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 *
“거기. 잠깐 나 좀 볼래?”
“헉, 1황자님!”
2황비 카타리나의 궁으로 향하던 젊은 시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흑단 같은 긴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높이 묶고, 맑은 벽안에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는 몹시 아름다웠다.
그는 1황자 라미엘로, 자칭 타칭 뛰어난 미청년이었다.
더군다나 보통 미청년도 아니라, 나태함과 묘한 색기를 동시에 품은 독특한 매력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물론 아르벨라나 클로에는 라미엘을 볼 때마다 허세만 늘어서 멋있는 척한다고 폄하했지만.
“저,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응, 너한테 말한 거 맞아. 이리 좀 가까이 와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라미엘이 꼭 유혹하듯이 웃으면서 속삭이자 시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힐 수밖에 없었다.
꿈을 간직한 젊은 시녀라면 한 번쯤 잘생긴 황자님과의 연애를 상상해 볼 만도 했다.
더군다나 라미엘은 황자들 중 가장 외모가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게 뭐냐면…….
“저를 왜 부르셨어요?”
“미안한데 혹시 손거울 있어?”
“손거울이요?”
“응, 손거울. 내 얼굴을 1시간이나 못 봐서 지금 금단 증상이 오던 참이거든.”
“…….”
시녀의 기대감이 파사삭 부서졌다.
라미엘은 아름다운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그린 채 시녀를 재촉했다.
한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시녀가 잠시 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라미엘은 정말 급한 듯이 그것을 가로채 갔다. 그러더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기 시작했다.
“흠, 당연한 소리지만 여전히 아름답군.”
라미엘은 자신의 미모에 완전히 심취해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꼭 호수를 들여다봤다가 스스로의 얼굴에 반했다는 신화 속의 소년 같았다.
“잘 썼어. 고마워.”
라미엘은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꼼꼼히 살핀 뒤 시녀에게 손거울을 돌려줬다.
그런 뒤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
젊은 시녀는 왠지 농락당한 기분에 라미엘의 뒷모습을 살짝 노려봤다.
선배 시녀들이 1황자 라미엘의 외관에 속지 말라고 했던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시녀는 콧김을 흥 내뿜으며 다시 2황비 카타리나의 궁으로 향했다.
“결국 어머니가 움직이시다니. 이런 건 재미없는데.”
라미엘은 조금 전 시녀에게서 바꿔치기한 편지를 손에 들고 길을 걸었다.
마법을 이용해 편지를 주고받으면 나중에 마력 흔적 때문에 꼬리를 잡힐까 봐 이렇게 중간에 사람을 써서 연락을 주고받은 듯한데…….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시녀를 중간 연락책으로 사용하다 보니 이렇게 허점이 생겼다.
라미엘은 카타리나가 꾸미는 일이 무엇인지 얼추 알고 있었다.
대충 아르벨라의 주변인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하나씩 터트려 그들을 책임지는 아르벨라의 평판을 떨어뜨리려 했던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 첫 번째 대상으로 낙점된 유디트가 지금 마력 각성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이 잠깐 멈춰졌다.
‘7월 2일, 캐논 백작가의 살롱이라고.’
원래 카타리나에게 들어갔어야 할 서신이 라미엘의 손안에서 검은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래도 그 계집애가 도움이 될 때도 있었군.’
물론 마력 각성이니 뭐니, 궁 안이 시끄러워서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라미엘은 싸늘한 웃음을 머금으며 1황자궁으로 향했다.
* * *
“황녀님, 기분 전환하러 가신다면서요…….”
“기분 전환되잖아. 봐, 풍경화가 참 예쁘네.”
“저건 풍경화가 아니라 추상화예요.”
“저 안에 숲과 바다가 은유적으로 묘사된 걸 모르겠어, 마리나?”
뻔뻔하고 천연덕스러운 아르벨라의 말에 마리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하아,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서 있던 제라드도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소리 없이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뭘. 원래 아르벨라가 말하는 게 곧 법이고 이치였다.
“아무튼 이건 추가 일정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저는 또 교외로 피크닉이라도 가시려는 건가 했지요.”
