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87화 (103/203)

87화

* * *

제라드는 아까부터 아르벨라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아르벨라가 처음 살롱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힐끔거리던 영식 한 명이 이내 용기를 낸 듯이 영애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뒤쪽에 가만히 서서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따라붙은 눈길을 느낀 영식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제라드를 발견했다.

그는 아르벨라와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다가오는 영식에게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제라드가 한 일은 단지 그것뿐이었으나, 그의 시선을 받은 영식은 선득함을 느끼며 흠칫했다.

결국 아르벨라에게 다가가려 시도하던 여섯 번째 영식도 자신을 향한 차가운 시선에 밀려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 후 제라드는 다시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녀의 뒷모습으로 눈길을 돌렸다.

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뒷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머나, 베른하르트 소공작님이 오셨어요!”

그때, 영애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막 살롱 안에 들어선 수려한 청년 때문이었다.

살롱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그의 투명한 은빛 머리카락이 더욱 찬연하게 빛났다.

어쩐 일로 살롱에 다 방문한 킬리안이 마침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오늘 사교회의 주최자 캐논 백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모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논 백작 부인. 훌륭한 살롱이군요.”

“베른하르트 소공작, 어서 와요. 오늘 방문해 줘서 고마워요.”

킬리안은 곳곳에서 날아드는 시선을 느끼며 황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킬리안이 고개를 돌려 벽 쪽에 서 있는 제라드를 쳐다봤다.

제라드도 킬리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서늘한 빛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1황녀님과 2황녀님을 뵙습니다.”

킬리안은 살롱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아르벨라와 클로에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르벨라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기울여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은 채 그에게 말했다.

“오늘 소공작도 오는 줄 몰랐는데.”

“1황녀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와 보았습니다.”

킬리안의 말을 듣고 아르벨라보다 주변 영애들이 더 소란을 떨었다. 클로에도 옆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이 녀석이 또 주변 사람들 착각하게 할 말을 하네.’

반면 아르벨라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킬리안을 보았다.

원래도 그를 볼 때마다 고운 눈을 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떨떠름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에 미술 전시회장에서 만난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떠오른 탓이었다.

“괜한 소리하지 말고 저기 빈자리에 가서 앉지.”

아르벨라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은 지금 그녀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인 킬리안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영애들에게 말했다.

“제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황녀님과 영애님들께 실례일까요?”

“헉,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여기 빈 자리 있어요, 빈 자리 많아요!”

영애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킬리안의 말을 부정했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슬슬 우리끼리만 이야기하기 질려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그렇지, 언니?”

믿었던 클로에까지 아르벨라를 배신했다.

이미 영애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빈자리까지 만든 참이었다.

차라리 이게 아르벨라가 연 사교회라면 불청객을 마음껏 쫓아냈겠지만, 오늘 살롱의 주최측인 캐논 백작 영애도 킬리안을 대환영하는 기색이었다.

“빈자리니 상관없지. 마음대로 해.”

결국 아르벨라도 작게 혀를 차며 킬리안의 동석을 허락했다.

킬리안이 우아한 움직임으로 영애들이 만들어 준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미술 전시회장에서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다지요?”

킬리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꺼낸 말이었지만, 아르벨라는 기분이 살짝 더 나빠졌다.

“그랬지.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이 말하던가?”

“예, 저희 어머니께서 평소에 1황녀님을 많이 존경하십니다. 이번에도 누구나 황녀님을 보면 저절로 눈이 가고 마음이 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극찬하시더군요.”

킬리안의 말을 듣고 아르벨라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미술 전시회장에서 보인 태도를 보면 아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나 듣기 좋으라고 킬리안이 그냥 하는 소리인 것 같지?

‘그런데 킬리안, 이제 봤더니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사실 저 말은 니베이아가 진짜 킬리안에게 한 말이라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킬리안에게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 사실이라면 그것 참 고마운 일이네.”

