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동안 이런 식으로 킬리안이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말을 한 번씩 툭툭 내뱉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피차 반은 장난으로 하는 소리란 걸 알아서 나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난 나한테만 맹목적인 사람이 좋거든.”
킬리안이라면 여느 때처럼 매끄럽게 웃는 얼굴로 내 말을 받아넘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킬리안의 눈이 평소보다 살짝 굳은 것 같았다.
“1황녀님, 저는…….”
“언니!”
그러다 킬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을 때, 유디트가 다가왔다.
“언니, 저 잠깐 아래 관중석에……. 아, 다른 분하고 얘기 중이셨군요. 죄송해요.”
“아니야, 이제 막 인사 끝난 참이었어.”
어째서인지 흥분해서 뛰어오던 유디트가 내 앞에 있는 킬리안을 보고 주춤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소란을 떤 게 창피한 것 같았다.
킬리안이 먼저 유디트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4황녀님.”
“네, 안녕하세요, 베른하르트 소공작님.”
마찬가지로 짧은 인사를 되돌린 유디트가 발뒤꿈치를 들고 내 귀에 소곤거렸다.
“저 잠깐 관중석에 다녀와도 될까요? 우승자가 발표되어서 돈을 준대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 얼굴 홍조는 그래서 생긴 거였나? 어쩐지 들뜬 얼굴이더라.
“네가 직접 가면 너무 눈에 띌 거야. 시종을 보내는 게 좋겠다.”
게다가 최종 배당률을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1회전에서부터 걸었으면 돈이 많이 불어났을 테니, 어차피 유디트 혼자서는 그걸 다 들고 오기 힘들 것이다.
유디트는 신이 난 듯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종을 찾아 또 바쁘게 움직이는 유디트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리나를 그녀에게 보냈다.
왠지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아서 혼자 보내기 불안하단 말이지.
“역시 웃는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1황녀님.”
그때 내 앞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까지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킬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특히 4황녀님을 보실 때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킬리안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한순간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하필 정면에 서 있던 킬리안도 그걸 봤는지 그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데 내 표정이 정말 많이 이상했는지, 킬리안이 드물게도 당혹감과 곤혹스러움이 번진 얼굴을 한 채로 서둘러 덧붙였다.
“1황녀님. 나쁜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지금이 더 보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혹시 오해하셨다면…….”
킬리안의 말은 내 한 귀로 흘려 지나갔다. 하지만 어느새 굳은 얼굴은 다시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킬리안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후, 후작님!”
아직 무구를 채 벗지도 못한 윌슨 파벨라가 쥬논 그레이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 왔다.
쥬논 그레이엄은 그를 무시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가며 입안으로 끊임없이 욕설을 씹어 삼켰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경기장에서 보았던 광경이 연거푸 반복해 떠오르고 있었다.
우승자의 권리로 1황녀에게 검을 바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던 글렌 라스너의 아들놈.
그리고 여느 때처럼 오만하게 웃으며 자신을 깔보던 1황녀.
그 두 사람을 생각하자 속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레이엄 후작은 거칠게 문을 닫고 마차에 올랐다.
“후작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뒤로 겨우 따라붙은 윌슨이 막 출발하려던 마차에 다급히 매달렸다.
그는 결승전에서 부상까지 입어 팔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후작님! 반드시 우승했어야 했는데, 절대 제 실력이 그놈보다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한순간 방심해서 실수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시끄럽다! 어디서 감히 내 앞에 그 낯짝을 들이미는 것이냐?”
변명하는 윌슨에게 더 진노한 그레이엄 후작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너는 내게 수치심을 주었다. 내가 분명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누누이 말했었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후, 후작님…….”
“그러니 파벨라 가문과 네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굳이 내가 입 아프게 직접 말하지는 않겠다.”
쥬논 그레이엄은 윌슨에게 서슬 퍼렇게 일갈한 뒤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윌슨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안 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쥬논 그레이엄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세게 악 물었다.