마리나의 말대로, 아르벨라가 황궁을 나와 향한 곳은 미술 전시회장이었다.
아르벨라에게는 평소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취미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은 이것도 사교나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한 방문이었다.
“일정에 없던 일을 하는 거니까 기분 전환 맞지, 뭐.”
아르벨라는 가볍게 대꾸한 뒤 전시회장의 입구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발목이 드러나는 옅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하얀 양산을 쓴 아르벨라에게서는 오늘따라 소녀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원래 아르벨라는 황녀로서의 위엄을 중시해 이런 식으로 인상이 순해 보이는 의상은 잘 입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나름대로 무해하고 친근한 황녀님의 느낌을 내 봤다.
“앗, 1황녀님!”
“1황녀님하고 검은 기사다!”
아르벨라를 본 사람들이 대번에 주목했다. 그중 어린아이들은 해맑게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기까지 했다.
카뮬리타의 제국민이라면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누구나 황족의 영상 마력석을 보며 자라기 마련이었기에, 아이들이 한눈에 아르벨라를 알아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르벨라는 밝은 태양처럼 원래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제라드에게도 많은 시선이 쏠렸다. 건국 기념 검술 대회 이후 생겨나게 된 변화였다.
제라드도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늘 아르벨라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어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그를 보는 시선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회 때 참가들의 경기 모습을 담은 영상석이 풀리자, 거기에서 우승하기까지 한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의 인기는 미친 듯이 치솟았다.
그러니 나중에 그 정체가 제라드임이 밝혀졌을 때 그가 받는 관심도 전과 비할 수 없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관심의 종류 또한 예전과 달라졌다.
사실 제라드는 모든 제국민들이 사랑하는 1황녀님의 유일한 오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던 제라드는 동정심으로 아르벨라의 종속 기사가 된 이단자 출신의 소년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건국 기념 검술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1황녀의 정식 기사였다.
“들었어? 검은 기사래. 원래 붉은 기사라는 말이 더 맞는 거 아닌가? 갑옷한테 졌네, 제라드.”
아르벨라가 멀리서 울린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제라드를 놀리듯이 말했다.
제라드는 묘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배척하듯이 보던 시선이 역시 눈에 띄게 흐려졌다.
대회 이후 늘 느끼던 것이지만, 역시 그는 이런 변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변화는 아르벨라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제라드의 시선이 다시 아르벨라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보다 작고 여린 등.
제라드의 키가 아르벨라보다 월등히 컸기에, 그녀를 앞에 두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라드는 늘 자신이 아르벨라를 올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앞으로 최소 5년 동안은 나랑 같이 있어야 하거든.”
문득 아르벨라와 처음 만났던 해에,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네가 정 내 옆이 싫어서 5년이 지나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제라드의 주먹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땐 네가 말없이 내 앞에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게.”
곧 아르벨라가 말했던 5년의 끝이 다가온다.
앞으로 1년 정도만 지나면 제라드는 정말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별로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제라드는 요즘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금단술의 현장을 목격했던 가장 최근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목에 바늘을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아르벨라가 혼자 유추한 대로 제라드는 그날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과 그가 제물로 쓰려 했던 소년을 보고, 그동안 잊고 있던 라스너 백작가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그때 제라드의 부친은 방에 있던 그를 찾아와 불길한 보라색 빛이 일렁이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를…….
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머리를 찌르자, 제라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가령, 그날 제라드를 조용히 받쳐 주던 소녀의 모습 같은…….
하지만 그 여린 몸이 당장이라도 조각나 깨질 것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았던 기억이 곧바로 연이어 떠올라 가슴을 차갑게 식게 했다.
제라드의 눈에 그림자가 깃들었다.
밝은 햇빛에 둘러싸인 아르벨라의 모습은 여전히 찬란했다.
그러나 왠지 오늘따라 손에 잡히지 않는 빛처럼 그녀가 눈앞에서 쉽게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그들이 방문한 아카데미에서 아르벨라는 분명 자갈길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게 아니었다.
그 이전에 보았던 밤의 회랑에서도 제라드는 확실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르벨라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제라드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빛에 잠긴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