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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92화 (108/203)

92화

“……!”

막 뚫린 마차의 천장으로 밀리엄을 데리고 빠져나가려던 아르벨라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심장을 으깨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 먹잇감을 옥죄고 있던 마력의 그물이 일시에 흩어지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기만 하던 몸이 중력을 갑절로 받기라도 한 것처럼 무거워졌다.

반대로, 폭풍에 휩쓸린 나무 열매라도 된 양 아르벨라의 마력에 묶여 바깥에 널브러졌던 괴한들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그들은 서둘러 마차에 결계를 겹겹이 둘렀다.

“누나……!”

함께 마차의 시트 위로 떨어진 밀리엄이 놀란 듯이 아르벨라를 불렀다.

아르벨라는 신음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마부석에 앉아 있던 밀리엄의 호위가 정체 모를 마차 탈취범들과 대치 중인 듯 바깥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는 것 같았다.

마차를 둘러싼 괴한들은 네다섯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어딘가 기이했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것 같았다.

아르벨라가 마력의 끈을 놓친 잠깐 사이에 주춤하던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촘촘히 감싸기 시작한 마력의 사슬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공식적인 외출이었고, 또 아르벨라의 목적은 밀리엄과 만나는 게 전부였기에 외부인과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벨라가 데려온 건 시녀 마리나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찻집에 있다는 밀리엄의 시녀, 미레이유를 확인하러 가 있었다.

주변에 불청객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건 혼자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여 마리나를 보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범인을 잡으려 하지 말고, 밀리엄과 함께 몸부터 피했어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제라드든, 롬벨 경이든, 누구든 수행원을 데리고 외출했더라면…….’

그러나 결국은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아르벨라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욕을 씹어 삼켰다. 어떤 변명으로도 할 말이 없었다.

아르벨라는 방심했다. 그리하여 돌아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 괘, 괜찮아?”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밀리엄이 몸을 숙인 아르벨라를 보며 허둥지둥거렸다.

“밀리엄…….”

아르벨라는 입을 열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너 먼저 가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먼저 가라니, 그럼 누나는?! 그냥 같이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밀리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소리 질렀다.

아르벨라를 보는 붉은 눈이 불안감에 젖어 그렁그렁했다.

지금까지 밀리엄이 눈물을 보일 때마다 진심으로 달래 주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가 더 겁먹지 않게 안심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르벨라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를 꾸며내 말했다.

“나는…… 당연히 범인을 잡고 가려는 거지. 아까 말했던 다른 얘기는 나중에 황궁으로 돌아가면 마저 하자.”

“누나……!”

밀리엄의 다급한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아르벨라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온기도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마차의 결계를 깨고 겨우 한 사람을 이동시킬 정도의 마력을 쥐어 짜낸 뒤 아르벨라는 심장을 잡아뜯는 듯한 통증에 좌석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번에는 고통이 너무 커서 차마 작은 숨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상황에서 무리해 마법을 쓴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느낌을 보니 다행히 밀리엄을 황성으로 돌려보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때, 귓가에 꽥꽥거리는 새 소리가 들렸다.

-규,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아르벨라의 앞에 나타난 분홍색 새가 다급히 외쳤다.

-이번에는 제도의 시가지와 상점가가 모여 있는 4지구 위에 바로 균열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역대 균열들의 5배는 되는 엄청난 규모로, 좌표는…….

하지만 시끄럽게 울어대던 새는 아르벨라가 방금 깨 놓은 마차의 결계가 다시 견고해지면서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 정말 붉은빛이 번졌다.

뻥 뚫린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은 아가리를 벌리며 찢어지고 있었다.

아르벨라를 태운 마차가 붉은 하늘 밑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몸이 거칠게 흔들리는 와중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는 게 보였다. 그러다 아르벨라는 이내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 *

그 시각, 제라드는 황궁의 후문으로 향하던 길에 4황녀 유디트와 마주쳤다.

“4황녀님을 뵙습니다.”

“제라드 경, 오늘은 언니와 함께 외출하지 않았네요?”

