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70화 (86/203)

70화

* * *

“이야. 아르벨라, 넌 여전히 인기가 엄청나네. 아니다, 전보다 더 대단한 것 같은데?”

황족들의 관중석에 올라오자마자 1황자 라미엘이 가장 먼저 아르벨라를 반겼다.

라미엘은 열여덟 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 나태와 색욕의 화신이 아마 이렇게 생겼을까 싶었다.

라미엘의 긴 머리는 꽃과 보석으로 아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게 또 비웃어 주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는 피를 보는 것을 싫어했지만, 오늘은 대회의 결승전까지 있는 날이라 관중석에 나온 것 같았다.

그러다 라미엘의 시선이 아르벨라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오늘은 그 종속 기사도 옆에 달고 있구나.”

제라드의 싸늘한 시선도 라미엘을 향했다.

전에 아르벨라가 경고했던 이후로 라미엘이 또 제라드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여전히 그를 마뜩잖아하는 눈치였다.

물론 아르벨라는 라미엘을 지나치며 딱 한마디만 했다.

“네 거 아니니까 관심 꺼.”

라미엘은 어련하겠냐는 듯이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고 웃었다.

“앗, 아르벨라 언니! 어서 와!”

옆에 있던 사람과 티격태격하는 것 같던 클로에도 아르벨라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클로에, 먼저 와 있었구나.”

클로에도 아르벨라처럼 단발을 하고 있었다.

아르벨라의 짧은 머리칼은 카뮬리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 된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그녀를 별종이라 여기던 황족들 중에도 하나둘씩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타나는 사람이 생겼다.

“유디트랑 같이 놀고 있었어?”

아르벨라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클로에와 티격태격하고 있던 다른 소녀에게 향했다.

“뭐, 놀았다기보다는…….”

“네, 언니! 2황녀님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클로에는 떨떠름하게 반응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해맑은 긍정의 답이 튀어나왔다.

4황녀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활짝 피어난 민들레 꽃처럼 어여뻐진 유디트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자리는 더 이상 말석이 아니었다.

아르벨라가 늘 유디트를 옆에 달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는 아르벨라의 옆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르벨라의 오른쪽 자리는 클로에가, 왼쪽 자리는 유디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라미엘은 튀고 싶어 하는 성격답게 입구 쪽에 화려한 꽃장식을 한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혼자 따로 앉았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중이었다.

“언니, 언니! 내 머리 좀 볼래?”

아르벨라가 착석한 뒤 클로에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어때? 벨라 언니랑 비슷한 머리 장식으로 맞춰 봤어. 언니는 오늘 의상이 흰색에 금색, 붉은색 포인트잖아. 그래서 난 반대로 파란색……으로 하려다가 내 머리 색 때문에 눈에 안 띄어서 금색으로 강조해 봤어!”

클로에는 아르벨라보다는 긴, 쇄골까지 닿는 단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르벨라의 의상 스타일을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르벨라는 그런 클로에가 귀찮아서 대개 무시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원하는 대로 정보를 주기도 했다.

“응, 그래. 괜찮네, 잘 어울리네.”

아르벨라는 시녀가 가져다준 라임 차로 목을 축이며 클로에가 바라는 대로 대충 칭찬해 줬다.

클로에는 자신의 머리칼이 마음에 안 드는 듯이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투덜거렸다.

“나도 언니처럼 화사한 금발이면 좋았을 텐데.”

“네 머리도 바다색 같아서 이런 날씨에는 특히 시원해 보이고 좋은데 뭐.”

그러다 아르벨라가 관중석 아래를 내려다보며 툭 던진 말에 클로에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정작 아르벨라는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느라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인 듯했지만 말이다.

뒤에 서 있던 마리나는 참 죄 많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제라드도 자각 없이 사람을 홀리는 아르벨라의 모습을 한두 해 봐 온 게 아님에도 이럴 때마다 묘한 눈빛을 띨 수밖에 없었다.

“언니도 참! 나한테는 은근히 그런 쑥스러운 말을 잘한다니까.”

클로에가 이번에는 머리카락 대신 몸을 배배 꼬며 좋아했다.

그러다 그녀는 아르벨라의 왼쪽에 앉은 유디트를 향해 대뜸 비웃음을 날렸다.

“유디트, 넌 긴 머리라 어떻게 해도 벨라 언니랑 비슷한 느낌이 안 나겠네. 안됐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좋아 보이는 아르벨라와 클로에의 모습을 은근히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유디트가 찻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넌 언니랑 닮고 싶다고 하면서도 아직 머리카락을 자를 용기는 없나 보지? 흥, 아직 어리기는.”

그래봤자 클로에와 유디트는 고작 한 살 차이였다.

