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S공금]
그래도 당연히 황궁 법도상 몇 번은 거절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망토를 쓴 시녀는 선뜻 손을 내밀어 밀리엄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갔다.
“감사합니다, 3황자님.”
“어?”
귀를 파고든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밀리엄은 놀랐다.
“뭐, 뭐야! 너 혹시…… 마리나?”
분명 1황녀 아르벨라의 최측근 시녀인 마리나의 목소리였다.
밀리엄은 나이가 어렸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방금 그의 마차에 오른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깨달았다.
“그럼 설마……!”
경악한 밀리엄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음성 역시 귀에 익었다.
“내 시녀에게까지 신경 써 주다니 고맙구나, 밀리엄.”
하얀 손이 망토의 모자를 벗자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이 아니라 반짝이는 짧은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확실히 나들이를 나오기 좋은 날씨야. 그렇지?”
그러고 보니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차에 훌쩍 올라타던 모습이나,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유디트라기엔 심히 대범했다.
“누, 누, 누나! 벨라 누나가 왜 여기 있어?!”
“꼭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네, 서운하게.”
기겁해서 묻는 밀리엄에게 아르벨라는 태연히 반문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건가?”
그러면서 그녀는 마차 밖에 서 있던 마리나에게 손짓했다.
미리 말해 둔 게 있었는지, 마리나는 여전히 망토 모자를 눌러 쓴 채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인 뒤 밀리엄이 준 돈주머니를 들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밀리엄이 말한 찻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아르벨라와 달리 밀리엄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마 유디트한테 듣고 온 거야? 걔가 누나한테 전부 다 말했어?”
밀리엄은 유디트가 약속을 깼다는 생각에 씩씩거렸다.
“유디트, 이 배신자!”
‘이래서 옛 고대 격언에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있는 거였어!’
물론 밀리엄이 유디트를 거둔 적도 없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씨근덕거렸다.
“유디트는 너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런 밀리엄을 보면서 아르벨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서 너한테 묻고 싶은데. 왜 유디트를 이런 곳으로 은밀히 불러냈지?”
밀리엄과 유디트는 아르벨라 몰래 움직인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아르벨라는 요즘 들어 부쩍 가깝게 지내는 밀리엄과 유디트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유디트에게 붙여둔 시녀를 통해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의혹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일단 유디트 쪽부터 떠보았으나, 의외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르벨라에게도 밀리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르벨라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유디트가 자신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그런 아르벨라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유디트는 덧붙였다.
“사실은 제가 내일 3황자님과 약속이 있는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언니가 대신 나가주시지 않을래요? 저는 내일 가벼운 감기에 걸릴 예정이라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곱게 웃는 얼굴이 실로 수상쩍었다.
아직 걸리지도 않은 감기를 핑계 삼아, 아예 아르벨라의 등을 떠밀어주는 모양새가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은가.
아르벨라는 단번에 유디트의 속내를 간파했다.
보아하니,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밀리엄과 함께 오누이 간의 허심탄회한 대화라도 나누며 우애를 돈독히 다지기를 바란 것 같았다.
반면 아르벨라가 그런 유디트의 속내를 눈치채고서도 이곳에 나온 건, 그녀의 말대로 오누이끼리의 친목 도모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밀리엄에게 의문을 느껴서였다.
이렇듯 그가 갑자기 유디트에게 접근하고, 또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뒤에서 은밀히 불러내기까지 한 목적이 뭔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은 밀리엄과 유디트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주변을 훑어본 뒤 더욱 강해졌다.
“내가 알기로는 밀리엄 네가 유디트랑 이렇게 둘이 외출할 만한 일이 없는데 말이야.”
“외, 외출 정도야 그냥 할 수도 있지!”
“그래? 그럼 어디를 가려고 했는데?”
“그건, 그건……!”
밀리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르벨라는 그런 밀리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게 그저 가만히 밀리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녀는 밀리엄을 다그치거나 질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밀리엄은 아르벨라에게 추궁받고 있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억울해졌다.
“누나는……. 지금 또 유디트 때문에 이러는 거지? 왜, 내가 걔한테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
밀리엄에게서 조금 전보다 더 거친 숨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어머니 궁에서도 그렇고, 누나는 유디트와 관련된 일에는 이렇게 바로 달려오더라.”
밀리엄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는 아르벨라의 손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씨근덕거리던 밀리엄의 숨소리가 얼마 동안 이어지다가 이내 서서히 잦아들었다.
밀리엄은 잠깐 입을 꾹 다문 채 호흡을 골랐다.
그러다 이내 오늘 유디트와 만나기로 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아르벨라에게 솔직히 말했다.
“오늘 유디트한테 밖에서 보자고 한 건, 그냥 사냥제 때 누나한테 줄 선물을 같이 고르려고 그런 거야. 누나 몰래 준비해서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밀리엄의 눈이 울적하게 내리깔렸다.
그는 누구나 안쓰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법한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웅얼거렸다.
“누나가 유디트를 좋아하니까, 나도 좀 친해져 보려고 그런 거라고.”
밀리엄은 어릴 때의 아르벨라 못지않게 영악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필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라도 더 끌어 모르고, 또 자신에게 잘해 줄 마음을 들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누나가 나한테도 잘했다고, 착하다고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아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러니 제아무리 냉정한 아르벨라라도 지금만큼은 자신을 가엾게 여겨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유디트의 일로 오해를 했으니 더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르벨라는 밀리엄의 말을 듣고 바로 사과하며 그를 안아 주는 게 아니라,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단지 그에게 사실을 확인하듯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유디트랑 둘이 나한테 줄 선물을 고르러 갈 생각이었다고? 아까 네 말대로 시녀도 떼어놓고 지금 마부석에 올라 있는 최소한의 호위만 데리고, 몰래?”
“그으래……! 그런데 누, 누나. 지금 내가 뒤에 한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거 아니야? 그거 되게 중요한 말이었거든? 앞에 한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말이었거든?”
“그래,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럼 지금 주변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라는 말이구나.”
“뭐?”
일부러 아르벨라에게 보란 듯이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밀리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덜컹! 콰앙!
마차가 크게 흔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으악!”
밀리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차에 가해진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다 들썩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밀리엄은 어느새 아르벨라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 어?”
그의 붉은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혹시 마차가 흔들릴 때 자신의 몸이 날아가서 아르벨라의 위로 떨어진 것뿐인 게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팔은 확실하게 밀리엄의 몸을 감싸듯이 둘러져 있었다.
게다가 아르벨라의 보호 마법 역시 밀리엄을 보호하고 있었다.
밀리엄의 입에서 딸꾹,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아르벨라가 밀리엄을 안아 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는 그가 떼를 써서 아르벨라에게 안긴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나이를 먹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밀리엄은 당황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런 밀리엄의 반응을 갑작스럽게 마차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르벨라가 작게 혀를 차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동생아, 다른 얘기는 황궁으로 돌아가면 마저 하자. 아무래도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때는 아닌 듯하구나.”
딱히 성의 있는 위로는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밀리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르벨라의 마력이 황금색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곳곳에서 비명과 고함이 들렸다.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밀리엄의 눈앞이 번쩍였다.
“헉! 누, 누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멈춰 있던 마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앙!
아르벨라는 곧바로 마차의 천장을 날려 버렸다. 뚫린 천장으로 거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밀리엄, 눈 감고 있어. 잠깐이면 끝나니까.”
밀리엄은 아르벨라의 말대로 눈을 꼭 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신이 다 없었지만, 그의 옆에 있는 게 아르벨라라 두려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르벨라의 마법은 불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