그렇게 아르벨라가 떫은 기분을 느끼는 사이, 주변에 있던 클로에와 영애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부 영애들이 머리를 맞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베른하르트 소공작님과 1황녀님은 확실히 조합이 좋네요. 이쪽이 로맨스물의 왕도, 정석적인 느낌이긴 하죠.”

“그래도 저는 역시 검은 기사 쪽이 더 좋아요. 원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과 그 밑에 있는 기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서는 주인공들이 역경을 헤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심금을 울리는 거잖아요.”

그들은 얼마간 소리 죽여 속닥거리다가 이내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2황녀님은 어떠세요? 요즘은 1황녀님의 종속 기사 쪽으로 마음이 기우셨던 것 같은데.”

클로에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아르벨라와 킬리안, 그리고 제라드를 번갈아 보면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초탈한 듯이 눈을 감았다.

“난 그냥 둘 다 양팔에 거느리고 사는 쪽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앗, 그건 『거미 여왕의 화원』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결말이네요! 역시 우리 독서 모임 ‘로사로즈’의 명예 회원인 2황녀님이세요.”

“하긴, 꼭 그런 작은 사막 왕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카뮬리타에서도 황위에 오르면 배우자를 여러 명 둘 수 있잖아요. 바보같이 너무 저희 눈높이에서만 생각했어요.”

“2황녀님 덕분에 지금 눈이 뜨인 기분이에요! 좋네요, 양손의 케이크 결말.”

클로에의 말에 영애들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감탄했다.

그들은 몇 년 전 유행했던 카뮬리타 최고의 명작 로맨스 소설 『별빛 폭풍의 기사』를 시작으로 인연을 맺어, 지금은 아예 같은 독서 클럽에 속해 있었다.

모임의 이름인 로사로즈는 ‘로맨스 소설’의 앞글자를 하나씩 딴 ‘로사’에서 착안해 지은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이것은 로맨스 소설을 읽는 영애들의 소소하고 즐거운 모임이었다.

다만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실제 사람을 보고도 로맨스 필터가 눈에 끼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그들과 인물 관계나 상황이 비슷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찾아 대입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모든 영애들이 동경하는 1황녀와 그녀의 주위에 있는 멋진 청년들은 그 자체로 이미 명작 로맨스 소설의 멋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같았다.

특히 요즘은 황녀님을 사이에 둔 우아한 귀공자와 멋진 기사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뜨거운 토론의 장이었다.

그러나 영애들의 취향은 늘 반반으로 갈려, 어느 한쪽이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매번 엎치락뒤치락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공방도 이제 오늘부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클로에의 말에 마음 깊이 수긍한 영애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는 사이, 아르벨라와 킬리안의 화제는 곧 다가올 올해의 사냥제로 옮겨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그건 이제 안 하십니까, 1황녀님?”

“그거라니, 뭘 말하는 거야?”

“리아코 어로 축포를 터트리시던 것 말입니다.”

“……그건 원래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야. 그보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1황녀님에 대한 것은 그게 뭐든 전부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있습니다.”

“소공작, 오늘은 다른 때보다 능청스럽네.”

“황녀님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제게 쌀쌀맞으신 것 같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되는군요.”

제라드는 사람들의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사이좋은 모습으로 떠드는 아르벨라와 킬리안을 보는 동안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게 가라앉았다.

제라드는 괜히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참, 캐논 백작가에서 한 가지 더 선보일 게 있다고 했지요?”

“아아, 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지금 바로 가져오라고 할게요.”

그때, 시간을 확인한 캐논 백작 영애가 시종에게 서둘러 손짓했다.

곧 예쁜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 하나가 테이블마다 하나씩 옮겨졌다.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공방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만든 인형이에요. 다음달부터 시험적으로 판매하려고 해요.”

“어머나, 정말 정교하네요!”

“정말 예쁘기도 해라.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상자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인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르벨라의 옆에 앉아 차를 마시던 클로에의 움직임이 멎었다.

“꺄아악……!”

뒤이어 그녀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날카로운 비명이었는지, 듣는 사람조차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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