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71화 (87/203)

71화

* * *

준결승전을 앞둔 대회 참가자들의 대기실은 시끌벅적했다.

“거기! 다들 비켜, 비켜!”

“그레이엄 후작가의 윌슨 님이 오셨다!”

“윌슨 님이 앉으시게 어서 자리를 비우지 못해!”

그때 한 무리가 나타나 유독 거드름을 피우며 소란을 떨었다. 1차전에서부터 시끄러웠던 그레이엄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가운데 있는 잘생긴 외모의 남자는 그중 유일하게 준결승까지 올라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도 거론되는 윌슨 파벨라였다.

그가 온몸에 두른 휘황찬란한 무구에 새겨진 그레이엄 후작가의 쌍두 늑대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윌슨 님, 여기 시원한 음료입니다. 그리고 손목을 주물러 드릴까요?”

“어어, 그래. 거기 좀 살살 주물러 봐라.”

윌슨은 옆에서 건네주는 음료를 마시고 안마를 받으며 느긋하게 대기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들은 다른 때와 달리 사람들이 잽싸게 길을 비키지 않고 여전히 대기실 앞에서 미어터질 듯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을 구겼다.

“어이, 거기! 길 막지 말고 비키라는 말 안 들려?”

그제야 윌슨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앗! 야야, 윌슨 파벨라 왔어.”

“저 녀석 또 시작이네. 그레이엄 후작가에서 지원을 받으면 다인가?”

“그냥 저쪽으로 가자. 아까도 복도에서 엄청 시비 걸고 다니던데.”

윌슨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즐겼다.

그래 봤자 가문, 능력, 외모, 어느 것 하나 자신에게 대지 못할 패배자들의 눈물 젖은 하모니라고 생각하면, 저런 소리들은 즐겁기만 했다.

“오늘따라 대기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아?”

“준결승전을 앞두고 다들 윌슨 님을 보러 왔나 봅니다.”

윌슨을 따르는 기사들이 그에게 열심히 아부했다.

그에 윌슨의 어깨가 으쓱거리려던 찰나, 갑자기 뒤쪽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얘기 들었어? 지금 대기실에 검은 갑주의 기사가 있는데 드디어 투구를 벗었대!”

그 순간 윌슨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검은 갑주의 기사가 얼굴을 드러냈어?’

건국 기념 검술 대회에 혜성처럼 나타나 단번에 유망주로 떠오른 검은 갑주의 기사는 결승에서 윌슨과 맞붙을 것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참가자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기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뒤쪽에 나타난 윌슨을 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대기실 안쪽을 훔쳐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저리 비켜! 당장 내 앞에서 꺼지지 못해?!”

윌슨은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보호대를 팔에 착용 중인 남자를 발견했다.

짙붉은 머리칼이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차분하고 냉랭한 인상의 얼굴이 생각과 달리 젊어 보였다.

저 정도면 아직 성인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못내 믿기가 어려워 혹시 사람들이 비슷한 검은 갑주를 입은 사람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옆에 놓인 무기를 보면 그 유명한 검은 갑주의 기사가 확실했다.

“응? 잠깐. 그런데 저 얼굴은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러다 불현듯 뇌리를 스친 깨달음에 윌슨은 경악해서 눈앞에 있는 청년을 손가락질했다.

“너, 설마 1황녀님의 기사?!”

귀족 출신 중에 1황녀의 종속 기사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드물었던 탓에, 당연히 윌슨 역시 소문이 무성했던 제라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라드를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기에, 윌슨은 큰 충격을 느끼며 그를 샅샅이 뜯어봤다.

그리고 곧바로 기분이 나빠져 얼굴을 왕창 구기고 말았다.

‘뭐야, 1황녀의 동정심으로 기사가 된 이단자 출신이라고 해서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쓸 만해 보이잖아?’

분명 정식으로 검을 잡은 건 1황녀의 기사가 된 직후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몸의 균형이 굉장히 잘 잡혀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격도 좋은 것 같았고, 몸에 붙은 게 죄다 실용적인 근육인 데다 양질적으로도 훌륭한 걸 보면, 의외로 신체 단련도 꽤 오래 한 듯했다.

직접 대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자신보다 어깨도 더 넓고 키도 클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언뜻 본 옆얼굴이 자신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 부친인 라스너 백작도 소문난 미남이었다고 했지.’

