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96화 (112/203)

96화

또 다른 균열이 열릴 징조였다.

현재 하늘에는 먼저 열린 균열조차 아직 닫히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균열이 생기다니,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라드가 굳은 듯이 서서 두 눈에 담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얼굴이 왜…….”

“얘 말이야? 방금 못 봤어? 내가 살짝 만져 줬지.”

“아니, 그놈 말고.”

“얘 말고 누구…… 아아.”

제라드의 말에 아르벨라가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이 낮은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남자의 뺨을 후려쳤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뒤늦게 통증이 느껴졌는지, 부은 뺨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아르벨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너 정말 딱 맞춰 왔구나.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면 안 될 꼴을 보일 뻔했네.”

빨갛게 부은 뺨과 찢어져서 피가 맺힌 입술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뿐만 아니라, 바닥이라도 구른 것처럼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져 있던 옷도 처음처럼 말끔하게 변했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력을 움직여, 엉망이던 자신의 몰골을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광경을 눈 한번 깜빡이지도 못한 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아르벨라의 모습이 굉장히…… 괴이하고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결계를 깨고 들어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지금 아르벨라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있는 남자가 설마 그녀를 그런 꼴로 만든 거냐고.

하지만 곧 아르벨라의 자존심 강한 성격을 떠올리고는 목 끝까지 치민 목소리를 겨우 다시 짓눌러 삼켰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아예 모른 척 입을 다물기에는 지금 속에서 들끓는 자신의 감정이나, 지금 시야에 비친 아르벨라의 모습이 너무…….

“얘, 제라드. 나 말이야. 지금 기분이 아주 나쁜데 아주 좋아.”

아르벨라는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한심할 정도로 안일하게 살았었는지 이번 기회에 깨달았거든.”

허공에 떠 있던 영상 마력석이 아르벨라의 손으로 내려앉았다.

아르벨라답지 않은 자학적인 말에 제라드는 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알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마리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반박할 수도 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어울리지도 않게 착하게 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도 어중간해서는…….”

아르벨라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생각하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착할 거면 제대로 착하든가, 아니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제대로 못되게 굴든가, 이도 저도 아니고 짜증 나게.”

그렇게 덧붙이며 아르벨라가 그때까지도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던 남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지금은 속이 개운해. 꼭 찬물 맞고 정신 차린 기분이야.”

감히 아르벨라에게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데 이어 더러운 손을 대기까지 한 남자는 이미 기절해서 움직임이 없었다.

아르벨라로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르벨라는 고개를 들어 붉게 찢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르벨라의 인내심이 끊어져 폭주하는 동안, 솔렘 왕국 사람들이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열어젖힌 두 번째 균열이었다.

“제라드, 너도 따라와. 일단 저것부터 해결하고 가자.”

제라드는 검에 마력을 둘렀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에게는 아르벨라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 * *

“1황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세드릭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온 아르벨라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히 황족을 납치하고 시해하려 한 죄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폐하.”

아르벨라는 태연한 낯으로 황제의 앞에 포박해 온 남자를 던져 놓았다.

죄인은 이미 누군가에게 성의 있게 다져져 곤죽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몰골을 보고, 알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몸을 움찔 떨었다. 아르벨라는 그들을 향해 태연히 덧붙였다.

“마침 죄인을 붙잡으러 간 곳에 균열이 열려 겸사겸사 그것도 처리하고 왔고요.”

그에 대해서는 이미 세드릭 황제도 보고받은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아르벨라를 조용히 훑어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게냐?”

아르벨라는 세드릭 황제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지 쉽게 알아차렸다.

황제와 똑같은 그녀의 연청색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기야 밀리엄에게 들은 말이 있을 테니, 아르벨라의 상태가 정말 멀쩡한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몸의 회복이 빨라서, 황제는 그녀에게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또 왔던 게 맞는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그럼요. 다만 생각보다 죄인의 발이 쥐새끼처럼 빨라서 잡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공교롭게도 균열까지 열린 탓에 아쉽게도 다른 잔당들은 놓쳤지만요.”

