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78화 (94/203)

78화

* * *

그날, 마리나는 도서관에서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와 제라드가 사라져 놀랐다며 한참이나 우는 소리를 했다.

그날 금단술을 사용했다가 붙잡힌 죄인은 다행히 가족이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그래서 백야의 전당에 교화를 위해 들어온 사람은 생기지 않았다.

그가 제물로 삼으려 했던 건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이웃집 아이라 했다.

아이의 부모는 자신의 자들이 금단술의 제물로 사용될 뻔했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카뮬리타 상공에 또 균열이 나타났다. 거기엔 내가 직접 괴물을 해결하러 가지 않았다.

이 만인의 황녀님은 몹시 바쁘신 몸이라 균열이 생길 때마다 시간을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황녀님! 오늘 학술회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중간에 의견을 주신 새로운 마법식도 굉장히 독창적이었어요!”

“맞습니다, 무척 감명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꼭 참석해 주세요!”

“그래, 다들 고마워.”

오랜만에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이 나온 날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 나는 아카데미의 학술회에 참석하고 나온 참이었다.

원래도 내가 이런 식으로 아카데미나 마법사 기관 등의 학술 발표회에 참석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아예 내가 직접 새로운 마법식을 발표하는 일도 흔했고 말이다.

심지어 마법사의 열병으로 1황녀궁에 처박혀 있을 때마다 혹시 내 병에 대한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머리를 싸매고 개량 마법식을 쥐어짜는 경우도 많았다.

“황궁으로 가자.”

일정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 내 맞은편에 앉은 제라드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또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제라드는 금단술 현장을 보고 온 이후로 한동안 부쩍 말수가 줄고, 지금처럼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날 현장에서 무언가를 보고 충격을 받은 건 확실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제라드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훗날 내 제물이 될 그와 선을 긋기 위해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입이 조금 간지러웠지만 결국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나도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궁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기이한 위화감이 내 오감을 건드렸다.

“잠깐……. 마차 세워.”

결국 마차를 제자리에 서게 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제라드가 이유를 묻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잠자코 감각을 집중해 보았다.

물을 가득 넣은 그릇에 잉크 한 방울을 넣은 것처럼 아주 희미한 감각이었지만 확실했다.

이건 분명 균열 느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특이한 파장이 이 부근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새로운 균열의 조짐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균열을 따로 연구하는 마도사들 사이에 새로 들어온 연락은 없었다.

‘하긴, 난 위대한 천재님이니까 다른 마법사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걸 나만 알아낸 걸 수도 있어.’

아무튼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탐지 마법을 이용해 희미한 마력 파장이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황녀님, 왜 그러십니까?”

제라드가 나를 따라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다른 문제라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바스락!

그리고 잠시 후, 탐지 마법에 걸린 곳에 도착하자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꾸르르…….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균열의 괴물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보라색 덩어리가 물속에서 공기 방울을 뿜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앗, 깜짝이야.’

물론 내 탐지 마법이 잘못됐을 리는 없지만 진짜 나오다니, 순간 놀랐네.

혹시 싶어서 탐지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했지만 더 걸리는 건 없었다.

아무래도 균열이 새로 생긴 건 아닌 듯했다. 괴물도 이놈 한 마리뿐인 것 같았다.

‘그럼 혹시 지난번 균열 때 몰래 도망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런데…… 이거 생긴 게 왜 이래?

덤불 속에 있는 괴물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에 비해 색이 엄청나게 연한 보라색이었다.

게다가 크기도 다른 것보다 훨씬 작아서, 내가 근력 증가 마력 없이 한 손으로도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설마 균열의 괴물?”

내 뒤로 다가온 제라드도 덤불 속에 숨은 걸 보고 의혹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의아했다.

“혹시 괴물에도 새끼가 있나?”

아무튼 이렇게 작으니, 충분히 기회를 틈타 달아나서 몰래 숨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꾸우, 꾸우우…….

작은 괴물은 나를 보고 흉포하게 날뛰기는커녕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 모습이 오죽 가련하던지, 꼭 내가 작은 소동물을 괴롭히는 나쁜 인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뭐야, 괜히 찝찝하게…….’

