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 *
“윌슨 파벨라, 그 모자란 놈이 기어이 내게 수치심을 주는구나!”
티 파티 이후 2황비 카타리나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분노를 표출했다.
테이블 위의 화병에서 꽃다발을 뽑아내 화풀이하듯이 내던지는 손길이 사나웠다.
카타리나는 나부끼는 꽃잎들 사이에서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왜 아르벨라가 하는 일만 매번 이렇게 잘 풀린단 말이냐!’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 쥬논 그레이엄 후작은 예전부터 1황녀 아르벨라를 유력한 황위 계승권 후보에서 밀어내기 위해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아르벨라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과 딸을 둔 입장에서, 목숨에 위협이 갈 만한 잔인한 수법을 사용하기란 굉장히 꺼려졌기 때문이다.
카타리나는 아르벨라의 황족으로서의 위신을 상하게 해, 황제의 신뢰도 잃고 제국민들의 지지도 잃는 결과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더러운 수법을 쓰지 않고 라미엘을 다그쳐 1황녀에 준하는 성과를 내게 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라미엘과 아르벨라가 성년식을 앞두게 되면서 위기감이 더해졌다.
아들과 동갑인 그 아이를 마냥 어린애라 생각해 그냥 놔둘 때가 아니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직접 뽑아낼 수 없다면 주변을 건드려 봐야지.”
카타리나는 잠깐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어딘가에 서신을 썼다.
“캐논 백작가에 보내라.”
시녀에게 봉투를 건네는 그녀의 눈은 싸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1황녀님!”
다음 날 오후,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아카데미 총장인 알렉스 새뮤얼이 나를 열렬히 맞아 주었다.
“반겨 줘서 고맙군, 총장.”
오늘 내가 방문한 곳은 카뮬리타 황궁과 가까운 곳에 새로 창립된 국립 아카데미였다.
새로운 아카데미를 짓기로 한 처음 목적은, 세계 곳곳에 정체불명의 균열이 생겨남에 따라 그에 대응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실을 대표해 아카데미 설립에 관여한 내 적극적인 반대로 결국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는 종합 아카데미로 최종 확정되었다.
물론 내가 학생들에게 전투, 탐지, 방어 위주의 과목을 가르치는 걸 반대한 이유는 균열의 끝이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 의하면,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유디트에 의해 최후의 균열이 닫히고 세계는 다시 평화를 되찾을 예정이니까.
“1황녀님께서 이렇게 직접 아카데미에 방문해 주시고, 또 이렇게 교정을 걸으시는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리고 오늘, 얼마 전 건축이 완료되었다고 보고 받은 아카데미를 보러 방문했다.
“아카데미가 완공될 때까지 감사하게도 지대한 관심을 표해 주신 1황녀님을 생각하며 내부를 꾸며 보았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안내인을 자처한 아카데미 총장 알렉스 새뮤얼은 알고 보니 내 굉장한 팬이었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나자마자 자신의 집에 내 모든 영상 마력석 컬렉션이 전부 소중히 보관되어 있으며, 특히 요즘의 내 활약은 그야말로 전쟁의 여신에 버금갈 만큼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장황하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아마 내가 바쁜 일정을 핑계로 중간에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면 예전의 내가 공식 석상에서 연설문을 줄줄 읊었던 것처럼 1시간 이상은 거뜬히 떠들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나를 찬양하는 자들의 말은 언제나 듣기 좋았지만 이렇게 바쁠 때는 예외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아카데미 명칭은 1황녀님의 영광된 성함을 따서 지으려 합니다! 가운데 글자를 따서 ‘르벨’ 아카데미라 할지, 아니면 끝 글자를 따서 ‘벨라’ 아카데미라 할지 고민 중인데 혹시 1황녀님께서는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총장에게 안내받아 아카데미를 구경하며 깨달은 사실인데…….
“또 이 마법 연구동은 1황녀님의 탄생화를 따서 아카시아관이라 부르려 합니다! 물론 아카데미 산책로 전부에 아카시아 꽃나무를 잔뜩 심어 놨지요!”
그는 생각보다 심한 내 골수팬이었다.
“그리고 1황녀님의 탄생석인 분홍색 다이아몬드를 벽에 가득! 박고 싶었지만 몹시 안타깝게도 예산 부족으로……. 본관 로비에 건 설립자 명단 석판만 꾸며 보았습니다.”
총장의 설명을 들을수록 나는 그의 과한 의욕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자리에 황녀님의 순금 동상을 세울 예정입니다!”
