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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93화 (109/203)

93화

하지만 유디트는 한때 동경했던 여인의 몰락이 가여웠다. 또, 한때는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던 이복 언니의 죽음이 슬펐다.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유디트만이 아르벨라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찬란한 영광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아르벨라의 초라한 최후에, 오직 유디트만이 눈물을 흘려 주었노라고 했다.

‘그래서, 이걸 지금 또 왜 보여 주는데?’

물론 그냥 느낌 탓일 수도 있지만, 황금색 책이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이 빛을 깜빡거렸다.

아직 뒤에 읽지 않은 페이지들이 남아 있었으나, 황금색 책은 이제 되었다는 듯이 아르벨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그 자리에 빈 새장이 하나 나타났다.

그것은 한눈에 다른 것들과 비교될 정도로 녹슬고 낡은 새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안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아예 텅 빈 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겨우 불티 하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디작고 희미한 빛 하나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아르벨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마…… 이게 내 인생을 담은 새장이라도 된다는 거야?’

속에서 또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꼭 아르벨라에게 어서 문을 열어 보라는 듯이 빛을 깜빡였다.

혹시 이 새장 문을 열면, 그 안에 있는 작은 빛 역시 책이 되어 아르벨라의 눈앞에 펼쳐질지도 몰랐다.

‘싫어. 열어 보기 싫어.’

하지만 아르벨라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맹렬히 거부했다.

저것을 열어 보면, 정말 자신에게 설계된 초라한 인생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 것 같아서.

‘절대 안 볼 거야!’

그리고 거기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이 아르벨라의 의식이 현실로 끌려갔다.

* * *

“뭐야……! 이건 얘기랑 다르잖아……!”

나는 아득한 소음 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머리가 몽롱했다.

“왜 4황녀님이 아니라 1황녀가…….”

사방이 어두워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단지 내가 몸을 포박당한 채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만이 지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상태가 왜 이런…….”

누군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지, 가까이에서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또다시 잘게 쪼개져 뭉개진 채로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서인지, 눕혀져 있는 바닥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색색 내뱉는 숨조차 열기에 먹혀 뜨끈뜨끈했다.

이건 내게 익숙한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꼭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쑤셔 오는 게 영 이상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차가 엄청나게 흔들리면서 몸을 여기저기 부딪쳤었지.’

바로 그 순간, 어지러운 머릿속에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조금이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잠깐의 현실 부정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아니, 씨. 이게 무슨 쪽팔린 상황이야……?’

밀리엄에게 잠깐이면 끝나니까 눈을 감고 있으라는 둥, 온갖 잘난 척은 다 해 놓고 결국 이런 꼴이라니.

‘납치라고? 납치……? 이 내가 납치라고?’

아무래도 상황을 보면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가장 먼저 느낀 게 아니라 불쾌감부터 올라오다니, 역시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는 건 아니었다.

어느덧 주위가 조금 전보다 조용해진 걸 보니, 옆에 있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난 것 같았다.

지금 내 몸을 옥죄고 있는 건 누군가의 마력 사슬이었다.

역시 마차에서 느낀 것처럼,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식은 배합이 낯설었다.

나는 일단 마력을 한번 살살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흡, 숨을 들이켠 채 하던 걸 멈춰야 했다.

다시 심장이 쪼개질 것처럼 극심히 쑤셔 왔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입을 벌리면 그 틈으로 욕이든 신음이든 비명이든 뭐든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마법을 사용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하긴, 병증 때문에 몸에서 이렇게 열이 펄펄 끓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뜨거운 얼굴을 맨바닥에 대고 비비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면 욕부터 제대로 좀 배워 놔야겠구나 싶었다.

나를 이 꼴로 만든 놈들한테든, 아니면 멍청하게 방심한 나한테든 속 시원하게 뭐라고 쏴붙이고 싶은데 아는 욕이 거의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깐 또 의식을 잃었다가, 누군가 나를 세게 흔드는 게 느껴져서 다시 눈을 떴다.

“이봐, 정신 차려. 일단 해열제부터 먹어.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으니까.”

잠시 후, 정말 입에 약과 물이 흘러들어 왔다.

‘별 소용도 없을 짓하네.’

그래도 납치범 주제에 나름대로는 친절을 베푸는 게 의외였다.

