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89화 (105/203)

89화

* * *

“황녀님, 4황녀님의 시녀가 또 한 번 찾아왔어요.”

“그래?”

“그리고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나를 찾아와 건넨 마리나의 말에 서류에 사인하던 손이 멈췄다.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정말 마리나의 말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녀가 어련히 우산을 가져다 주겠지. 그보다 마리나, 이제 몸은 괜찮아?”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그럼 그만 나가 봐.”

나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마리나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사실 오늘은 유디트와 야외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요즘 그녀는 갑자기 황제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며 바빠졌다.

내가 알아서 신경을 쓴다고 했는데도, 황제는 유디트의 생활을 직접 신경 쓰기 시작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가 백야의 전당에 직접 연락을 넣어, 레반테온이 유디트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지금까지 유디트를 방치한 것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아니면 지난 오찬 시간 때 체면을 구겨 자존심이 상한 것을 회복하고 싶은 건지.

‘내가 아는 아버지의 성격상, 분명 후자겠지.’

그래도 유디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기쁘고 설레기보다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유디트는 내 말을 순진하게 믿고 시간이 자꾸 엇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시간을 내서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자 유디트는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오후 4시.

약속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 있었다.

쏴아아……!

잠시 후 빗줄기가 굵어져 거의 폭우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 마리나에게 말한 대로 시녀가 우산을 가져다줄 테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아까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서류가 잘 읽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슬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참이기도 해서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언니!”

나를 보자마자 나무 밑에 서 있던 유디트가 달려왔다. 승마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뜀박질의 속도가 빨랐다.

나는 약속 시간에 두 시간 가까이 늦어 놓고도 태연한 얼굴로 유디트에게 말했다.

“유디트, 아직도 여기 있었네. 비도 내리는데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러다 언니랑 엇갈릴까 봐요.”

오늘 유디트를 밖에서 만나자고 한 건 승마를 봐준다는 명목에서였다.

사실 예전에 리리아나의 매 맞는 시동 사건이 있었던 직후에, 어쩌다 보니 유디트가 원하는 수업들을 대부분 다 듣게 해줬었다.

유디트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나도 ‘내가 얘한테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나’ 싶었지만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이런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유디트의 얼굴은 내 안의 저열한 우월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내게는 별 것 아닌 호의에도 늘 맑은 웃음을 보이는 모습도 내게 만족감을 주었고 말이다. 꼭 내 손으로만 모이를 받아먹도록 길들여진 온실 속의 카나리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과목을 재미있어하던 유디트가 단 하나 기초조차 떼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승마였다.

유디트는 말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결국 더 이상 시도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황제가 그런 유디트의 사정을 알고, 승마는 기본 교양이니 꼭 배워야 한다고 말했단다.

그래서 유디트의 부탁으로 오늘 내가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었다.

“혹시 못 오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들었어요.”

유디트는 내가 그녀를 2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는데도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유디트가 시녀를 보내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도 않아, 마냥 기다리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일은 잘 처리하고 오신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나를 걱정했다.

나는 살짝 젖어 있는 유디트의 머리칼과 옷을 천천히 훑어 봤다.

시녀가 우산을 씌워주고 있긴 했지만, 갑자기 쏟아진 비라 처음에는 대처하지 못했던 듯했다.

유디트는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참이라, 아직 비를 막거나 젖은 몸을 말릴 재주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시녀들에게 서늘한 시선을 옮겼다.

“시녀들 중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없나? 왜 유디트를 이대로 놔뒀지?”

“죄송합니다, 1황녀님. 방수나 건조 마법에는 조예가 없어서…….”

황제가 새로 뽑아준 시녀들은 전부 무지렁이 쭉정이들이었군.

그들을 깔보는 시선으로 훑은 뒤 유디트의 젖은 몸을 마법으로 말려줬다.

“할 일도 많은 애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어?”

물론 그녀를 비 속에 두 시간이나 세워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다시 보송한 모습으로 돌아온 유디트를 보자 그제야 좀 속이 편해졌다.

그때,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던 유디트가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언니. 살짝 추웠지만 이 정도는 감기가 들 정도도 아닌 걸요.”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지금 한순간 유디트의 얼굴이 토끼가 아니라 여우처럼 보였는데…….’

착각이겠지.

“그보다 바쁘신데 이렇게 일부러 만나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또 맹탕 같이 자기를 바람맞힌 나한테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나 하는 걸 보면, 잘못 본 게 맞을 거다.

“요즘은 언니를 예전처럼 자주 못 만나서 너무 아쉽고 슬펐거든요.”

유디트는 여전히 맹목적인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이렇듯 변함없어 보이는 유디트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말했다.

“그러니? 난 이제 너한테 내가 필요 없는 줄 알았는데.”

“네?”

지나가듯이 흘린 말에 유디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이 한 박자 늦게 인식되었는지, 다음 순간 그녀가 퍼뜩 놀라며 외쳤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유디트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망연함까지 느껴지는 얼굴을 한 채 두 눈을 흔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셨어요? 누가 언니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요?”

“이제는 내가 아니어도 널 돌봐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잖아.”

“어떻게 그 사람들하고 언니를 비교해요?”

유디트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언니 말처럼 갑자기 저한테 관심을 보이고 신경 써 주는 사람들이 생긴 건 맞죠. 하지만 언니는…….”

나를 바라보는 눈이 이제 갓 나뭇가지에서 돋아나 처음으로 빗물을 맞은 노란 잎사귀 같았다.

“저한테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고 옆에 있어 준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유디트의 모습이 참 처량해 보였다.

“그래서 요즘도 매일, 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나는 유디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뾰족하게 돋아났던 추한 마음이 빗물에 맞은 것처럼 서서히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유디트는 아직도 가끔 내 앞에서 어린아이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어스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다행이네. 내가 그렇게 네게 의미 있는 존재라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액면 그대로의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는 걸 유디트는 모를 것이다.

그녀를 향해 이어서 속삭였다.

“사실은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내 말은 유디트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진심을 담은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녀에게 거짓말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왠지 내 귀에도 이 말이 조금 진실인 것처럼 들렸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오늘은 늦게 와서 미안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혹시 나 때문에 다음 일정이 밀리지 않았니?”

“오늘은 다른 계획 없어요.”

“그래? 비가 와서 어차피 승마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날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유디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유디트의 방에서 그녀가 직접 내준 차를 마셨다.

그런데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아늑한 방에 있는 동안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언니,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요.”

내 얼굴을 보던 유디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잠깐 눈을 붙이셔도 돼요. 제가 이따가 깨워드릴게요.”

내 옆에 앉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미 지금까지도 몇 번이가 이런 일이 있었기에 피로에 젖은 몸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스한 온기를 찾아들었다.

멀쩡한 정신이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일인데, 이상하게 유디트의 궁에 올 때면 지금처럼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유디트의 어깨에 머리를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지독한 수면이 밀려들었다. 눈앞이 금방 흐려졌다.

“전 언니가 이렇게 제 앞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일 때가 제일 좋아요.”

비눗방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귀에 맺혔다.

“잠깐이라도 푹 쉬세요, 언니.”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의식이 멀어졌다.

오랜 불면증 끝에 찾아온 달콤한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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