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74화 (90/203)

74화

* * *

얼마 전부터 아르벨라는 부쩍 이런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할 때마다 제라드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르벨라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벨라가 미리 말해 둔 건지 한동안 두 사람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간 둘이서만 침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제라드.”

그러다 잠시 후, 아르벨라가 조용한 음성으로 제라드를 불렀다.

“넌 생일이 언제야?”

이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라드에게 기이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지난 4년 동안 아르벨라가 그에게 이런 사적인 부분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잠깐 말이 없다가 귀에 흘러들던 음악이 막 끝났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뭐?”

“농담인데.”

“야.”

아르벨라가 발끈한 듯이 제라드의 팔을 빈 술잔으로 쳤다.

“무엄하긴. 넌 황녀님에 대한 존경심을 더 배울 필요가 있어.”

조금 전의 이상한 낯빛을 지운 채로 아르벨라가 투덜거렸다. 그 모습은 제라드가 알고 있는 보통의 아르벨라와 같았다.

그래서 제라드는 안심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에 조금 놀랐다.

여러 가지 변화를 내재한 파티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19. 다가오는 폭풍, 유디트의 마력 각성

건국 기념 검술 대회 이후로 킬리안의 말을 생각하는 날이 늘었다.

“역시 웃는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1황녀님.”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세계의 이면에서 본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의 내용을 떠올리는 게 줄어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유디트나 제라드 옆에서 마음을 풀고 있을 때도 많은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킬리안이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유디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도착했습니다, 황녀님.”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경계심을 느끼고 있던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벨라 언니!”

“1황녀, 어서 와요.”

티 파티가 열리는 방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황후 전하. 그리고 황비님들. 동생들도 반갑구나.”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대부분 나를 반겨 주었으나, 2황비 카타리나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내 뒤에 서 있는 제라드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는 입술을 아프게 꾹 깨무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오늘만큼은 그런 2황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황궁 여인들 간의 모임이라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지만, 특히 이번에는 내 얼굴을 보기 싫었겠지.’

얼마 전에 열린 건국 기념 검술 대회에서 내 종속 기사인 제라드가 그레이엄 가문의 후원을 받는 기사를 누르고 우승했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겠는가.

반면 나는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2황비와 반대로, 바쁜 일정 중에도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이기도 했다.

“앉아라, 아르벨라.”

별로 탐탁지는 않았지만 내 자리는 어머니의 옆이었다.

어쩐 일로 오늘은 어머니도 티 파티에 참석했다.

어머니와는 지난번 황후궁에서 밀리엄의 일로 마주친 게 마지막이라, 사실 이렇게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편했던 건 아주 어릴 때 외에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군. 저 시녀, 오늘은 밀리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머니를 따라왔잖아?’

그보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어머니의 뒤쪽에 서 있는 미레이유 하이더스였다.

자리에 앉기 직전에, 벽에 붙어 선 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연한 풀색 머리에 주황색 눈을 가진 주근깨 박힌 얼굴은 오늘도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보였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저 시녀는 어머니의 신뢰를 상당히 많이 얻은 것 같았다.

밀리엄을 거의 전담해 돌보는 데 이어, 이런 자리에까지 어머니와 동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는 트집을 잡을 만한 부분이 없어, 일단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역시 여름에는 이 물방울 방이 티타임을 즐기기 좋네요.”

“그러게요. 꼭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이번 달의 모임은 ‘물방울 방’이라 이름 붙은 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사방의 벽을 유리 수조처럼 만들어 그 안에 예쁜 열대어들과 색색의 수초와 산호, 또 조약돌 같은 걸 넣어 감상할 수 있게 한 방이었다.

은은한 푸른 조명이 깔린 방에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가 자리에 착석하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 먼저 짧게 이어졌다.

“그나저나 1황녀의 종속 기사가 이번 검술 대회의 우승자인 검은 갑주의 기사였다니, 정말 놀랐지 뭐예요.”