윌슨은 자신을 후원하는 그레이엄 후작의 명으로 오늘 대회에서 우승하면 1황녀 아르벨라의 호위 기사 자리를 꿰차려 생각하고 있었다.

윌슨도 그 아르벨라 황녀의 옆에 어울리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래 봬도 어릴 때부터 고향인 남부에서 검술 천재 소리를 듣던 몸이었다.

그러니 카뮬리타의 최강 마법사인 아르벨라의 명성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또 외모도 남부 최고의 미남으로 이름 높던 자신이니, 아르벨라의 화려한 미모와도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니 어쩌다 운 좋게 1황녀의 은혜로 기사 자리를 꿰찬 쭉정이쯤은 가볍게 비웃으며 걷어차 주려고 했는데…….

윌슨은 괜히 자존심이 좀 상해서 제라드를 위아래로 훑으면서 이죽거렸다.

“하, 네가 검은 갑주의 기사였다니 놀랍긴 하다만. 뭐, 가까이에서 보니 듣던 대로 얼굴 하나는 반반한데. 1황녀님이 종속 기사를 외모로 골랐다는 게 정말인가 보지?”

그러자 윌슨이 대기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그를 무시하던 제라드가 처음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서늘한 눈빛을 받은 윌슨과 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묘한 압박감에 움찔했다.

“네놈……. 눈빛이 왜 이렇게 시건방져?”

곧바로 윌슨이 발끈했다.

그는 비록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저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기세로 밀렸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설마 준결승까지 운 좋게 올라왔다고 이 윌슨 님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정식으로 1황녀님의 기사로 발탁되면 네 손윗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제일 먼저 네놈 정신 교육부터 시켜 주마.”

“마, 맞습니다, 윌슨 님! 저런 건방진 놈은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발끈한 윌슨이 제라드에게 엄포를 놓자, 뒤의 기사들이 서둘러 맞장구쳤다.

“그동안 직책에 어울리지도 않는 종속 기사 놈 때문에 1황녀님의 명성에 이만저만 손상이 간 게 아니야. 이제부터 1황녀님의 명예는 내가 지킬 테니 넌 죽은 것처럼 숨만 쉬고 살아. 알았어?”

“윌슨 님 말씀이 다 옳으십니다!”

그때 마지막 무구를 몸에 찬 제라드가 윌슨이 서 있는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가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다가오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기이하게도, 방금까지만 해도 일부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짐승이 사냥을 앞두고 몸을 거대하게 부풀려 갑자기 존재감이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윌슨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예상대로 제라드는 윌슨보다 키가 컸다.

싸늘한 은회색 눈을 내리깐 제라드가 이내 입술을 열어 그 눈빛보다 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미련한 입으로 1황녀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뭐? 미, 미련? 이게 어디서 감히……!”

“너는 네가 주인으로 섬기고자 하는 1황녀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모양인데.”

발끈하는 윌슨을 지나치기 직전, 제라드의 입술이 조소를 머금으며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1황녀님이라면 지금 네 말을 듣고 감격하는 게 아니라, 네까짓 게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감히 내 명예를 나눠 지려 하느냐며 비웃으셨을 거다.”

제라드가 아는 아르벨라라면, 자신의 명예를 결코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테니까.

제라드는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거리는 윌슨을 무시한 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 *

잠시 후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비들이 경기장에 도착해 대회가 시작되었다.

“검은 갑주의 기사다!”

“우와아아아!”

첫 번째 준결승 시합에는 이번 대회 내내 관중석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검은 갑주의 기사가 나왔다.

아르벨라는 느긋이 차를 마시며 시합을 관전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두 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검을 부딪쳤다.

챙강! 챙!

사실 아르벨라는 검술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음량 증폭기를 통해 해설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어도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첫 번째 준결승전의 결과는 그녀가 찻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나왔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의 승리에 관중석에는 또 한차례 열기가 들썩였다.

검술에 일가견이 없는 문외한이 보았을 때도, 까만 잔상을 남기며 빛처럼 움직이는 검은 갑주의 기사는 실력이 굉장해 보였다.

아르벨라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두 번째 준결승 시합이 끝난 후 결정된 또 한 명의 결승 진출자는 그레이엄 후작의 후원을 받는 윌슨 파벨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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