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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77화 (93/203)

77화

“말도 안 돼, 빨리 백야의 전당에 연락을……!”

혼잣말을 횡설수설 떠들던 마법사는 서둘러 서고를 나섰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보라색 빛의 기둥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실제 금단술의 흔적을 본 건 처음이었다.

‘요즘 내 마음을 부산스럽게 만들었던 유디트의 각성에 이어, 이렇게 미래의 내가 사용할지도 모를 금단술까지 보게 되니 왠지 기분이…….’

꼭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의 이면이 만들어낸 집요한 상념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원래 카뮬리타에서 금하는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은 황실 소설 마법사 기관인 백야의 전당에서 담당해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지만…….

금단술에 대한 관심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황녀님.”

하여 창밖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 문득 내 손등 위로 온기가 내려앉았다.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번졌다.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어느새 서고에 들어온 제라드가 내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혼자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재차 나직한 물음이 귓바퀴를 감쌌다. 그러고 보니 지금 서고 안에는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자격 요건이 안 되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울리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요란한 경보음은 이제야 겨우 인식해 놓고, 그리 크지도 않은 제라드의 목소리만 귀에 쏙 들어온 게 이상했다.

내가 있는 곳까지 급히 달려온 듯, 제라드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큼은 다른 때보다 강한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설마, 지금 저곳에 가시려고요?”

제라드 역시 창밖의 이상 현상을 목격한 듯했다. 그는 내가 지금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아는 것 같았다.

시선이 얽힌 다음 순간, 내 손을 움켜쥔 제라드의 힘이 더 강해졌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눈을 통해, 지금 그가 나와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갈 거면 나도 데려가.”

낮은 속삭임이 귀에 울린 순간, 나는 바로 마법을 사용해 불길한 빛이 퍼져 나가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 * *

도착한 곳은 낡은 저택이었다. 여전히 강렬한 빛이 건물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혹시 위험한 낌새가 들면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력의 상태를 보니 도중에 어떤 이유로 마법식이 더 진행되지 않고 멈춘 것 같았다.

그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주위에 결계가 이중으로 쳐 있었지만 그냥 살짝 건드렸더니 깨졌다.

“되게 조용하네.”

쥐새끼 한 마리 없는 것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는 제라드가 나보다 앞서 걸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쳐다봤다. 여기까지 자진해 따라온 걸 보면, 역시 제라드도 금단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제라드의 등을 보는 동안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괜히 데려왔나?’

왠지 그의 눈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나 혼자 올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제라드는 불길한 마력이 조용히 맴돌고 있는 폭풍의 중심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다다라,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제라드가 우뚝 멈추어 섰다.

제라드의 등 때문에 방 안을 볼 수가 없어서 살짝 옆으로 몸을 비꼈다. 그 직후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이런 게 금단술인가?’

물론 이론이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책에서 읽은 것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방 안에 고인 피비린내가 가장 먼저 내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바닥을 가득 채운 마법진은 꼭 피로 그린 것 같았다. 구석에는 죽은 염소와 사슴의 주검이 보였다.

금단술마다 사용하는 마법식과 제물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이 금단술에는 저런 동물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법진 안에 어린 소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어딘가를 다친 듯, 그의 몸에서도 피가 흘러 옷이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그 소년을 부둥켜안고 있는 갈색 머리 중년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았다.

그의 초점 없는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나를…… 잡으러 왔나?”

문득 중년 남자가 입술을 열어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죽여 주게.”

나와 제라드한테 하는 소리인 건 확실해 보였는데, 그의 시선은 줄곧 자신의 품 안에 늘어진 소년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남자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결국 죽일 수가 없었어. 이 마법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이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시도하는 동안,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려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너무도 간절하게 죽고 싶어졌다네.”

설마 저 어린애를 금단술의 제물로 삼으려던 건가?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해서 마법이 도중에 멈춘 거고?

솔직한 심경으로는, 조금 실망했다.

마법이 제대로 성공하거나 아예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만약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어서.

아무튼 남자를 포박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마력 사슬로 남자를 칭칭 동여맸다.

음? 그런데 뭐지……?

‘왠지 제라드가 아까부터 너무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데.’

“제라…….”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제라드의 얼굴에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쾅!

그때, 여러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네 이놈! 겁도 없이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은 당장…… 어, 엇?!”

복장을 보니 파견을 나온 수도 경비대인 것 같았다. 백야의 전당 사람들이 바로 나올 줄 알았더니, 늦나 보네.

“아, 아이고! 1황녀님께서 벌써 와 주셨군요!”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정체를 알아차렸다.

“수고가 많군. 마침 나와 내 기사가 가까이에 있던 참이라 가볍게 조치를 취했는데 뒷정리는 믿고 맡기도록 하지.”

나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뒷일을 맡긴 뒤 제라드의 팔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너 괜찮아?”

복도를 걸으며 제라드에게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

소리 죽인 내 물음에 제라드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는 목이 막힌 것처럼 그 짧은 대답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내 손에 이끌려 관성적으로 걷고 있던 제라드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에 뿌리가 박힌 것처럼 미동 없이 선 그의 얼굴은,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제라드가 나한테 붙잡히지 않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이 꼭 무언가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라드…….”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으려 했으나, 왠지 제라드의 얼굴을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뜻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서 제라드를 복도 구석으로 잡아당겼다.

제라드는 비틀거리면서 나한테 끌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제라드가 조금 진정되면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림자진 복도의 구석에 들어서자마자 비틀거리던 제라드의 몸이 나한테 기울어졌다.

쓸데없이 무겁고 큰 몸에 밀려서 등이 벽에 부딪쳤다. 나도 모르게 윽, 소리가 나왔다.

“무거워, 너…….”

“잠깐…….”

제라드가 양해를 구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잠깐만…….”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귓가에 흩어지는 숨이 눅눅했다.

내 목덜미에 머리를 얕게 비비적거리는 모습이, 꼭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커다란 개 같았다.

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금단술을 사용한 현장을 보고 아버지의 일을 떠올린 게 아닐까 싶은데…….’

나는 마음속에 스미는 껄끄러움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처럼 이 무엄한 놈, 하고 욕 한마디를 해 준 뒤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그게 안 됐다.

무심코 손을 들었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다.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위로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제라드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제라드를 이곳에 데려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또 한번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에 본 마법진이 있던 방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흐리게 떠올랐다.

한순간 그 위로 4년 전 숲에서 처음 본 붉은 머리 소년이 겹쳐졌다.

허공만 스치고 있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지금 내 나이가 열여덟 살…….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아이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만 손끝을 말아 쥐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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