유디트는 백야의 전당으로 가던 길인 듯했다. 그러다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의외란 듯이 말했다.

제라드는 유디트의 손에 들린 눈에 익은 마법서들을 한번 쳐다본 뒤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1황녀님이 계신 곳으로 가던 길입니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롬벨까지 두고 마리나와 단둘이 외출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물론 각인 마법 때문에 아르벨라가 황궁에 없다는 건 연무장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롬벨 경은 동행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조금 전 연무장에 찾아온 롬벨을 보고 제라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아르벨라를 찾아 가려던 길에 유디트를 만난 것이다.

한데 그녀는 아르벨라의 외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듯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유디트는 제라드에게 조금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제라드는 그녀에게 더 시선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물론 아주 예전에 1황자 라미엘의 습격 사건 때 유디트가 그에게 도움을 주려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는 이미 예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전했다.

또 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오로지 1황녀 아르벨라뿐이었다.

“잠깐만요, 제라드 경!”

그래서 제라드가 유디트와 적당히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이 제라드가 다시 몸을 돌리자, 유디트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검술 대회 경기장에서요. 길 알려 줘서 고마워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건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경기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그날 길을 잃은 듯한 소녀를 발견하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아르벨라가 전부터 유독 옆에 두고 챙기던 4황녀인 걸 알고 제라드가 길을 알려 준 적이 있었다.

“아닙니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음, 아니요.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라드 경 혹시 괜찮으시면…….”

파앗!

제라드와 유디트의 옆쪽에 갑자기 마력의 파장이 느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유디트가 막 말을 이으려던 찰나, 익숙한 황금색 빛 속에서 갑자기 3황자 밀리엄이 나타났다.

“3황자님?”

유디트가 밀리엄을 보고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제라드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린 황자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이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라드가 발을 붙잡힌 건 방금 3황자 밀리엄이 나타날 때 느껴졌던 것이 아르벨라의 마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3황자님?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요.”

유디트가 들고 있던 책들까지 떨어뜨린 채 밀리엄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그런데 왜 같이 있던 수행원들도 없이 이렇게 혼자 돌아오신 거예요? 설마 아르벨라 언니랑 못 만나셨어요?”

그러다 유디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밀리엄이 그녀의 옷을 붙잡고 외쳤다.

“도, 도와줘. 지금 벨라 누나가……!”

우우우웅!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불길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큰 균열이 하늘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보음에 황궁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제라드는 그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당연히 목적지는 아르벨라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 * *

아르벨라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보랏빛 공간.

허공에는 여전히 수많은 새장이 매달려 있고, 아르벨라의 눈앞에는 또 다시 황금색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적힌 글귀가 아르벨라의 머릿속에 억지로 파고들었다.

[유디트는 그녀가 죽인 1황녀 아르벨라의 시신 앞에서 울었다.]

이것은 예전에 세계의 이면에서 아르벨라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때, 미래의 자신이 죽는 장면을 본 아르벨라가 분개해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찢어 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 일로 그녀는 이 신비로운 공간에서 강제로 쫓겨났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 아르벨라는 또 한번 그 장소에 와 있었다.

[모두들 그녀의 죽음을 동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1황녀 아르벨라가 앞장서 카뮬리타를 수호하고 제국민들을 지켰던 것도 옛일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마법사의 열병으로 그 강대하던 힘을 잃은 1황녀를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이후 제국에서 철저히 금기시된 금단술을 사용해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책이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은 미래의 내용을 아르벨라의 머리에 강제로 주입했다.

이렇게 다시 보아도 참으로 역겨운 미래였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도 아르벨라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뿐만 아니라 그 힘으로 거대한 균열을 불러, 유디트가 구했던 세계는 또 한 번 파멸에 이를 뻔했다.

거기에 휩쓸린 2황녀 클로에와 3황자 밀리엄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린 아들을 잃은 샤렐 황후도 결국 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책에는 이제까지 아르벨라가 미처 알지 못했던 미래의 단락이 나와 있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서였다.

비로소 아르벨라는 자신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해 주던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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