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82화 (98/203)

82화

* * *

“세상에, 1황녀님께서 제 전시회에 와 주시다니……!”

풀잎 색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청려한 인상의 청년이 아르벨라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반가워, 영식. 하이어스 가문에서 훌륭한 전시회를 연다고 들어서 와 봤어.”

아르벨라는 그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오늘 전시회를 연 건 하이어스 백작 가문의 둘째 영식인 노먼이었다.

노먼은 카뮬리타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화가였다.

노먼뿐 아니라 하이어스 가문은 대대로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전시회에는 노먼의 신작들과 선대 하이어스 가문 사람들의 그림도 몇 점 함께 전시한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다른 유명한 화가들에 비하면 노먼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기에, 1황녀 아르벨라가 오늘 이곳에 방문한 건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먼은 넋을 놓은 채 아르벨라를 보면서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 1황녀님께서 이렇게 직접 걸음해 주시다니 저, 저, 정말 영광입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일이 제게 있을 줄 몰라서 미처 대접할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어쩌지요?”

“오늘은 그저 미술 작품을 감상하러 온 것뿐이니 대접은 필요 없지.”

안절부절못하는 노먼을 향해 아르벨라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냥 혼자 알아서 둘러볼게. 나는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한 뒤 아르벨라는 전시회장의 벽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얼마 전에 황후궁과 물방울 방에서 본 시녀 미레이유 하이어스를 보고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겉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고 황실에 제출된 증명서도 깔끔했지만, 아르벨라는 미레이유를 볼 때마다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노먼 하이어스는 의외로 평범한 느낌이었다.

미레이유 하이어스도 평범하다면 평범한 시녀라 할 수 있는데, 둘이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딱히 설명할 말은 없었지만…….

“앗, 1황녀님!”

어찌 되었든, 그렇게 아르벨라가 전시회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청회색 단발 머리를 한 호리호리한 여인은 카뮬리타의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인 피가르노였다.

“설마 여기서 1황녀님을 뵙게 될 줄은…… 혹시 노먼 하이어스 영식이 1황녀님께서 요즘 주의 깊게 보고 계신 화가인가요?”

그녀는 아르벨라에게 다가와 인사한 뒤, 당돌하게 물었다. 아르벨라를 보는 눈에는 긴장감과 질투심이 명백히 깃들어 있었다.

사실 피가르노는 언젠가 아르벨라를 자신의 화폭에 담고 싶다고, 몇 년 전부터 끈질기게 황실에 요청서를 보내오고 있는 용감한 화가였다.

“그냥 한번 들러 본 것뿐이야. 마침 시간이 나서 외출했는데 전시회가 열리고 있기에.”

아르벨라의 말을 들은 피가르노가 그제야 안심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셨군요. 전 또 황녀님께서 저 말고 다른 화가에게 관심을 두시는 줄 알고 놀랐네요. 혹시 제 뮤즈가 되어 주실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서 그녀는 은근슬쩍 아르벨라에게 다시 한번 제 사심을 드러냈다.

아르벨라는 흐릿하게 웃었다.

“아쉽지만, 말했다시피 내가 시간이 없어서.”

사실 피가르노도 오늘 전시회를 연 노먼처럼 추상화가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오늘은 같은 장르의 화가의 그림에 흥미를 느껴 전시회장에 온 듯했다.

물론 아르벨라도 추상화라는 장르 자체를 차별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피가르노의 화풍은 아르벨라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

“호오오. 이쪽도 아주 좋은 피사체인데…….”

그러다 문득 피가르노가 아르벨라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제라드를 보고 눈을 빛냈다.

계속해서 ‘호오, 호오.’ 하고 관심을 표하는 피가르노가 부담스러웠는지, 제라드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걸 보고 피가르노는 오히려 바로 이거라는 듯이 박수까지 짝짝 쳤다.

“1황녀님, 혹시 황녀님이 바쁘시면 대신 황녀님의 기사라도 제 모델로 삼으면 안 되겠습니까?”

“제라드를?”

“예! 방금 굉장한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아르벨라의 흥미 어린 시선도 피가르노를 따라 제라드에게 닿았다.

제라드의 얼굴이 더 굳었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서 피가르노에게 그러라고 허락할까 싶었지만, 아르벨라는 권속을 아끼는 황녀님답게 자애로움을 발휘해 질색하는 제라드를 피가르노의 손에서 구해주었다.