아르벨라는 그 납치범들 때문에 균열이 열린 것이란 사실은 지금 굳이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보란 듯이 마력을 이용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깨웠다.

벌레처럼 몸을 작게 꿈틀거리던 남자가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걸 보니,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으, 끄읍!”

하지만 온몸이 마력 사슬로 묶인 데다 금언 마법까지 걸려 있어, 그는 이렇다 할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몸만 버둥거렸다.

“감히 이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런 간 큰 짓을 벌이다니.”

세드릭 황제가 감히 황족을 납치하려 한 죄인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냈다.

“주제도 모르는 벌레 같은 것들. 남은 잔당도 전부 찾아내서 반드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제가 오는 길에 미리 심문해 봤는데 입이 제법 무거운 자더군요. 그래서 아무래도 쉽게 정체를 캐내기 힘들 것 같은데…….”

아르벨라도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서 펄떡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고문실로 보내 최대한 높은 단계의 조치를 취해야 입을 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바마마.”

남자의 벌건 눈이 아르벨라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아르벨라는 남자를 비웃듯이 입술 끝을 들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벨라는 이번 납치 사건의 주모자들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기회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특별히 먼저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한 과정에서 그에게 주어질 정신적, 육체적 고통 또한 아르벨라가 주는 상냥한 선물이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해 남자가 진실을 실토하면 실토하는 대로, 끝까지 침묵하면 침묵하는 대로 아르벨라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동료들과 제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고 갈팡질팡 갈등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여흥이 될 테니.

“벨라 누나!”

“언니!”

그때 알현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밀리엄과 유디트였다. 그들은 아르벨라가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달려온 듯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꽤 예의가 바른 아이들인데, 두 사람은 허락도 없이 알현실에 들이닥친 것으로도 모자라 상석에 앉은 황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본체만체했다.

그들은 곧바로 아르벨라를 향해 들판 위의 양 떼처럼 달려들었다.

“누나아아아아! 으아아아앙……!”

밀리엄이 가장 먼저 울음을 팡 터트리며 아르벨라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언니.”

그다음으로 매달리다시피 아르벨라의 팔을 붙든 유디트 역시 울먹울먹한 얼굴이었다.

“걱정했어요. 제, 제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언니가 휘말리신 것 같아서…….”

아르벨라 혼자 두고 마차 안에서 이동된 밀리엄이나, 밀리엄과의 약속에 아르벨라를 대신 보낸 유디트나, 둘 다 납치범과 함께 사라진 그녀를 많이 걱정했던 듯했다.

“둘 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밀리엄에게 말했듯이 죄인을 잡아 오느라 늦은 것뿐이야.”

“누나는, 으흡, 흑, 바보야……! 그냥 나랑 같이 가자니까! 그, 그렇게 나만 보내면, 내가…… 내가 얼마나…… 으으허어엉!”

마차 안에서의 일을 생각하자 또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밀리엄이 한결 크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아비라도 죽은 줄 알겠구나, 3황자.”

아까부터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던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못마땅한 듯이 읊조렸다.

밀리엄과 유디트는 그런 황제를 또 무시했다.

“저놈은 사형이야, 사형! 감히 나와 누나를 납치하려 하다니, 백번 죽어도 모자라!”

밀리엄이 아르벨라가 잡아 온 남자를 먼저 발견하고 울면서 씩씩거렸다.

유디트도 밀리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곤죽이 된 남자를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사람이에요? 3황자님을 납치하려고 한 게.”

유디트는 이번 사건의 목표물이 밀리엄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아르벨라는 그것을 정정해 주는 대신, 두 사람을 따라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에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솔렘 왕국의 후예를 간절히 찾던 무리 중 한 명인 그는 아까부터 유디트에게 핏발 선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유디트를 보는 눈빛이 참으로 집요하고 절절하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