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22. 납치
밀리엄은 4황자궁 화원에 있는 티 테이블 앞에 앉아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찌푸린 붉은 눈이나, 의자가 높아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앞뒤로 까딱이는 움직임에서도 깊은 불만이 느껴졌다.
“황자님, 왜 화가 나셨어요?”
꼭 누구든 봐달라는 듯이 일부러 밖에 나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밀리엄에게 시녀 미레이유가 말을 걸었다.
“흥, 몰라.”
“황자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까요?”
“원래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자기도 모를 때가 있는 거야.”
밀리엄은 아직 8살밖에 안 됐으면서 제법 철학적인 소리를 했다.
미레이유가 그런 밀리엄을 보면서 귀엽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지요. 역시 우리 황자님은 정말 영특하시네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난 카뮬리타에서 제일 뛰어난 마법사인 벨라 누나의 동생인걸.”
밀리엄이 턱을 살짝 들고 우쭐거렸다.
그 모습이 어릴 때의 아르벨라와도 닮아 있어서, 누가 보면 정말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라고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뿐, 밀리엄은 금방 다시 시무룩해졌다.
지금 자신의 입으로 꺼낸 이름에 또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밀리엄이 조금 전 심통이 났던 건 그의 하나뿐인 동복 누이인 아르벨라 때문이었다.
“벨라 누나가 또 나한테 화를 냈어.”
그는 얼마 전 샤렐 황후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아르벨라는 밀리엄에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싸늘한 눈빛은 분명 그를 강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벨라 누나가 많이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밀리엄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떼를 쓰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라고 자자하게 떠드는 1황녀 아르벨라가 바로 그의 누이인데, 그녀에게 마법을 사사 받는 행운을 자신이 누리지 않으면 누가 또 누릴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 눈이 멀었다.
아르벨라가 이미 거절했는데도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인 샤렐 황후에게 가서 어리광을 피우며 손을 벌렸다.
그 일로 아르벨라는 밀리엄에게 실망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요즘 낮이고 밤이고, 한숨을 달고 있지 않을 때가 없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밀리엄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데 있잖아. 벨라 누나가 어제 또 유디트하고 만났대.”
밀리엄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서운함이 묻어 나왔다.
“이해가 안 돼. 클로에 누나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 여자애는 왜 예전부터 자꾸 옆에 두는 거지?”
어린 밀리엄에게 있어 유디트의 존재는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 미궁과도 같았다.
아르벨라의 성격은 평소에 누구에게나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클로에는 어릴 때부터 하도 아르벨라를 좋아해 그녀의 뒤를 지겹도록 쫓아다닌 탓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지만, 유디트에게만큼은 아르벨라가 먼저 다가갔다고 했다.
밀리엄에게 그 이야기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아르벨라의 하나뿐인 동복 동생이었으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녀에게서 먼저 다정한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1황녀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 4황녀님과 가까이 지내지 마시라고요.”
“그건…… 그랬다가 누나가 화 내면 어떡해.”
미레이유의 말에 밀리엄은 우물쭈물거렸다.
오만한 어린 황자님인 밀리엄이 이렇게 소심해지는 건 그의 누이인 아르벨라와 연관되었을 때가 유일했다.
“그럼 차라리 4황녀님과 친해지시는 건 어떠세요?”
“내가 왜? 그런 근본도 없는 애하고.”
밀리엄의 눈이 찌푸려졌다.
혹시나 아르벨라의 화를 살까 싶어 유디트에게 직접 나쁘게 군 적은 없었지만, 사실 밀리엄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천한 피를 가진 유디트를 누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밀리엄은 유디트에게 질투가 났다.
“4황녀님과 친분을 다지시면 1황녀님의 얼굴을 뵙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거예요.”
하지만 미래이유가 이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는 밀리엄도 흔들리는 얼굴을 했다.
사실 미레이유는 최근에도 밀리엄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몇 번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밀리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조금 혹한 눈치였다.
얼마 전에 황후궁에서 샤렐 황후가 유디트를 궁에 불렀을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바쁘다는 말로 샤렐 황후와 밀리엄의 만남 요청을 거절하던 아르벨라가 그날은 한달음에 나타나 유디트를 데려갔었다.