하지만 균열에서 떨어진 정체 모를 괴물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쯧, 빨리 처리하고 가야겠네.”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하는 게 간단해.”

괴물을 향해 손을 뻗자, 연보라색 덩어리가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내 손을 피하려고 용을 썼다.

급기야 녹은 마시멜로처럼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낮춘 괴물을 향해 마법식을 그렸다.

바로 그때, 괴물이 불쌍하게 울먹이며 말했다.

-히이잉, 나, 나 죽이지 마아아아…….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게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 말입니까?”

자신에게 하는 말로 오해했는지, 제라드가 나한테 반문했다.

나는 여전히 황당한 기분으로 제라드를 돌아봤다.

“아니, 너 말고 이거. 너도 지금 이게 뭐라고 하는지 들었지?”

“괴물의 울음소리라면 들었는데…….”

제라드의 표정이 살짝 오묘해졌다. 내가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듯, 그의 눈매는 약간 찡그려져 있었다.

나는 제라드의 반응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저게 뭐라고 한 거야?”

“예? 누가 황녀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만한 말을 한 겁니까? 도대체 어느 건방진 놈이! 누구냐……!”

일전에 균열에서 나온 괴물을 처리하러 갔을 때, 그때도 괴물이 분명 이상한 말을 했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지난 일을 떠올리며 혼란스러움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에, 연보라색 덩어리가 여전히 울먹이면서 또다시 웅얼거렸다.

-나 죽이지 마아아. 살려 줘…….

이렇게 두 번이나 직접 괴물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번에는 내 착각이나 환청이라고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난번의 그 괴물은 이미 죽어버려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니 궁금한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야, 너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응응, 응.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 거야?”

-사람 말?

내 물음에 연보라색 마시멜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듯이 몸을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기울였다.

-나, 그냥 말할 뿐. 사람 말 모른다.

무슨 소리야? 지금 자기가 사람 말로 떠들고 있으면서.

어쨌든 짧은 말을 할 때는 몰랐는데 문장이 조금 길어지니 티가 났다.

꼭 어설프게 카뮬리타어로 말하는 외국인처럼 말투가 어색해졌다.

-나는 아무 힘도 없어. 나는 약하다. 아주 많이 약하다.

내가 바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 먼저 말도 걸고 이야기를 들어 주자 괴물은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마냥 쭈굴거리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지금은 제법 열성적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어필하며 나를 설득하려 하기 시작했다.

-짐승도 영역 싸움할 때 약한 것, 어린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 나 같은 약한 것, 죽이는 건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나름대로 평화적인 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이게 어디서 날 비난하면서 세뇌하려고 수작질이야?’

나는 생기다 만 보라색 괴물 덩어리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하나만 알고 줄은 모르는구나. 해충은 새끼여도 죽여. 바퀴벌레나 모기나 그런 거.”

당연히 균열에서 나온 괴물도 해충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뼈 때리는 말에 타격을 입었는지, 보라색 마시멜로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해충이 아니야!

“그보다 넌 약해서 이렇게 생기다 만 거야?”

-나는, 생기다 말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 놀리는 맛이 좀 있군.

아무튼 괴물이 말을 할 수 있다니 이건 엄청난 발견이었다.

내가 세계의 이면에서 봤던 미래에서도 그런 얘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황녀님.”

바로 그때, 내 어깨 위에 단단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옆에서 소리를 낮게 낮춘 음성이 들려서 생각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가 굳은 눈을 한 채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얼굴을 살피는 눈빛에는 염려와 긴장감마저 어려 있었다.

곧 그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이건 제가 처리할 테니 먼저 마차로 가서 쉬십시오.”

제라드가 내 손에 들린 연보라색 괴물을 가져가려 했다.

아무래도 내가 괴물을 앞에 두고 혼자서 대화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제라드, 너 진짜 얘가 말하는 거 하나도 못 들었어?”

나는 손에 힘을 줘서 제라드가 괴물을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그에게 확인했다.

제라드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멈칫했다.

“……설마, 정말 이 괴물이 말하는 걸 들으셨단 말입니까?”

이윽고 제라드가 의혹 어린 눈빛을 띤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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