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르벨라는 그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구경하듯이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맞아, 아주 흉악한 놈이지. 마지막까지 얼마나 끈질기게 저항하던지, 나도 모르게 거친 방법을 사용해 버렸지 뭐야.”
그러다 그녀의 목소리가 꼭 누군가에게 들으란 듯이 묘한 어투로 내리깔렸다.
“그래도 저 꼴을 보니 조금 심했나 싶기도 하고……. 생각보다 흉악한 수법을 쓰기에 놀라서 그랬는데, 그래도 좀 봐줄 걸 그랬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르벨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디트가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혹시라도 사정을 봐주다가 언니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시는 것보다 훨씬 나은걸요. 그리고 저런 나쁜 사람은 걱정해 줄 필요 없어요.”
유디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며 남자에게 냉정한 눈빛을 보냈다.
만약 그가 아르벨라에게 손을 댄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무섭게 분노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은 매몰찬 분위기였다.
그것을 느낀 남자의 눈이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그는 변명하고 싶은 듯이 ‘읍! 읍!’ 소리를 내면서 유디트를 향해 기어가려는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유디트는 흠칫 하며 오히려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고 아르벨라는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아까부터 시끄럽군. 아무래도 빨리 취조실에 가서 입을 열고 싶은 모양인데. 여봐라! 당장 저놈을 끌고 가라!”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는 죄인이 거슬린 듯, 황제가 명령했다.
결국 남자는 유디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알현실에서 끌려 나가야 했다.
쾅!
“벨라 언니……!”
“억!”
바로 그때, 누군가가 조금 전의 유디트와 밀리엄처럼 큰 소리로 아르벨라를 부르며 알현실의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
마침 그 앞에 있다가 문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가 단말마를 내지른 뒤 기절했다.
알현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소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우렁차게 외쳤다.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바깥의 균열도 단번에 해결하고 밀리엄 납치 미수범도 잡아 왔다며?”
마찬가지로 아르벨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2황녀 클로에였다.
세드릭 황제는 정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어수선한 알현실의 분위기에 골치가 아픈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1황녀, 일단 지금은 돌아가서 쉬어라. 곧 다시 부르겠다. 다른 황자, 황녀들도 같이 데리고 나가도록.”
세드릭 황제는 일단 복작거리는 자식들을 한꺼번에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 * *
“1황녀.”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샤렐 황후가 나타났다.
“어마마마!”
밀리엄이 가장 먼저 거기에 반응했다. 유디트가 잠깐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클로에를 데리고 먼저 자리를 비켰다.
클로에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의외로 유디트는 힘이 셌다.
그래서 결국 ‘앗’ 하는 사이에 유디트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샤렐 황후는 여느 때처럼 냉연한 얼굴을 한 채 아르벨라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먼저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히 황족 납치를 사주한 범인을 잡아 왔다니 잘했구나.”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건 밀리엄을 금쪽같이 아끼는 샤렐 황후라면 으레 할 법한 평소 같은 말이었다.
“특히 어린 3황자를 먼저 황궁으로 돌려보낸 것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3황자도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
아르벨라는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어 눈가를 설핏 찌푸렸다.
“그러니 오늘 일은 잘했…….”
그러나 어째서인지 샤렐 황후는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이 이어지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아르벨라와 밀리엄이 동시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르벨라를 기다리며 알현실 문 앞에 서 있던 제라드도 슬쩍 시선을 들어 눈앞에 있는 황족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것을 의식한 듯이 샤렐 황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누이다운 의젓한 행동이었…….”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멈춰졌다.
아르벨라는 시야에 비친 샤렐 황후의 얼굴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지금 그녀는 꼭 화가 난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 막 본인의 입으로 꺼낸 말처럼 아르벨라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혼내고 싶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뭐지? 수행원도 최소한만 데리고 나가서 밀리엄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혼내고 싶은 건가?’
그러나 샤렐 황후는 결국 아르벨라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고, 성난 눈으로 딸을 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홱 돌아섰다.