“아니, 동상은 진짜 됐어.”
급기야 내 동상까지 세운다는 말을 듣고 정색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내 뒤를 따르던 제라드도 그때쯤에는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아카데미가 아니라 신전인가?”
그 말대로, 지금 내가 안내받은 아카데미는 정체성이 오묘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나를 떠받드는 인간들을 보면서 즐기는 건 맞지만 이건 좀 뭔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구경 잘했어. 총장이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나는군.”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아카데미 이름이랑 동상이랑 기타 등등에 대한 조정안을 따로 정리해 보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1황녀님,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총장실에서 차라도…….”
내 몸에 이상이 느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차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중에, 또다시 차가운 손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느낌이 들었다.
“……!”
불시에 꽂혀 든 통증에 흡, 숨을 들이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설마 또?
아니야, 하지만…….
‘설마 또 이렇게 빨리 병증이 나타났다고?’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작게 조각난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귓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화, 황녀님……!”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바닥에 넘어진 상태였다.
그 순간 뺨을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진 건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이 홧홧해지는 게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동안 가끔 밖에서도 마법사의 열병 증상이 나타난 적은 있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감추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남들 앞에서 꼴사납게 넘어지는,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더 미치겠는 건, 내 상황을 인지했는데도 아직도 심장이 너무 쑤셔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이를 악물고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참는 게 고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황녀님?”
당황한 사람들 사이에서 제라드가 가장 먼저 내게 서둘러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제라드도 차라리 숲에서 짐승이 튀어나오거나 하면 그건 반사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었지만, 내가 멀쩡히 걷다가 갑자기 넘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것 같았다.
당연히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바닥을 짚은 손이 떨리는 게 보일 것 같아서 주먹을 꽉 쥐었다.
제라드가 나한테 다가와 옆에 무릎을 굽히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짧은 순간 동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지금 제라드가 나를 보고 상태가 이상한 걸 알아차려서 소란이라도 떨면 어떡하지?
그리고 만약 그게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그래서 내 병에 대한 소문이라도 나면?
혹시 그렇게 되어서 사람들이 나를 안쓰럽거나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기라도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었다.
마침내 가까이에서 제라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제라드는 어째서인지 잠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입술을 꽉 깨문 채 겨우 숨만 내쉬고 있는 걸 보았으니,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텐데도.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제라드가 입을 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새로 닦은 길이라 그런지, 아직 정돈이 덜 된 것 같습니다. 군데군데 신발 굽에 걸릴 만한 뾰족한 자갈도 눈에 띄고.”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감히 황녀님을 내려다보다니, 다들 고개를 돌려라.”
제라드가 고개를 들어 엄포를 놓자 다른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뒤 제라드의 목소리가 다시 나를 향했다.
“1황녀님께서 명하신다면 당장 이 자갈길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 버리겠습니다.”
그때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섰다.
뭐야……? 내가 길에 깔린 자갈 때문에 실수로 넘어져 놓고 창피해서 못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역시 오늘은 황녀님의 시녀가 말한 대로 낮은 구두를 신으시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아무튼 제라드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동안 내 상태도 나아졌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 최대한 평소의 목소리를 꾸며내 말했다.
“오늘 같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건방지게 나를 내려다보는 꼴을 보라는 말이야?”
이제는 그럭저럭 다리에 힘이 들어갈 것 같아서 제라드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원래 내 성격이라면 부축도 전부 뿌리쳤을 테지만 지금은 이런 손이라도 필요했다.
제라드는 딱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선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손만 빌려주고 혼자 몸을 일으키게 놔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약해진 상태라 그런지, 내 손을 움켜쥔 제라드의 힘이 약간 아플 정도로 세게 느껴졌다.
아무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난 뒤, 괜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총장.”
“예, 예!”
“동상이고 뭐고, 이 자갈길부터 당장 싹 다 밀어 버리도록 해.”
“헉, 알겠습니다!”
총장은 내가 아카데미의 자갈길 때문에 체면을 상해 심기가 아주 상한 상태라고 생각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장 뒤돌아 외쳤다.
“뭣들 하느냐, 1황녀님께서 자갈길을 다 밀어 버리라고 하신다!”
그를 뒤로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길이 거치니 마차까지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제라드와 나 둘 다 장갑을 껴서 다행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손이 티 나지 않을 테니까.
평소라면 자갈길이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에스코트를 받을 리 없었지만 지금은 하는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제라드는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