에서 고문받고 있는 그 더러운 놈에게 험한 꼴을 당한 건 그 어린애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미레이유를 포함한 솔렘 왕국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들 중에서 나름대로 높은 지위에 있는 듯했던 라칸이란 이름의 남자가 카뮬리타 황궁 지하 감옥에서 고문받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고, 오늘 그들이 사용한 비윤리적인 방법을 꼬집히자 불편함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기억 조작 마법을 비롯한 수상쩍은 마법들까지 사용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균열을 열어 카뮬리타 제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기까지.”
아르벨라는 의자의 손잡이를 연이어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위험하고 수상한 인간들을 굳이 내 친애하는 여동생에게 붙여 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는데.”
미레이유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가늠하듯이 그런 아르벨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럼…… 무엇을 바라시나요?”
그러다 이내 미레이유가 다시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물어 온 순간, 아르벨라의 손이 멈췄다.
“저희를 바로 라칸처럼 황궁에 끌고 가지 않고 남겨 두신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게 뭐죠?”
“지금 감히 너희가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말이냐?”
서늘한 반문에 미레이유는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도 만만치 않던 1황녀이나, 이렇게 온몸을 구속당한 채 완전히 무력해진 상태로 마주한 그녀는 단지 목소리를 내리까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솜털까지 곤두서게 만들었다.
“아닙니다. 그저…… 1황녀님의 마음을 풀어드릴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노력하겠다는 의미지요.”
다른 솔렘 왕국의 동료들은 미레이유가 이렇게 아르벨라의 앞에서 몸을 낮추는 태도를 취하는 게 굴욕적인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까 라칸 때문에 대노해 폭주하던 아르벨라를 막아내는 건 고사하고, 그녀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렇게 옴짝달싹도 못하게 몸을 묶인 상태에서는 아르벨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미레이유의 얼굴에 꽂힌 아르벨라의 새파란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렸다.
그 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마침내 아르벨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와는 생각보다 말이 통하겠구나.”
그렇게 되어 원래라면 4황녀 유디트의 가신이 되어야 할 솔렘 왕국의 수상한 마법사들은 아르벨라에게 신변을 구속당해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 * *
라칸이란 남자는 의외로 입이 무거웠다.
그는 높은 강도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와 동료들의 존재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들이 찾고 있는 솔렘 왕국의 유일한 왕족인 유디트의 존재와 이번 납치극을 벌인 원인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혹시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유디트에게도 불똥이 튀게 될까 우려한 모양인데, 아주 절절한 충성심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감히 황족을 시해하려 한 데다 건방지게 입까지 굳게 다물고 있는 이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황제 폐하께서는 대노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권한대로 가장 높은 강도의 고문까지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이번에 두 개나 동시에 열린 균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도공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마땅한 원인은 밝혀낼 수 없었다.
이렇게 황궁 안이 뒤숭숭한 와중에도 유디트를 공식적인 자리에 선보일 준비는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 다가오는 중요한 황실 행사들이 몇 개 있었다.
다른 황족들 모두 유디트가 재평가되는 이런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여기에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건 5황녀 비비안이었다.
특히 전과 달리 황제까지 유디트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황족들의 공식적인 좌석 위치가 바뀐 것이 발단이었다.
원래 유디트는 4황녀지만 가장 말석에 앉았었다.
하지만 유디트의 마력 각성 후 황제가 다시 지정한 위치에서 말석은 유디트가 아닌 5황녀 비비안의 차지였다.
비비안은 거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