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 *
“이제 결승전이네! 우리끼리도 내기할래?”
“내기 소리는 꺼내지도 마. 1차전 때 아래 관중석에서 우승 후보자 두고 판돈 거는 걸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나도 꼈는데 지금 완전히 망했어.”
“난 그거 그레이엄 후작이 후원하는 기사에 걸었는데, 우승해도 거의 본전에 가깝더라.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걸어 볼걸.”
아르벨라는 황녀와 황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1차전 때부터 건 사람은 세 명밖에 없어서 만약 우승까지 하면 배당률이 역대 최고일 거래.”
‘그 선견지명이 있는 한 사람이 바로 나란다.’
“저기, 언니.”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유디트가 아르벨라에게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지금 다른 황녀, 황자님들이 말씀하신 우승 후보자를 점치는 내기 도박이요……. 사실은 저도 1차전 때부터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걸었는데요.”
만약 그때 아르벨라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품위 없이 입 밖으로 찻물을 내뿜었을지도 몰랐다.
“뭐?”
그녀는 당황해서 유디트를 쳐다보았다.
“아니, 뭘 보고 그렇게 일찍부터 제, 아니, 검은 갑주의 기사한테 돈을 건 거야?”
“사실은 대회 전에 잠깐 세면실에 가려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우연히 마주쳤는데 저한테 길을 알려 줘서……. 그래서 한번 재미 삼아 걸어 봤어요.”
유디트가 쑥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곧 그녀는 아르벨라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돈 많이 받으면 저도 언니가 갖고 싶으신 거 다 사 드릴게요!”
그래 봤자 유디트가 내기에 걸고 또 돌려받을 돈은 아르벨라의 입장에서는 어린애 코 묻은 돈 수준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르벨라가 누구인데, 갖고 싶은 물건도 못 사서 어린 황녀의 도움을 받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해맑게 들떠 있는 유디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르벨라는 생각한 대로 유디트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마구 헝클여 줬다.
클로에가 옆에서 질투하며 왁왁거려서 그녀의 머리도 똑같이 쓰다듬어 줘야 했던 건 덤이었다.
“이제부터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우승 후보자 두 명이 경기장에 나왔다.
“그럼 최종 경기를 앞둔 우승 후보자들의 각오와 소감을 한마디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윌슨 파벨라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경기 때마다 보인 허세 섞인 모습으로 봐서, 결승전에서도 한껏 잘난 척하며 거드름을 피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진지한 태도였다.
이후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가 처음으로 투구를 벗었다.
아르벨라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흔들어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유명한 검은 갑주의 기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 뭐야……?! 저, 저, 저! 저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언니 기사였어?!”
그때 클로에가 놀라서 외친 소리가 황족 관중석에 울렸다.
유디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르벨라를 돌아봤다.
제라드를 알아본 황족과 귀족들이 크게 술렁였다.
예전에는 제라드를 향한 그들의 눈에 담긴 게 오로지 부정적인 감정뿐이었다면, 지금은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충격과 놀라움이었다.
제라드의 성장에 놀라는 귀족들도 있었고, 우승 가능성을 재보듯이 제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도박꾼들도 있었다.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황실 시녀들처럼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보였다.
심지어 귀족석에 앉아 있던 쥬논 그레이엄은 제라드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르벨라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긋하게 즐겼다.
‘뭐, 우리 애가 잘 크긴 했지. 다 이 황녀님이 잘 키워 준 덕분 아니겠어?’
인재를 육성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로에의 말대로 이 대회가 바로 제라드의 첫 공식적인 출전이었다. 그를 처음으로 온 제국민들 앞에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제라드를 처음 거둔 지 4년이 지났으니 슬슬 때가 되었다.
아무리 잠깐 가지고 있는 기간 한정 소유물이라 해도 아르벨라의 것은 모두 최고여야만 했다.
이는 제라드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오늘 이후로 그를 무작정 무시하며 헐뜯는 자들은 자취를 감출 터였으니.
이내 제라드가 아르벨라를 보며 기사의 맹세를 할 때처럼 검을 들어올렸다.
“제 주인이신 1황녀님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시작 신호가 울리자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챙강!
곧 거대하게 울린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 * *
“1황녀님, 축하드립니다!”
“1황녀님의 종속 기사는 정말 강하더군요.”
“설마 우승까지 하다니, 역시 1황녀님이 직접 거두신 기사답습니다.”
대회가 끝난 뒤,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내게 쏟아지는 축하 인사를 들었다.