밀리엄이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미레이유에게 살짝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의견을 물었다.
“나도 그 애랑 친해지면 누나가 나랑도 같이 놀아줄까?”
“그러실 거예요.”
미레이유는 다정한 목소리로 밀리엄에게 확언해 주었다.
“마침 곧 사냥제가 열리지요. 1황녀님을 위한 선물을 함께 고르러 가자고 4황녀님께 권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원래도 사냥제 때마다 밀리엄은 아르벨라에게 장식품을 선물하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유모에게 맡기다가, 그를 돌보는 사람이 미레이유가 되면서부터는 샤렐 황후의 허락을 받아 수행원들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외출하기도 했다.
“4황녀님이라면 흔쾌히 수락하실 테고, 1황녀님도 가장 아끼는 동생들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중에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어린 밀리엄의 귀에도 미레이유의 말은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밀리엄은 부루퉁하던 얼굴을 마침내 밝게 편 채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를 따라 미레이유도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화원을 둘러싼 나무들처럼 새뜻한 연초록빛 머리카락이 그림자를 품은 채 하늘하늘 흔들렸다.
* * *
이후로 밀리엄은 유디트에게 큰마음 먹고 먼저 연락을 취했다.
대뜸 같이 외출을 권하면 많이 놀라고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는 단계적인 과정을 밟았다.
물론 유디트로서는 밀리엄이 이렇게 먼저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친 영광에 너무 놀라서 감히 황자님과 동행할 용기가 없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밀리엄은 이렇듯 남들보다 우월한 인간으로서 남의 사정을 살펴줄 정도의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밀리엄이 샤렐 황후의 아들이고, 아르벨라의 남동생인 이상 그가 명령을 내리면 당연히 유디트도 거기에 따라야 할 터였다.
하지만 미레이유의 말처럼 밀리엄의 목적은 유디트와 친해져 아르벨라와도 가까워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강압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안부 편지를 유디트에게 보내 적당히 말을 튼 다음, 한두 번 정도는 우연을 빙자해 길에서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또 이후에 두세 번 정도는 따로 시간을 내서 같이 정원을 산책하거나 차를 마시자고 권유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은 상당히 번거로워, 밀리엄의 짧은 인내심을 많이 소모하게 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 결실이 맺혀, 드디어 오늘 밀리엄과 유디트는 아르벨라를 위한 사냥제의 선물을 고르러 함께 외출하기로 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밀리엄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마차를 세워두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르벨라에게는 비밀로 하고 몰래 외출하는 것인 만큼, 황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디트와는 상점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따로 만나기로 이야기했다.
유디트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몰래 외출하는 게 처음이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그녀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2분이나 늦다니……. 이래서 근본 없는 애들은 안 된다니까.”
엉덩이에 뿔이 난 고양이처럼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앉은 밀리엄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컥!
바로 그때,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왜 이제 와!”
밀리엄이 마차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도 황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혼자 조심해서 오라는 말은 잘 알아들었는지, 마차에 올라탄 유디트는 망토의 모자까지 뒤집어써 얼굴을 잘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건 그것뿐이었다.
“넌 내 천금 같은 시간을 3분이나 낭비하게 했어! 하지만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왜 늦었는지는 가면서 말해!”
밀리엄이 서둘러 마차의 벽을 탁탁 두드렸다.
“출발해!”
하지만 그의 명령에도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응? 출발하라니까 뭐 해?”
짜증스럽게 창문을 내다 본 밀리엄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망토를 쓴 사람을 발견했다.
“어? 뭐야, 이거 네 시녀야? 오늘 일을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을수록 좋으니까 시녀랑 다른 수행원은 저 앞에 있는 가게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했잖아? 호위는 내가 데리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러다 밀리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휴, 설마 너 시녀한테 시간 때울 돈 안 줬어? 너도 참 답답하다. 자, 이거 줄 테니까 저쪽 찻집에 있는 내 시녀하고 같이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려.”
밀리엄은 마차 밖의 시녀에게 작은 돈 주머니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