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 *
“갑자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한참 더 지나 겨우 진정된 유디트가 의자에 앉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이상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고,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고…….”
앞에 있던 티슈를 뽑아 건네주자 유디트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걸 받아들었다.
그런 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돌린 채 흥, 하고 코를 풀었다.
“혼자 무서웠겠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손으로 느릿하게 매만졌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레반테온은 조금 전 유디트와 나의 극적인 상봉을 보더니 감격한 듯이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오붓하게 자매간의 회포를 풀라는 헛소리를 남긴 뒤 혼자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걱정했어. 갑자기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이미 백야의 전당에 들어가 만날 수 없다고 하잖아.”
“저를 만나려고 하셨어요?”
“그럼, 백야의 전당에 몇 번이나 연락했는데 아무도 네게 알려 주지 않았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듯이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에 해사한 미소를 그렸다.
“언니가 와 주셔서 이제 다 괜찮아요.”
말갛게 웃는 얼굴이 여전히 참으로 순진하고 바보 같아 보였다.
“이제는 남은 검사도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를 보니까 이제 안 무서워졌어요.”
아직 불안정한 유디트의 마력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처럼 밝고 보송한 느낌으로 살랑거렸다.
조금 전에는 거친 폭우가 내리는 바다 같았는데, 이런 것도 기분에 영향을 받는 걸까?
“그래, 이제 남은 검사는 얼마 안 된다니까 금방 끝날 거야.”
나는 웃으며 유디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그리고 생일 축하해. 이미 늦었지만, 그날은 네 마력 각성이 일어나 축하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겉모습과 완전히 다른, 실로 어둡게 질척이는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손끝에서 찰랑거리는 유디트의 마력을 지금 당장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잡아 뽑아 버리고 싶었다.
마냥 행복하다는 듯이 몽글거리는 마력을 세게 움켜쥐어 터트리고, 벌레를 죽이듯이 짓밟아 뭉개 버리고 싶었다.
“나중에 검사가 다 끝나서 밖으로 나오면 우리 둘이 파티를 열자.”
하지만 겉으로는 다정하게 웃으며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속삭였다.
그런 나를 향해 유디트가 또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예전과 달리 그걸 보고 조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버린 내가 싫어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온실에서 새의 깃털을 잡아 뜯는 여자의 꿈을 꿀 것 같았다.
21. 새롭게 시작되는 것들과 깊어지는 감정들
“1황녀님, 이번 달에 판매할 영상 마력석 말인데요. 제라드가 같이 나온 것으로 제출하면 어떨까요?”
마리나가 내게 제안한 말에 멀거니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
“아, 벌써 또 영상 마력석 제출할 때가 됐나?”
“네, 제출 마감일은 좀 남았지만 주제는 슬슬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마리나는 건국 기념 검술 대회 이후, 검은 갑주의 기사가 제라드라는 사실을 알고 꽤 오랜 후유증을 앓았다.
하지만 곧 충격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듯했다.
“지난 검술 대회 이후로 제라드의 인기가 꽤 올라갔어요. 그러니 이참에 대대적인 인식 변화를 위해 영상 마력석을 시작으로 서서히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게 해.”
“예,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이 좋을 것 같은데, 저한테 미리 생각해 본 몇 가지 안건이 있거든요.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
“……지금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죠?”
“그래, 그래.”
마리나의 이마에 굴곡이 진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처럼, 사실은 지금 들은 내용의 절반은 내 한 귀로 흘러 지나갔다.
꼭 지금뿐만이 아니라, 요즘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왠지 지금은 정신이 계속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 제라드도 요즘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거의 없어서 이상한데 황녀님까지 이러시나요.”
마리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푸념했다.
“그리고 황녀님 침실에 있는 저 마법 생물도 그래요.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걸 주워 오시고.”
문득 그녀의 입에서 내가 주워 온 보라색 생물의 얘기가 나왔다.