아르벨라는 황당함과 의혹이 짙게 밴 눈으로 멀어지는 샤렐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나, 어마마마도 누나 걱정 많이 하셨어.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 많이 혼났고…….”
그런 아르벨라에게 밀리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마마마가 네 시녀인 하이어스 영애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어?”
“응? 갑자기 내 시녀는 왜? 별 얘기는 안 하셨는데?”
밀리엄이 아르벨라의 질문에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것을 보고 아르벨라는 다시 한번 확신을 얻었다.
몇 년 전 사냥제 때 샤렐 황후는 갑자기 출몰한 마법 생물에게서 밀리엄을 지켜내지 못한 유모 맥노아 백작 부인을 두 번 다시 궁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다.
한데 밀리엄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하게 만든 미레이유를 그냥 놔두다니.
아르벨라가 알고 있는 샤렐 황후의 성정이라면 당장 미레이유를 찾아내 벌을 내리려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또 아직 어리긴 하나 황궁 법도에 밝은 밀리엄 역시 미레이유에게 이번 일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여 그날 밤.
“본인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미레이유 하이어스 영애.”
아르벨라는 직접 그 당사자를 만나러 갔다.
미레이유와 다른 솔렘 왕국 사람들은 마력 사슬로 포박된 채 바닥에 꿇려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을 앞에 두고 느긋이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아르벨라만이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싸늘한 벽안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치려고 꽤 많이 시도했나 보지? 근성 있네. 물론 칭찬은 아니야.”
내상을 입어 피를 토한 듯이 그들의 옷은 붉게 젖어 있었다.
물론 아까 아르벨라에게 당한 상처로 그들의 행색은 원래부터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얼굴이 허옇게 질려 반쯤 죽어가는 것 같은 몰골이었다.
당연히 그래 봤자 자업자득이었기에,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들은 아르벨라가 라칸 때문에 분노해 무서운 기세로 마법을 난발하기 시작했을 때, 두 번째 균열까지 열어 혼란을 야기한 후 도주를 시도했다.
결국은 그런 보람도 없이 이렇게 아르벨라에게 붙잡히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하는 짓을 보면 가엾게 여길 주제는 되지 못했다.
“내가 그쪽한테 궁금한 게 상당히 많은데. 어때, 하이어스 백작 영애? 이제는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기셨나?”
아르벨라는 미레이유에게 걸었던 금언 마법을 풀어 줬다.
미레이유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뗐다가, 몇 시간 동안 막혀 있던 목에 무리가 갔는지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냈다.
그런 뒤 그녀는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아르벨라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를 더듬더듬 입술 밖으로 흘려보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기억을……. 분명히 그때 마법을 걸었는데!”
“아, 하이어스 영애는 그게 제일 궁금한가 보구나.”
아르벨라에게 직접 마법을 건 당사자라 그런지, 미레이유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황후 전하나 밀리엄과 달리 나한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아서 신기해? 내가 잡아 간 동료에 대해 제일 처음 물을 줄 알았는데 매정하네.”
그 순간 미레이유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마찬가지로 아르벨라의 말에 동요한 듯이, 금언 마법에 걸린 다른 솔렘 왕국 사람들이 몸을 뒤틀며 ‘읍읍’ 소리를 냈다.
“그보다 미레이유 영애 때문에 하이어스 가문이 난처해질지도 모르겠어. 황족 납치 및 시해 사건인 만큼 반역죄를 물어 일가족을 모두 처형시켜도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겠지.”
미레이유의 말처럼 그녀의 마법이 통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르벨라도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아르벨라가 진짜 알고 싶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일단 미레이유 하이어스의 진짜 신분과 이름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사용하는 이상한 정신계 마법에는 흥미가 있었다.
또 오늘 솔렘 왕국 사람들이 두 개나 열어젖힌 균열에 대해서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까 미레이유가 아르벨라에게 마법을 썼을 때, 또 라칸을 비롯한 다른 솔렘 왕국 마법사들을 상대했을 때, 이상하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빨리 완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 만에 병증이 나아지다니,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요행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