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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95화 (111/203)

95화

‘뭐야……? 지금 뭘 한 거지?’

미레이유가 마법을 사용한 건 확실한데, 아무 효과가 없어서 영 아리송했다.

‘방금 내 기억을 건드리는 마법을 사용하려 한 거 아닌가?’

물론 눈앞에 마법식이 떠오르는 걸 보고 나도 급히 마력을 움직여 방어하긴 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미레이유의 마력을 담은 마법식이 내 몸으로 흡수된 순간, 열 때문에 멍하던 머리가 살짝 맑아지는 느낌만 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효과가 있는 척하자.’

이유가 뭐든 간에 이들은 나를 황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마법이 통하는 것처럼 보여야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모습을 어느 정도로 흉내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다.

다행히 아직도 몸에서 열이 끓고 있는 상황이라, 미레이유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마법이 제대로 들어먹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내 상태를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바로 부스럭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정말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이 여자, 조금 전에 한 말을 들어 보니 또 아무렇지 않게 황궁에 들어갈 생각인가 본데.

지금도 낯선 정신계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걸 보면, 어쩌면 어머니나 밀리엄에게도 이미 비슷한 짓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쩐지 의심 많고 까탈스러운 우리 황후 전하께서 처음 보는 젊은 영애를 지나치게 신임하며 옆에 둔다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물론 그동안 두 사람에게 마법적 흔적을 느낀 적은 없었으나, 애초에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식조차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설령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리 다 끝났어? 1황녀 일은 처리했고?”

그때 누군가 방으로 들어와서 미레이유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우리 얼굴은 물론이고 여기서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역시 라칸이 너무 섣부르게 움직였어. 왕녀님의 마력 각성 소식을 듣고 조급해져서는 괜히 너만 닦달하고. 어차피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텐데…….”

“됐어, 지금 그런 얘기해서 뭐 해. 그 자식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정리하고 가자.”

속닥거리던 두 사람이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를 결박한 마력 사슬을 그대로 놔둔 걸 보면 완전히 떠난 건 아닌 것 같았고, 잠깐 다른 볼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듯했다.

나는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를 통해 알고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 유디트와 이 솔렘 왕국 사람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건 유디트가 황제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인 외부 활동을 시작한 이후였다.

게다가 유디트와 처음 접촉을 시도한 방식도 온건하고 은밀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하는 짓을 보고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원래도 이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유디트를 손에 넣으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고 나서 지금처럼 기억을 조작해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든가.’

그래도 나를 그냥 순순히 돌려보내겠다니, 솔렘 왕국 사람들의 성향만큼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금방 철회해야 했다.

쾅!

“인질을 여기 숨겨 놨었군.”

미레이유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있던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 때문이었다.

“라, 라칸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카뮬리타의 1황녀는 돌려보내기로 결정…….”

“이 멍청한 자식들이. 기껏 손에 들어온 카뮬리타의 1황녀를 왜 그냥 보내? 그냥 4황녀님을 돌려받기 위한 거래 조건으로 써먹으면 되잖아.”

남자의 거친 음성과 발소리가 내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귀에 함께 들어온 이름이 익숙했다.

납치범들의 입에서 아까부터 한 번씩 오르내리던 이름이니 당연했다.

“뭐야, 그런데 왜 이렇게 비실거려? 뭐 잘못 먹였어?”

“그게…… 처음 봤을 때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어요.”

앞에서 나를 뜯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카뮬리타의 1황녀가 유명하다더니 생각보다 별것 없어 보이는데. 역시 카뮬리타 황실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유명세 아니야?”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목소리였다.

단번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나한테 명백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내 육감이 이 상황의 위험성을 나한테 경고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채 마력을 다시 점검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회복 속도가 현저히 빨랐다.

오히려 방금 미레이유에게 대응해 마법을 사용하기 전보다 운용할 수 있는 마력량이 늘어난 것 같았다.