마리나는 그것이 균열의 괴물인 걸 몰랐다. 내가 아직 사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리나를 균열에 데려간 적도 없었고 또 황궁 근처에서 균열이 열린 적도 없어서, 그녀는 가까이에서 괴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보라색 덩어리를 그저 희귀한 마법 생물쯤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도 혹시 모를 위험성은 간과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황궁에 데려온 괴물에게 결계를 여러 겹 둘러놓고 마리나에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4황녀님 때문에 적적하신 거면 다른 검증된 동물을 키우시는 게 어때요? 훨씬 예쁘고 귀여운 게 많을 텐데요. 예전처럼 온실을 카나리아 같은 새로 가득 채워도 좋을 테고요.”
“아니야, 그 취미는 버렸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마리나가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귀엽고 예쁜 건 싫어.”
“왜요?”
“그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아니야.”
마리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녀는 내가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창가로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내 손해잖아.”
이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창문에 비친 마리나의 얼굴에 한순간 깨달음이 스쳤다.
곧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숙연해졌다.
“예, 적당히 옆에 둘 거라면 저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게 딱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느낌상 마리나는 내 어머니와 밀리엄을 떠올린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다른 말 없이 내게 인사한 뒤 침실을 빠져나갔다.
-씨이이, 못됐다, 너희…….
그때 구석에서 분노로 치를 떠는 듯한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어때서! 나는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어!
결계 안에서 마리나와 내 대화를 전부 들은 괴물이 연보라색 몸통을 파르르 떨면서 불퉁한 음성으로 외쳤다.
-나는 귀여워! 나는 예뻐! 너희는 못됐어……!
“그래, 나는 귀엽고 나는 예쁘고, 그리고 살짝 못됐어.”
-너 말고 나! 바보 바보! 못된 바보!
괴물이 눈을 세모로 뜨고 날 노려봤다.
그래 봤자 생긴 게 워낙 둥글둥글해서 그런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봐.”
나 참, 오늘 가뜩이나 기분도 별로인데 쟤까지 거슬리게 구네.
내가 살짝 짜증을 내자 괴물이 또 심통을 부리듯이 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튕겼다.
하지만 이 괴물은 참으로 하찮은 괴물이라, 금방 힘이 빠져 녹은 마시멜로처럼 바닥에 축 늘어졌다.
-흐이잉……. 동족이면서 괴롭혀. 진짜 나빠…….
그리고 괴물이 억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린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연보라색 젤리같이 생긴 놈을 쳐다봤다.
처음 계획과 달리 나는 이 녀석을 며칠간 방치하고 있었다.
이놈을 궁에 데려온 첫날, 백야의 전당에서 유디트를 만난 뒤 학구적 열의가 푸시식 식었기 때문이다.
“너, 그 동족이란 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쳐놓은 결계로 다가갔다.
“전에 본 놈도 그런 소리를 했어. 내가 왜 너희 동족이야?”
기운 없이 뒹굴거리는 연보라색 생물체를 손에 잡아 들어 올렸다.
“넌 괴물이고 난 인간인데.”
내 싸늘한 시선 속에서 괴물이 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몸을 좌우로 갸우뚱 움직였다.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넌 우리, 우리는 너. 다 동족인데…….
“그러니까, 너랑 나는 종이 다르다니까? 어디서 감히 너희 같은 것들하고 나를 동급으로 묶어?”
멍청한 괴물은 여전히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양 눈을 깜빡이며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괴물을 짜증스럽게 쳐다봤다.
이래서야 이놈이 균열과 거기에서 나온 괴생물체들을 향한 내 학구적 호기심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나중에 상황을 봐서 그냥 이놈은 처리하고 다른 걸 하나 더 잡아 와 볼까?
-흐이잉, 히잉. 왜 또 무섭게 쳐다봐. 죽이지 말라니까!
그래도 영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괴물은 내가 저를 두고 나쁜 생각을 하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일단 지금은 괴물과 관련해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또 이 녀석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작게 혀를 찬 뒤 손에 들고 있던 괴물을 다시 바닥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기분 전환 삼아 외출이나 해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