“요즘 내 종속 기사도 굉장히 바빠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지.”

“그럼 꼭입니다. 꼭 진지하게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결국 피가르노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너 인기 좋구나, 제라드. 다음엔 진짜 그림 모델 시켜 줄까?”

“이런 인기는 필요 없습니다. 원하시면 황녀님이 직접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무례하네요. 황녀님께 예의를 지키세요, 제라드.”

“마리나 말 들었지? 황녀님한테 예의를 지켜.”

“그리고 제라드. 피가르노는 유명한 화가예요. 원래 저희 황녀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모델로 삼고 싶다는 소리도 한 적이 없다고요. 그러니 그녀의 제안을 좀 더 영광스럽게 여기세요.”

“마리나 말 들었지? 화가님에게도 예의를 지켜.”

“하…….”

아르벨라와 마리나가 합세해서 한 마디씩 번갈아 힐난하자 제라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리나는 얼핏 아르벨라와 제라드의 얼굴을 살폈다. 두 사람 다, 확실히 표정이 아까보다는 좋아져 있었다.

‘황궁을 나설 때만 해도 속에 무슨 고민을 품고 있는지, 둘 다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내 마리나의 얼굴도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르벨라는 다시 전시회장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벽면에 걸린 어느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폭 속에 담긴 건 인물화였다.

노먼 하이어스가 추상화만 그리는 건 아닌지, 그림 속 여인의 형상은 꽤 정교하고 세밀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창틀에 걸터앉아 노을이 지는 바깥을 보고 있는 정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에 눈길이 갔다.

“왠지 4황녀님과 닮았네요.”

뒤에 있던 마리나의 입에서 지나가는 듯한 말이 나왔을 때서야 아르벨라는 정말 그림 속의 여인이 유디트와 조금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 다 검은 머리라 그런가?’

아르벨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벽에 걸린 그 그림을 지나쳐 갔다.

자리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 그림 밑 서명을 언뜻 보니, 거기에 적힌 건 노먼 하이어스의 약자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노먼이 아니라 선대 하이어스 가문 사람 중 한 명의 그림인 듯했다.

‘어? 저 사람은…….’

그리고 잠시 후, 아르벨라는 수많은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했다.

투명한 은빛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검게 보일 정도로 짙푸른 남색 눈을 고고하게 뜬 여인이었다.

그 얼굴이 그녀가 아는 사람과도 굉장히 많이 닮아 있었다.

‘역시 킬리안은 부친보다 모친을 닮은 편이군.’

여인도 아르벨라를 발견했는지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니베이아 베른하르트가 카뮬리타의 1황녀님을 뵙습니다.”

“좋은 오후군,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인 니베이아에 이어 주위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아르벨라에게 인사했다.

“사샤 화이트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로먼 몬테라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라리사 몬테라가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1황비 플로라의 가족인 화이트 백작과 베른하르트 가문과 교분이 있는 몬테라 백작 부부였다.

“1황녀님, 전시회를 관람하러 오셨군요!”

“어머, 뒤에는 그 유명한 검술 대회의 우승자네요?”

몬테라 부부는 활발한 성격이었다.

얼굴을 자주 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나 살갑게 말을 거는지, 바비 몬테라의 평소 성격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들 반가워. 모두 하이어스 영식을 보러 온 건가?”

“아, 저희는 하이어스 가문과 친분이 있어 방문했고, 베른하르트 공작 부인과 화이트 백작은 평소 미술에 관심이 깊어 작품을 감상하러 오셨대요.”

그러다 몬테라 백작 부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저희 셋째가 1황녀님을 귀찮게 한다지요?”

불시에 튀어나온 바비 몬테라의 이름에 아르벨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1황녀님의 영상 마력석을 끼고 살아서 그런지 이놈이 현실 파악을 못 하더라고요. 그래도 나쁜 의도는 아니니 너무 귀찮아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녀는 무슨 일이든 대답에 어려움을 겪은 적 없는 성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반응하기가 애매했다.

그래도 옆에 있던 화이트 백작이 바로 말을 돌려서 반응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황실에 슬슬 좋은 소식이 있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황녀님들과 황자님들 모두 좋은 짝을 만나셔야지요.”

그 순간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의 손이 아주 작게 움칫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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