그동안에는 1황녀 아르벨라가 무슨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자신을 감시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또 아르벨라가 개발한 빌어먹을 마법 해체식 때문에 마법적 흔적을 남기게 되면 꼬리가 잡힐 위험이 있어, 전보다 은밀히 그녀를 노리는 것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쥬논 그레이엄의 누이인 2황비 카타리나라도 도움을 주면 좋으련만, 그녀는 생긴 것답지 않게 마음이 약해 그의 계획에 쉽게 동참해 주지 않았다.
‘젠장, 준비 중인 일에 빨리 진척이 생기면 좋으련만.’
그 와중에 아르벨라를 상대하려 남몰래 은밀히 진행 중이던 일도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어, 그레이엄 후작은 속이 끓었다.
그는 열이 오른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역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눈앞에서 자꾸만 거슬리게 구는 것들에게 어떻게든 빨리 세상의 쓴맛을 보여 줘야만 했다.
“숲으로 가자! 오늘은 다들 할당량의 두 배는 모아 와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후작은 아르벨라를 나락으로 빠트릴 실험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마부석에 앉은 부하를 닦달했다.
* * *
“제라드, 기분이 어때?”
그날 밤, 아르벨라가 제라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르벨라는 건국 기념 대회의 우승자를 위해 열린 파티를 위해 의상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요즘 균열이 발생하는 일이 많아지며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한 아르벨라도 물론 눈에 띄었지만, 오늘처럼 연회에 걸맞은 차림을 한 모습도 또 다른 의미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건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제라드는 황실 소속 기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번듯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1황녀의 종속 기사로 아르벨라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적당한 품위 유지 정도는 했었다.
아르벨라의 기사라면 누구에게도 얕보여서는 안 된다며 시녀인 마리나가 하도 열성적인 의견을 토해낸 탓에 제라드는 어딜 가도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를 위해 준비된 제복은 파티의 주인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였다.
아르벨라의 명을 받은 황실 재단사들이 심혈을 기울인 덕에 오늘 제라드가 입은 제복은 그의 장점만 최대치로 두드러져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확실히 이 모습을 보면 4년 전 숲에서 엉망이 된 모습으로 늑대들에게 쫓기고 있던 소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질문을 받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벨라와 제라드에게 다가와 오늘 대회에 대한 축하와 감상을 떠들던 사람들이었다.
“이상하네요.”
제라드는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가장 이상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전과 달리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말을 걸고 호의를 보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이상했다.
물론 아직 그를 꺼리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 만난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아르벨라의 명령대로 대회에 나가 그럴듯한 성과를 하나 냈을 뿐인데, 그 하나만으로도 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하기야 이건 그냥 대회가 아니라 우승자에게 황실에 들어올 기회까지 부여하는 큰 규모의 대회이긴 했다.
또 지금까지 제라드에게는 1황녀의 자비로 거두어진 이단자 출신의 종속 기사라는 꼬리표만 붙어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제라드라는 사람 자체는 변한 것이 없되, 그를 감싸고 있는 포장지는 훨씬 깨끗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이 화려한 제복처럼.
“이상하겠지. 그래도 지금을 즐겨. 너도 금방 적응될 거야.”
옅은 웃음이 서린 아르벨라의 목소리가 은은한 음악 소리에 섞여 귓가에 울렸다.
“자, 오늘의 승리자를 위한 선물.”
다음 순간 아르벨라가 내민 건 작은 기포가 서린 유리잔이었다.
제라드의 입매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카뮬리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군요.”
마력 회로를 살짝 건드려 기분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는 미성년자들의 음료였다.
종종 아르벨라가 파티에서 이것을 마시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되어 돌아오던 기억이 제라드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르벨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라드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이건 진짜 술이야. 너나 나나, 이제 준성인이잖아.”
성인이면 성인이고 미성년이면 미성년이지, 준성인은 또 뭐란 말인가.
“자, 받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이 정도 일탈은 해도 돼.”
하지만 아르벨라가 재미있는 장난을 치듯이 짓궂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그녀가 내민 것을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제라드는 결국 아르벨라가 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옆에 서 있는 아르벨라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까만 해도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더니, 그래도 지금은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연회장 안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묘하게 건조한 감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을 목격한 제라드의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