그러다 3황비 소피아가 호기심 어린 진녹색 눈을 내 뒤에 선 제라드에게 고정시키며 먼저 말했다.

그녀의 딸인 5황녀 비비안도 아까부터 제라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중이었다.

“맞아요. 벨라 언니 기사가 투구 벗었을 때 진짜 깜짝 놀랐는데.”

2황녀 클로에와 3황녀 리리아나가 맞다면서 동의했다.

“난 마지막에 저 종속 기사가 벨라 언니한테 다시 기사의 맹세했을 때가 제일 인상 깊었어!”

“난 결승전! 사실 관중석에서 내기하는 거 보고 윌슨 파벨라가 우승할 거라고 용돈도 살짝 걸었는데 완전 망했…… 아얏!”

한참 떠들던 리리아나가 갑작 비명을 지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의 모친인 1황비 플로라가 얼른 딸의 팔을 꼬집는 장면을 목격했다.

기어이 윌슨 파벨라의 이름이 나와서 그런지, 막 테이블에 내려놓던 2황비의 찻잔에서 작게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 제라드는 원래 실력이 뛰어난 아이인데 평소에 출신 때문에 저평가 당하는 게 안타깝던 참이었지.”

나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조금 전 동생들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도 이제는 다들 제라드가 얼마나 훌륭한 기사인지 알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야. 더는 자격 운운하면서 함부로 떠드는 미련한 자들도 없겠지.”

“그렇지. 건국 기념 검술 대회 우승자가 돼서 정식으로 언니 기사가 된 거니까!”

클로에는 그녀가 제라드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과거를 벌써 잊은 듯했다.

사실 클로에가 검은 갑주의 기사에게 관심을 느껴 그를 찍은 영상 마력석을 남몰래 모으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라드가 검은 갑주의 기사라는 걸 알게 되면 마리나처럼 정신적 타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녀는 제라드에 대한 점수를 상향 조정한 듯했다.

“준우승자의 이름은 윌슨 파벨라라고 했나?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야심 차게 내보낸 기사라고 들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2황비.”

그때 조용히 차를 마시던 어머니가 2황비를 겨냥했다.

2황비 카타리나의 입꼬리가 한순간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린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내 어머니의 말에 화답했다.

“……초심자에게는 행운이 따른다더니, 1황녀의 기사에게도 이런 큰 대회에 처음 참석하는 운이 작용한 것 같아 다행이더군요.”

“윌슨 파벨라도 그동안 남부에서나 이름을 좀 알렸지, 이런 큰 규모의 대회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2황비의 기사보다 1황녀의 기사가 좀 더 담대했던 모양이지?”

그런데 2황비의 좀스러운 핑계에 이어 우리 어머니가 그것을 태연히 받아치며 꺼낸 말에는 나도 좀 당황해서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뭐야, 지금. 어머니가 제라드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해 준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전에는 항상 트집만 잡으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더니.

“……제 기사라니요. 그냥 저희 가문에서 후원을 조금 했던 아이일 뿐입니다.”

“그래, 2황비의 외가인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예전부터 갖은 후원을 다 받고도 이제 고작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1황녀의 종속 기사에게 패배한 그 준우승자 말일세.”

“…….”

찻잔을 쥔 2황비 카타리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가 그동안 2황비에게 쌓인 게 좀 많았나 보다.

‘하긴, 카타리나 성격에 그동안 제라드를 두고 우리 어머니를 좀 많이 약 올렸겠어?’

아무튼 지난달에도 이런 티 파티가 열렸었는데, 다들 제라드를 보는 시선이나 반응이 그때와는 참 많이 달랐다.

심지어 우리 어머니까지 이제는 제라드를 수치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그를 앞세워 자신의 면을 세우는 데 쓰고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웃겼다.

제라드는 아까부터 내 뒤에 가만히 서서 이 모든 촌극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라드뿐만이 아니라 다른 황족들이 데려온 기사와 시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어머니와 내가 같은 배에 탄 듯했기에, 그녀가 2황비의 속을 긁는 걸 즐겁게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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