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76화 (92/203)

76화

* * *

“황녀님, 제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으셨죠?”

“……그래.”

하루 동안의 짧은 휴가를 다녀온 마리나가 내 안부를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지만 굳이 그 일을 마리나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지금 뭐 해?”

“연무장에 있는 것 같아요.”

제라드는 그날 일에 대해 내 앞에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녀석인데, 진짜 내가 그날따라 굽이 높은 신발을 신어서 그냥 넘어졌다고 생각한 건지…….

아무튼 그가 그 일을 따로 거론하지 않으니 나도 내 입으로 굳이 말할 일이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제라드를 떠보기도 꺼려졌다.

“황녀님, 4황녀님과 약속하신 시간이에요.”

“그래, 가자.”

일단 생각하기 싫은 일은 제쳐 두고 유디트를 만나기 위해 4황녀궁으로 향했다.

* * *

“……니. 언니.”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일어나세요.”

거기에 이끌려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히 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쉽게 이해되지가 않았다.

이어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마저 듣고 나서야 안개가 낀 듯이 뿌연 머릿속이 한결 명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4시 50분이에요. 좀 더 쉬게 해 드리고 싶지만 다음 일정이 있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요.”

고개를 들자 주황색 노을이 스민 유디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내가 깜빡 잠들었었나?”

“네, 20분 정도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언제나처럼 말갛게 미소 짓는 유디트의 얼굴을 보고도 얼떨떨한 기분인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일전에 유디트가 청했던 대로 그녀의 공부를 봐주기 위해 4황녀궁에 방문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잠들어 버리다니…….

물론 요즘 들어 불면증이 심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던 중에 졸음을 못 이겨 책상에 엎어져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 공부하는 애 앞에서 혼자 자 버렸네.”

“아니에요.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유디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쩌면 그녀에게 원하는 생일 선물을 생각해 두라고 말했을 때보다 더 즐겁고 기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걸 보니 약간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웃긴 얼굴로 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황녀님은 입을 벌리고 자도 품위가 넘칠 거야.

“하던 걸 마저 끝내고 싶지만 오늘은 저녁 만찬 일정이 있어서 일어나 봐야 해. 지금 다 못 한 건 다음에 다시 봐줄게.”

“네! 좋아요.”

유디트는 나와 있으면 늘 그렇듯이, 오늘도 계속 방긋방긋 웃고 ‘좋아요’ 소리만 했다.

오늘도 맹목적으로 나만 쫓고 있는 유디트의 눈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다.

잘 정리된 머리카락을 내가 헝클이는데도 유디트는 그만하라는 소리 한마디 없이 또 웃었다.

나는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는 유디트를 두고 4황녀궁을 빠져나갔다.

1황녀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무장에 들렀다.

“헉, 1황녀님이시다!”

“1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황실 기사단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연무장에는 훈련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날 보고 서둘러 인사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훈련하도록.”

그들을 지나쳐 아직 이곳에 있을 제라드를 찾았다. 그의 붉은 머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기사들처럼 셔츠를 들어 대충 얼굴의 땀을 닦아내던 제라드도 거의 동시에 나를 발견했다.

“1황녀님.”

상의가 올라가 드러난 그의 배에 저절로 시선이 꽂혔다.

‘흐음, 제법…….’

하지만 내 눈길을 느낀 제라드가 곧바로 옷을 다시 내려서 그의 복부에 선명히 새겨진 근육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들러 봤지.”

제라드는 다른 기사들과 대련하고 있던 중인 듯했다. 이제는 다른 기사들 틈에 섞여 연무장에 있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나는 내게 다가온 제라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얼굴 봤으니 됐어. 난 다시 가 볼 테니 하던 거 마저 해.”

제라드는 의혹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이 다른 때보다 끈질겼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짓을 했으니 당연했다.

“1황녀님.”

그런데 막 몸을 돌리려 했을 때, 제라드가 나를 불렀다. 왜 그러냐는 듯이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제라드는 쉽사리 형언하기 어려운 얼굴로 나를 보며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싱겁게.”

나는 습관처럼 제라드에게 한소리 해 주려다가, 지금 이곳이 다른 기사들도 있는 연무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냥 우아한 황녀님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왠지 나를 응시하는 제라드의 눈이 살짝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따라오는 시선을 떨치고 이번에는 정말 뒤돌아섰다.

그리고 유디트가 마력 각성을 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20. 어느 날 괴물이 말했다

열여섯 살이 되도록 마력 운용 하나 못 하던 반쪽짜리 4황녀에게 엄청난 이변이 생겼다는 소문이 황궁 내에 쫙 퍼졌다.

유디트의 생일날, 그녀는 나를 기다리며 테이블을 장식할 꽃을 정원에서 직접 꺾다가 갑작스러운 어지럼증과 호흡 곤란 등의 증세를 느끼며 기절했다.

그리고 그 직후, 갑자기 강대한 마력이 유디트의 몸에서 터져 나와 그녀가 있던 4황녀궁의 정원뿐 아니라 온 황궁 전체를 하얀 눈꽃으로 뒤덮어 버렸다.

나를 포함해 황궁 안에 있던 마법사들이 유디트가 각성한 순간 전부 이변을 감지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량이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황실 안에는 큰 소란이 벌어졌다.

현재 유디트는 황제의 명으로 백야의 전당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유디트를 만날 수 없었지만, 내 입장에서도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언니, 언니! 유디트 그게 갑자기 마력이 엄청 많아졌다며?! 얘기 들었어?”

유디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클로에도 엄청나게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 봤던 구절을 떠올렸다.

[마력 각성 이후, 유디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먼저, 냉궁에 사는 반쪽짜리 황녀를 유령처럼 대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던 유디트의 인생에 그날부터 반짝이는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짜 이날이 오고야 말다니.’

나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디트가 각성한 순간 내가 감지했던 그녀의 강대한 마력을 떠올리자 목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고상한 황녀님답지 않은 추저분한 생각들이 꼭 연못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순물처럼 보글거리며 위로 올라오는 듯했다.

굳이 그런 감정을 곱씹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바쁘게 움직였다.

유디트의 마력 각성 말고,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 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 *

그날 나는 오랜만에 카뮬리타 국립 도서관에 방문했다. 동행인은 제라드와 마리나가 유일했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서고는 고위 귀족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 그들은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돌연 높은 빛기둥이 솟구쳤다.

‘응? 갑자기 뭐야?’

불길한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이었다.

누가 대규모 마법이라도 쓰는 건가? 그런데 느낌이 왜 저렇게 구리지?

“헉, 저건……! 설마 그, 금단술?”

나와 같은 서고에 들어와 있던 이름 모를 마법사가 건너편 책장에서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저 수상한 빛기둥의 정체를 깨달았다.

‘금단술.’

지금 막 고막을 파고든 그 단어가 순식간에 가슴까지 깊게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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