그들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어디선가 가져온 듯한 이불 비슷한 천 쪼가리까지 몸에 덮어 줬다.

물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데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황궁 시녀들조차 걸레로도 쓰지 않을 더럽고 낡은 천 쪼가리였지만.

“1황녀는 4황녀님과 가까운 사이야. 지금 죽이면 안 돼.”

“그러게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끌고 와서……. 어쩐지 마차에서부터 이상하다 했어.”

또다시 납치범들이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약을 먹여서 뭘 어쩌려고? 1황녀 소문 몰라? 멀쩡해지면 우리만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아까도 괴물같이 결계 깨고 그 와중에 3황자까지 이동시킨 거 봐. 지금도 카뮬리타 황실에서 우리를 쫓고 있을 수도 있다고.”

“일단 밖에 균열 때문에 난리 나서 그쪽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래도 여차하면…… 그냥 하나 더 열어 버리면 그만이야.”

내가 심한 열 때문에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 고통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에, 나는 의식의 끈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자, 그럼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대신 머리라도 굴려 보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애초에 이자들이 노리던 건 밀리엄이 아니라 유디트였을 것이다.

아까도 왜 4황녀가 아니라 1황녀가 마차에 있었느냐며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밀리엄은 유디트를 밖으로 끌어내는 미끼 같은 거였겠지.

하필 밀리엄을 이용한 건 그 애가 어려서 마법 실력도 떨어지는 데다 가장 구슬리기 쉬워서였을 것이다.

그럼 왜 이들은 유디트를 납치하려고 했을까? 그 애는 지금까지 존재감도 없이 황궁 안에 틀어박혀 살던 천덕꾸러기 황녀일 뿐인데.

그 이유는 괴한들이 다른 황족들에게는 존칭을 붙이지 않으면서 유디트에게만 ‘4황녀님’이라고 높임말을 쓴 것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잘 지키고 있어. 이따 라칸이 돌아와서 쓸데없는 짓하지 못하게.”

마침 오랜만에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내용이 생생히 떠오른 덕분에 내 생각에 설득력이 더해졌다.

“너희…… 솔렘 왕국?”

가쁜 숨소리 사이로 작게 새어 나간 내 목소리를 그들도 들은 것 같았다. 곧 경악 어린 시선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뭐야……! 어떻게 1황녀가 우리 정체를……!”

아, 역시 그렇구나. 지금 나를 납치한 녀석들은 옛 마법 왕국의 재건을 노리는 자들이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유디트의 모계 혈족을 찾아 헤매고 있던 고대 마법 왕국의 후예들.

그리고 후에 유디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그녀의 조력자들.

하지만 이상한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내 귀에 가장 또렷이 박혀 든 건…….

“일단 밖에 균열 때문에 난리 나서 그쪽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래도 여차하면…… 그냥 하나 더 열어 버리면 그만이야.”

분명 저 말의 끝에 어떤 여자가 ‘하나 더 열어 버린다’고 했다.

왠지 맥락상 그건 균열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럼 설마 저들이 마음대로 균열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런 이야기는 꿈속의 책에서도 본 적 없는데…….’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머리를 오래 굴려서 그런지, 열이 더 심하게 치솟기 시작해서 생각을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다.

눈두덩이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지며 머리가 몽롱해졌다.

결국 가열된 숨을 내뱉으며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희미하지만 익숙한 기운이 조금씩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 * *

하늘에 열린 균열에서 보라색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소집되었으나 상황은 금방 타진되지 않았다.

이번 균열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열린 구멍에서 아직도 괴물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황궁 안에서는 다른 문제로도 정신이 없었다.

3황자 밀리엄이 아르벨라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차 탈취범들과 함께 사라졌노라고 횡설수설 고한 말 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 말을 듣고도 아르벨라를 걱정하지 않았다.

밀리엄의 말대로 아르벨라가 그들을 습격한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면, 당연히 그들을 일망타진해 올 생각이기 때문일 터였다.

하여 아르벨라를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빨리 돌아와서 사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이 지금 어디에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냐는 불만 어린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부모는 부모인지, 황제와 황후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 외에는 아르벨라를 좋아하는 유디트와 밀리엄, 그리고 클로에와 라미엘 남매의 표정만 좋지 않았다.

“어머니. 혹시 아르벨라의 일, 어머니나 외숙부가 하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라미엘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한 채로 2황비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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