게다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클로에는 예전에 자신도 차마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못하고 안으로 말아 넣어 단발 흉내만 내던 것을 잊은 듯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클로에의 말에 초조하게 입술을 옴짝거리다가, 이내 할 말이 생각난 듯이 눈을 자신만만하게 떴다.

“어, 언니가…… 제 긴 머리가 좋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자르지 않고 기르기로 했어요.”

“뭐……?! 언니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얘네가 지금 뭘 하는 거야.

한편 귀족석에서부터 다가오는 그레이엄 후작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벨라도 그때쯤 옆쪽의 소란을 알아차렸다.

확실히 유디트에게 저 비슷한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그냥 얼마 전에 유디트가 ‘저어, 언니. 요즘 카뮬리타에 짧은 머리가 유행하고 있대요. 혹시 저도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생각하면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묻기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유디트까지 머리를 자르면, 클로에까지 합해서 세 명이나 비슷한 모습으로 다니게 된다.

“글쎄, 네가 원한다면 잘라도 괜찮겠지만 꼭 유행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난 지금 그대로의 네 모습도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는데, 지금 유디트의 말을 들어 보니 왠지 그때의 일이 와전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불청객이 어느새 황족들의 관중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클로에, 유디트. 관중석 뒤에 핀 꽃이 아주 예쁘던데. 너희가 한 송이씩 나한테 가져다주지 않을래?”

아르벨라의 뜬금없는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그렇게 예쁜 꽃이야? 언니가 갖고 싶으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도레아!”

눈치 없는 클로에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시녀를 불렀다.

반면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르던 유디트는 아르벨라의 얼굴을 한번 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황녀님은 여기 계세요. 아르벨라 언니는 우리 동생들이 직접 가져다드린 꽃을 갖고 싶으신 것 같으니 제가 다녀올게요.”

“뭐?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우리 동생들이라고 너랑 나를 같이 묶어?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나도 갈 거야! 벨라 언니한테는 내가 제일 예쁜 꽃을 선물해 줄 거라고!”

클로에는 유디트의 도발에 넘어가, 헐레벌떡 관중석의 뒤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그레이엄 후작이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1황녀 전하. 쥬논 그레이엄이 인사드립니다.”

아르벨라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이런, 관람석의 계단도 많던데 굳이 무리해서 힘들게 인사까지 하러 올 줄은 몰랐네, 후작.”

“하하……. 관람석의 계단이 몇 개나 된다고 힘들겠습니까. 게다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방심하는군. 후작도 이제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니니 노파심에 하는 소리인데. 원래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가 버린다는 말이 있는 거 몰라?”

시간이 지나 이제 거의 40줄에 접어든 그레이엄 후작의 나이를 두고 살살 비꼬자, 언제나처럼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던 그의 입꼬리가 굳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후작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제 감정을 능숙하게 숨겼다.

“1황녀님께서 이리도 저를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데…… 오늘 같은 자리에도 저 종속 기사를 데려오셨군요.”

곧 그의 뱀 같은 눈이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에게 닿았다.

아르벨라는 눈에 보이는 도발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내 기사가 내가 가는 곳에 동행한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흠, 아닙니다. 그보다 오늘 준비된 건국 기념 검술 대회의 준결승전에는 저희 그레이엄 후작 가문에서 지원하는 기사도 참가한답니다.”

“아, 그래?”

그레이엄 후작은 그 기사가 자신의 방계 가문 출신이며 황실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큰지, 아르벨라로서는 궁금하지도 않던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래서 오늘 대회에서 우승하면 1황녀님께 검을 바치고 싶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에 아르벨라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의 손도 한순간 움찔거렸다.

그레이엄 후작이 아르벨라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우승자의 청은 절대적이라 황족분들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지요. 그래도 실력 하나는 뛰어나니 1황녀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꽤 자신만만하게 우승을 확신하는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제가 후원하는 기사라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실력도 훌륭하고 생긴 것도 제법 반반하답니다. 데리고 다니시기 부끄럽진 않을 겁니다.”

“그거 기대되는군.”

그레이엄 후작이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로 물러간 뒤, 1황녀가 앉은 자리에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준결승전 참가자는 1층 대기실로 와 주십시오.”

때마침 예정된 시간이 다가와, 참가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마법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벌써 시간이 됐네.”

아르벨라는 여전히 정면을 본 채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제라드.”

“부르셨습니까, 1황녀님.”

“부담 갖지 말고 하던 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1등이나, 우승자나, 뭐 그 정도?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

“어차피 너도 그럴 생각이었겠지만.”

4년의 시간이면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산 사람의 성격 정도는 파악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지금 아르벨라가 하고 있을 생각에는 제라드도 동의했다.

제라드는 그의 주인인 1황녀 아르벨라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복종을 표하며 대답했다.

“반드시 1황녀님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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