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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94화 (110/203)

94화

“이번 납치 사건이요. 혹시 사주한 게 어머니나 외숙부냐고요.”

“조용히 하지 못해? 어디서 큰일 날 소리를 함부로 해!”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서 살짝 열려 있던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혹여나 라미엘의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우려되는 듯했다.

“어머니, 제가 아르벨라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라미엘은 카타리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힐책했다.

“보통 계집애가 아니라, 섣불리 건드리면 괜히 귀찮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을 텐데요. 아르벨라는 제가 기회를 봐서 알아서 하겠다고 했죠?”

라미엘은 오늘 아르벨라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기분이 아주 저조하고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아르벨라의 시녀에게 이상한 짓을 하시고, 지금까지는 제 말대로 가만히 계시다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뭐? 그 시녀의 일을 네가 어떻게…….”

라미엘의 말에 카타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설마 라미엘이 얼마 전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서의 일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듯했다.

카타리나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침착해진 얼굴로 라미엘을 보며 말했다.

“아르벨라를 건드린 건 내가 아니다.”

“진짜예요?”

“그래. 그리고 내가 알기로, 네 외숙부도 아닐 거야.”

물론 뒷말에는 살짝 확신이 덜했지만, 어쨌든 카타리나는 라미엘의 의심을 일축시켰다.

“그 시녀의 일은…… 알고 보니 그 마리나라는 아이, 전에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더구나. 그래서 그저 묶어 둔 암시를 깨 두었을 뿐이야. 조만간 쓸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덧붙여진 카타리나의 설명에 라미엘이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어머니가 그 시녀한테 사용하려고 하시는 방법이 뭔지나 제대로 알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카타리나도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구나. 혹시 덜미를 잡힐까 우려되어서 그러는 것이냐?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그녀는 라미엘을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를 더할수록 라미엘의 얼굴은 형언하기 어려운 빛을 띤 채 일그러졌다.

“라미엘, 네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다. 어차피 다음 황위에 앉게 되는 건 너일 테니, 너무 염려 말고…….”

“어머니는 제가 걱정하는 게 그런 건 줄 아세요? 그까짓 황위 따위, 누가……!”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잉!

바로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올가미가 라미엘의 목을 조였다. 라미엘이 ‘허억!’ 숨을 들이마시며 휘청거렸다.

“라, 라미엘!”

카타리나가 바닥에 몸을 접고 쓰러진 라미엘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다.

라미엘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겠는지, 손으로 목을 긁으면서 헐떡이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그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카타리나는 문득 라미엘이 어릴 때도 종종 이런 식으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어릴 때 병이 또 도진 것이야? 거기 누구 없느냐……!”

다른 사람을 불러오려는 듯,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카타리나의 팔을 라미엘의 손이 붙잡았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네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다행히 그새 발작이 가라앉았는지, 라미엘이 비틀거리면서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식은땀에 젖은 라미엘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아무튼, 어머니……. 외숙부가 공들이는 일이 있는 듯하니, 일단 어머니는 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

“라미엘……!”

카타리나의 부름을 뒤로한 채 라미엘은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 * *

“젠장…….”

1황자궁으로 돌아온 라미엘은 따끔거리는 목을 긁으며 비틀거리다가 방까지 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쓰러졌다.

조금 전 주위를 모두 물렸기에, 그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라미엘의 그림자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온 검은 뱀들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들은 지금도 라미엘의 목을 옭아매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갉아먹듯이 날카로운 독니를 번뜩이며 움직였다.

방금 라미엘이 카타리나의 앞에서 발작하듯이 쓰러진 건, 그녀의 생각대로 어릴 때의 병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라미엘은 병에 걸렸던 적 자체가 없었다.

이것은 아주 어릴 때 외숙부인 그레이엄 후작이 조카인 라미엘과 클로에에게 박아 둔 저주이자 금기된 마법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그들은 말과 행동 모두에 제약이 걸려, 그레이엄 후작에게 불리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 남았어. 진짜 조금.’

어느새 방 밖으로 나온 흰 뱀이 라미엘의 앞으로 기어와 쉭쉭거렸다.

라미엘은 그에게 달라붙는 뱀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또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움직였다.

* * *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기운을 쫓다가 멈춰 섰다. 붉게 찢어진 하늘 밑으로 벽처럼 높이 솟은 검은 나무들이 보였다.

익숙한 기운이 손에 잡힐 때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결계에 가로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여러 겹으로 중첩된 결계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건 제라드가 제대로 맞게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아르벨라는 아직 카뮬리타 제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르벨라가 있는 곳이면 좀 더 시끄러울 줄 알았던 제라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일단 뒤에 있는 롬벨과 다른 황궁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음 같아서야 눈앞의 결계를 바로 돌파하고 싶었지만, ‘아르벨라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중하라’는 롬벨의 말을 떠올리며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눌렀다.

3황자 밀리엄을 보자마자 아르벨라의 자취를 쫓아 바로 황성을 뛰쳐나가려 하던 제라드를 붙잡은 것도 롬벨이었다.

그리고 황제 역시 롬벨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최대한 조용히 아르벨라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1황녀를 찾기 위해 인원을 많이 투입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히 1황녀의 종속 기사가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여라.”

제라드는 탐탁지 않았으나 그래도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다른 황궁 기사들과 함께 아르벨라를 찾는 것이 효율적일 듯해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어째서지…….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황궁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제의 표정 때문일 수도 있었다.

평소에 1황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던 그가, 어째서인지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척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는 3황자 밀리엄에게 사건 당시의 설명을 들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라드는 눈앞에 있는 결계에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저 너머의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저곳에 아르벨라가 있었다.

* * *

방금 익숙한 기운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제라드인가.’

종속 각인 때문에 내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 그가 이렇게 빨리 온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의식을 잃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잠깐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머릿속이 깜깜해지는 걸 반복했다.

그러면서 얼추 상황을 파악한 결과, 나를 납치한 자들은 내 처우를 두고 다투는 중인 듯했다.

그들이 몇 번인가 나를 깨우려고 소란을 피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직도 후끈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마력을 움직여 봤다.

속에 고인 굳은 마력을 아주 살짝만 유동시켰을 뿐인데도, 여전히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한 번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최소한의 출력으로 마력을 움직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나를 결박하고 있는 마력 사슬만 깬다고 바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오히려 가만히 있으니만 못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덜컹, 끼이익…….

그때, 내가 갇힌 곳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군요, 1황녀님.”

안으로 들어온 건 눈에 익은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 밀리엄의 시녀인 미레이유였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지금 너무 태연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네는데, 하이어스 영애.”

이미 그녀가 이 일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버젓이 내 눈앞에 얼굴을 내민 미레이유의 뻔뻔함은 좀 감탄스러웠다.

“아니지. 사실은 하이어스 영애도 아니신가?”

눈앞에 있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미레이유는 나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했다.

“1황녀님이 어떻게 솔렘 왕국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네요.”

그 말처럼, 미레이유는 묘하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몸 위에 덮어줬던 걸레짝 같은 천 조각을 걷어갔다.

“그래도 기뻐하세요. 1황녀님을 황성에 다시 고이 돌려보내드리기로 결정했으니.”

그런 뒤 그녀가 바닥에 누운 나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만 오늘 일은 모두 잊어 주셔야겠어요. 다음에 다시 뵐 때는 황궁이겠군요.”

또 특이한 마법식이 미레이유의 손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나는 의아함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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