그때, 억센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상반신이 들어 올려졌다.

“어이, 일어나.”

철썩!

처음에는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뺨에 얼얼한 느낌이 돌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라, 라칸 님!”

“정신이 들었나 보군. 팔자 좋게 늘어져 있고 말이야.”

눈을 뜨자 비열한 인상을 한 갈색 머리 남자가 시야에 비쳤다.

혀끝에 비린 맛이 도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입 안이 찢어진 것 같았다.

단순히 내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악감정을 품고 정말 있는 힘껏 뺨을 내려친 게 분명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오히려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인질이면 인질다운 대우를 해 줘야지. 기껏 써먹을 만한 패가 손에 들어왔는데 미련한 것들이 이걸 그냥 놔주려고 해?”

라칸이라 불린 남자에게 뺨을 한 대 더 맞고 나서야 가뜩이나 뜨겁던 속에서 더욱 홧홧한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웃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야, 너 지금 영상 마력석 가져와.”

“뭐, 뭘 하시려고요?”

“소문은 거품인 듯하지만 어쨌거나 카뮬리타의 1황녀인 건 사실이니, 몇 대 때리는 것 좀 마력석에 담아서 보여 주면 거래할 마음이 생기겠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야, 너희 지금 여기서 뭐…… 이 미친 새끼야! 내가 1황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뒤늦게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내 몸을 결박하고 있던 마력 사슬도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건방지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아무것도 없잖아!”

“어떻게 된 거지? 혹시 그새 장소를 이동했나?”

마침내 결계를 해제했을 때, 제라드와 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무들만 울창하게 자라 있는 빈 공터였다.

그들이 찾고 있던 1황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라드는 아무것도 없는 숲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으나, 제라드는 바로 앞에 있는 아르벨라의 존재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닌 감정으로 가슴이 아주 뜨겁기까지 했다.

이것은 분명 아르벨라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도 제라드의 속마저 전부 불태워 버릴 듯한, 아주 맹렬한 분노였다.

한순간, 제라드의 시야에 비친 허공에 아주 작은 실금 같은 선이 보였다. 그 사이로 익숙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그것을 목격한 은회색 눈에 날카로운 광채가 스쳤다.

“다들 비켜.”

곧 제라드의 손에서 검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는 검에 마력을 입혀, 조금 전 발견한 허공의 극점을 향해 세게 휘둘렀다.

카가강!

공간의 작은 틈새를 날카롭게 벤 순간, 꼭 모서리를 찍힌 거울처럼 눈앞의 풍경이 산산이 쪼개져 흩어졌다.

제라드는 그 벌어진 틈으로 주저 없이 몸을 들였다.

하지만 결계는 제라드를 안으로 들이자마자 금방 다시 복구되어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뒤에서 아우성치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라드는 무시하고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라드의 두 눈에 들어온 장면은…….

“뭐 하니? 웃어.”

폭풍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여기저기가 부서진 창고 건물 같은 곳에서 아르벨라가 어떤 남자의 머리채를 잡은 채 인정사정없이 뺨을 후려치고 있는 광경이었다.

“영상 마력석 찍고 싶다며? 그래서 내가 지금 네 버러지 같은 모습을 마력석에 담아 주고 있잖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르벨라에게 붙잡힌 남자의 몰골은 처참했다.

꼭 이곳에만 거대한 재해가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주변 경관도 전부 엉망이었다.

사방에 가득 흩뿌려져 공기 중에 녹아든 짙은 마력에 살이 다 따끔거렸다.

“아, 왔어?”

아르벨라도 제라드의 기척을 느낀 듯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에 날아든 목소리가 태풍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더없이 나긋하고 여유로웠다.

그 모습만 보면,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게 얼굴이 다 터진 채 축 늘어진 남자가 아니라 인형이나 장식물인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마침 딱 적당한 때 도착했구나.”

아르벨라의 말이 끝난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 붉은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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