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88화 (104/203)

88화

* * *

살롱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클로에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어느새 찻잔을 떨어뜨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상자 속의 인형을 보는 얼굴이 새하얬다.

“사, 사브리…….”

“클로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을 더듬던 클로에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클로에는 자신을 부르는 아르벨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푸른 눈이 보였다.

클로에는 침착함을 살짝 되찾았다.

“…….”

곧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의 눈에 어려 있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놀란 게 인형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잠깐만 실례할게.”

풍성한 치맛자락이 인형을 넣은 상자를 스쳐 지나갔다.

클로에가 급히 자리를 뜨자, 그녀의 최측근 시녀 도레아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다른 때 같으면 적절한 이유를 대고 자리를 비켰겠지만, 지금 클로에는 그럴 만한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

“…….”

클로에가 떠난 뒤, 살롱의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달그락.

아르벨라가 들고 있던 찻잔을 일부러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느긋하게 움직인 그녀의 손이 상자 속에 든 인형에 닿았다.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진짜처럼 생긴 인형이네. 그렇지?”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르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마, 맞아요. 정말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생긴 인형이 있다니 놀랍네요.”

“밤에 보면 좀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요. 진짜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라.”

“그래도 정말 예뻐요, 캐논 영애.”

한 마디씩 꺼내는 동안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서서히 풀렸다.

“…….”

“…….”

하지만 캐논 백작 부인과 영애의 얼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은 특히 2황비 카타리나와 클로에하고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최한 살롱에서 클로에가 이렇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며 뛰쳐나갔으니 당황스럽고 걱정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까탈스러운 클로에의 심기를 괜히 더 상하게 만들까 봐 그녀에게 가보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문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다음달에 출시할 거라고 했지? 나도 하나 갖고 싶네. 단지 인형 머리는 갈색이 아니라 금발이면 좋겠어.”

“예, 그, 그럼요! 1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맞춤으로 가능합니다!”

아르벨라가 태연히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얼굴도 조금 밝아졌다.

그런 뒤 아르벨라의 시선이 상자 속의 인형에게 서늘히 닿았다.

“…….”

그것은 진짜 사람을 축소해놓은 것처럼 섬세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방금 클로에가 이 인형을 본 뒤 사색이 되어 경황 없이 중얼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맺혀 있었다.

‘혹시 사브리엘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걸까?’

아르벨라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갈색 머리 인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생각 외로 평범한 인형인데. 2황비 카타리나가 캐논 백작 부인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들어서 오늘 뭔가를 꾸미는 줄 알았더니.’

푸른 눈에 한순간 희미한 광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다 아르벨라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나에게 클로에의 상태를 보고 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마리나, 지금 클로에한테 가서…… 음? 얼굴이 왜 그래?”

그런데 이제 보니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마리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황녀님, 저…….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무슨 일인데?”

“속이, 갑자기 좋지 않아서요.”

“그래? 어서 가 봐.”

갑자기 체기라도 있는 건지, 마리나의 상태는 정말 나빠 보였다.

아르벨라가 허락하자, 마리나가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아르벨라는 다시 인형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클로에가 소리를 지를 때 거기에 묻힌 또 다른 작은 비명 소리가 있지 않았던가?

* * *

“뭐야, 클로에 쟤가 왜 여기 있어?”

라미엘은 캐논 백작가에 몰래 들어 와 정원의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상을 썼다.

그는 방금 살롱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림자를 통해 보았다.

캐논 백작 부인과 영애가 상자 속의 인형을 공개한 직후, 클로에가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급기야 살롱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 라미엘은 2황비 카타리나가 이 살롱에서 무슨 일을 꾸밀 걸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클로에가 올 줄 알았으면 말렸을 텐데, 설마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촐싹거리면서 아르벨라와 동행했을 줄이야.’

2황비 카타리나가 캐논 백작 부인에게 서신을 보내 명령한 건 오늘 살롱에서 공개할 인형 중 하나를 그녀가 말한 생김새로 만들어 끼워 넣으라는 것이었다.

곱슬거리는 긴 갈색 머리카락에 짙푸른 남색 눈을 가지고, 거기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인형.

라미엘은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클로에와 함께 그레이엄 후작가에 갔을 때 본, 저택의 깊고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 역겨운…….

‘그런데 아르벨라의 시녀가 왜 저 인형을 보고 클로에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거지?’

라미엘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분명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마리나라는 시녀 또한 상자 속의 인형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더 가까이에서 인형을 본 클로에의 반응이 워낙 컸던 탓에 묻혔지만, 이후에 마리나도 사색이 된 채 살롱을 빠져나갔다.

라미엘은 카타리나가 유디트 대신 이번 타킷을 마리나로 바꾼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방법이 왜 저 인형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저 시녀도 그레이엄 후작가와 관련이 있는 건가?’

라미엘의 손이 괜히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혹시 어머니의 명으로 또 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르벨라가 캐논 백작가를 떠나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캐논 백작가를 떠났다.

아르벨라가 마차에 오르기 전, 언뜻 그녀의 시선이 나무 위에 숨은 라미엘에게 향한 것 같았지만, 그는 곧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뭐? 클로에가 오늘 캐논 백작가의 살롱에 갔다고?”

2황비 카타리나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막 잎사귀를 정리하던 꽃의 머리를 가위로 댕강 잘랐다.

“이 미련한 것이! 내가 그렇게 궁 안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 딸에게 답답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다른 건 계획대로 되었더냐?”

“그것이……. 1황녀님의 시녀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2황녀님이 인형을 보고 비명을 지르셔서…….”

클로에가 불러들인 소란이 너무 커서 1황녀의 시녀가 보인 반응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탁. 카타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의 줄기와 가위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인형을 확실히 보긴 한 거겠지?”

“예,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니 꼭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롱을 빠져나갔다고 했으니까…….”

“흐음…….”

시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카타리나는 그 정도면 되었다는 듯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오늘 1황녀의 시녀가 그 인형을 보고 주인의 체면이 상할 정도의 추태라도 떨었다면 좋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 일단은 괜찮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카타리나가 시녀를 돌아보던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머리가 잘린 꽃송이에 닿았다. 이윽고 붉은 입술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클로에, 그 아이는 왜 오늘따라 하필 그 살롱에 가서 그런 일을 당한단 말이냐.”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짙은 염려였다.

“클로에는 지금 궁으로 돌아왔나?”

“예,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일찍 귀궁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그 아이에게 가 봐야겠다. 너는 먼저 가서 심신 안정에 좋은 펜닐 차를 클로에에게 올리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카타리나는 꽃들이 쌓인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딸을 염려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밖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어쨌거나 라미엘과 클로에에게 그녀는 좋은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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