조금 전에는 황제까지 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네 종속 기사가 생각보다 쓸 만하더구나.’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언니, 설마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언니의 종속 기사일 줄 몰랐어요.”
유디트가 아직도 신기하다는 듯이 나한테 말했다.
‘그러게, 나도 아까 네가 제라드에게 돈을 걸었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혹시 원래 유디트의 기사가 될 운명이던 놈이라 뭔가를 느낀 건 아닌지 한순간 의구심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저도요, 황녀님. 어떻게 저한테까지 이렇게 감쪽같이 숨기시고…….”
뒤에서 마리나가 허탈한 듯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갑주의 기사가 제라드라는 걸 알게 되니 정신적 타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닌 것 같았다.
“아, 그레이엄 후작!”
그러다 나는 표정 관리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레이엄 후작을 발견했다.
이럴 때는 외롭게 서 있는 후작을 혼자 둘 수 없지.
“후작이 후원한다는 그 기사 말이야. 이번에는 안타깝게 되었어. 후작이 그렇게 우승을 장담했었는데 말이야.”
나는 안타깝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레이엄 후작의 속을 긁어 줬다.
“물론 그 기사의 실력도 나쁘진 않았지만 내 기사가 너무 강한 걸 어쩌겠어? 후작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예…….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는 그레이엄 후작도 타격이 컸는지, 이를 악물며 가까스로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죽하면 마지막 말은 거의 ‘축하드릅느드.’로 들렸을 정도였다.
그레이엄 후작은 이 자리가 몹시 수치스러운 듯, 곧바로 옷자락을 거칠게 휘날리면서 경기장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한테 자기 사람을 밀어 넣으려 하다니. 백 년은 이르지.’
사실 그레이엄 후작은 제라드가 검은 갑주의 기사인 걸 모르고 그동안 온갖 치사한 짓거리를 다 시도했다.
경기 전에 이상한 약을 탄 물을 먹이려 한다든가, 우연을 가장해 부상을 입히려 한다든가, 대기실에서 몰래 무구를 망가뜨리려 한다든가.
‘너무 전형적인 악역다워서 할 말이 없는 수법들이었지.’
“1황녀님! 1황녀님~!”
그때, 귀에 익숙한 팔랑거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비 몬테라였다.
“종속 기사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 실력 있는 자를 거두어 기사로 삼으시다니, 역시 1황녀님의 안목이 기가 막히십니다!”
바비 몬테라는 4년이 지난 요즘도 이렇게 여전히 내 뒤를 따라다니며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고 있었다.
전에 그레이엄 후작이 바비 몬테라와 나를 엮으려 한 이후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내게 편지를 보내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바비 몬테라를 마냥 무시하기 좀 미안해서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고마워, 몬테라 영식. 내 기사가 들으면 기뻐하겠군.”
“실은 저도 검은 갑주의 기사를 강력한 우승 후보로 생각해 관중석에서 하는 내기에 소박하게나마 판돈도 걸었었거든요!”
“아, 그래? 혹시 1회전에서부터 걸었어?”
혹시 나와 유디트를 제외하고 1회전에서 제라드에게 판돈을 건 다른 한 사람이 바비 몬테라인가 싶어서 물었다.
하지만 내 물음에 그는 어색한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준결승에서부터…….”
“그랬군…….”
에라이, 그건 거의 막바지에 건 거잖아.
나는 바비 몬테라에게 흥미를 잃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제라드는 경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또 다른 수려한 미청년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1황녀님.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인사드립니다.”
스무 살이 된 킬리안 베른하르트는 여전히 흰 눈송이 같은 은빛 머리칼과 빨려 들 것만 같은 보라색 눈이 어쩌구…… 였다.
전에도 수려했으나 이제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완성형 외모를 갖게 된 킬리안이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평소라면 그를 보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슬쩍 찡그리고도 남았겠지만, 오늘의 나는 마음이 넓었다.
“소공작도 오늘 경기를 관전하러 왔었군.”
그래서 그냥 오늘만큼은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킬리안에게 인사해 주었다.
“예, 1황녀님의 종속 기사의 경기가 상당히 인상 깊더군요.”
“그렇지? 내가 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어.”
그런데 왠지 한순간, 킬리안의 미소가 좀 삐딱해진 것 같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그 종속 기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의아하게 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난 내 것은 특별히 아끼는 주의거든.”
“그러십니까. 그 종속 기사가 부럽군요.”
그때 킬리안이 또 미묘한 말을 했다.
“그런데 저도 카뮬리타 황실에 충성을 바친 가신이니, 1황녀님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의 보라색 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