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정체는 거의 호랑이 정도 크기의 거대한 검은 마법 생물이었다.
-컹!
나한테 바로 달려들었다면 내가 직접 나섰겠지만 짐승이 노린 건 제라드 쪽이었다.
그 순간 제라드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마력을 두른 검집을 들어서 달려드는 짐승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마법 생물이 멀리 날아갔다.
깨갱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덤불 위에 그대로 널브러진 걸 보니, 아무래도 바로 급소를 맞고 기절한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저거 마다라크잖아?’
몸체가 튼튼해서 마법으로 공격해도 대부분 충격을 흡수해 버리는데 뭐 이렇게 한 방에 기절해?
너무 가볍게 날아가서 다른 짐승인 줄 알았다.
“처리할까요?”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은회색 눈이 내게 조용히 미끄러졌다.
제라드의 입에서 나온 건 짧고 굵은 물음이었다.
내가 그러라고 작은 고갯짓이라도 하면, 당장 내 눈앞에 달려든 저 마법 생물과 사냥터의 관리자, 또 오늘 사냥터에 와서 마법 생물이 흥분해 뛰쳐나오도록 숲을 들쑤신 사람들까지 모두 정리해 버릴 것 같았다.
역시 제라드는 배움이 빨랐다.
누가 보면 꼭 처음부터 기사 제복을 입고 ‘응애!’ 소리 대신 ‘충성!’ 소리를 외치면서 태어난 사람인 줄 알겠네.
어릴 때는 그렇게 야생의 날짐승처럼 굴던 놈이 이제는 이렇게 내 종속 기사로서의 역할을 겉으로나마 잘 숙지하고 꽤 그럴싸하게 이행하는 걸 보자, 새삼스럽게 지나간 세월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숲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때 그레이엄 후작이 미세하게 눈가를 떨면서 말했다.
그는 매우 유감스러워 보였다.
물론 그가 유감스러워하는 건 마법 생물이 나와 제라드를 덮친 것 때문이 아니라, 제라드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마법 생물을 격파한 것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식으로 그레이엄 후작이 나와 제라드를 살짝 건드리려 시도한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데다, 후작도 그걸 알면서 그냥 기분상 깔짝거려 보는 것 같아서 나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있었다.
“위험한 짐승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사냥터의 관리자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아랫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써서 후작의 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봐라! 감히 황녀님께 위협을 가한 저 짐승을 당장 죽여 없애라!”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레이엄 후작을 보다가 이내 싸늘히 미소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루비 박힌 금장 지팡이를 까딱였다.
“됐어. 그러다 숲의 동물들 씨가 마르겠네. 제라드, 그만 가자.”
내가 몸을 돌리자 제라드가 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찬 뒤 나를 따랐다.
“가시는 겁니까? 다음 사냥 때는 1황녀님도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좋겠군요.”
“후작이 그리 원하니 생각해 보지.”
나를 배웅하는 그레이엄 후작을 뒤로한 채 사냥터를 걸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특이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4년 전에 처음으로 그레이엄 후작을 감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틈틈이 그를 지켜봐 왔다. 하지만 크게 덜미가 잡힐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엄 후작은 전처럼 사브리엘인지 사브리나인지 하는 요상한 이름을 대며 클로에를 따로 만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그래도 나도 일단은 후작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도 그냥 내 느낌이 괜히 싸해서 그렇지, 요 몇 년 사이에 그레이엄 후작이 사냥에 재미를 들린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한 의구심은 남아 있었다.
그레이엄 후작이 한번 사냥을 빌미로 숲에 들어갈 때마다 마법 생물과 짐승들의 사체가 수레로 두세 개씩은 채워진다고 했다.
물론 사냥을 즐기는 이들 중에 잡은 짐승을 박제해 수집하거나 사냥감에서 나온 부속물로 물건을 만들거나, 혹은 요리해서 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레이엄 후작도 사냥을 즐기기 시작하며 자신에게 그런 취미가 생겼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최근에 그레이엄 후작이 저택에 가져가는 짐승들의 양은 다소 많았다.
‘그럼 그는 그것들로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나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사냥터를 돌아봤다.
숲에서 왠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18. 아르벨라의 기사
오늘은 오랜만에 황족과 귀족 대부분이 참석하는 카뮬리타의 국가적인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건국제를 맞아 기념으로 열린 마법과 검술 대회였다.
이 행사는 매년 열리는 게 아니라 5년 단위로 개최되었는데, 올해가 바로 그 시기였다.
카뮬리타를 세운 젊은 건국 왕과 그를 도운 조력자들의 용맹한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 하에 만들어진 대회로, 젊은 청년 준걸을 발굴해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18세~22세 사이의 젊은이들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졌다.
원래 대회 초기에는 황실에서 우승자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통 큰 상품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는 여러 가지 내부 사정에 의해 황실 소속 마법사 혹은 기사의 직위를 하사하는 쪽으로 상품이 바뀌었다. 귀한 마도구를 주는 것은 덤이었다.
심지어 전자의 경우는 꽤 선택의 폭이 넓었다.
마법사의 경우는 황실 소속 최고 마법 기관인 백야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사의 경우는 황족 중 한 명을 선택해 그 직속 호위가 되거나, 황실 기사단 중 원하는 곳에 시험 없이 입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정도만으로 굉장히 파격적인 대우로 여겨졌다.
게다가 이 대회는 참가하는 데 신분 제한이 없어, 평민 출신 마법사와 검사들에게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10년 전 우승자는 그때 황실 직속 기사단에 들어가 현재 부단장까지 승진해 있었다.
그러니 다들 제2의 영광을 꿈꾸며 우승에 집착할 만도 했다.
물론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뿐 아니라,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귀족들도 많이 참가하는 추세였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대회의 준결승과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왜들 저렇게 시끄러워?”
황족들을 위한 관중석으로 향하던 아르벨라가 귀족석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뒤에는 최측근 시녀인 마리나와 종속 기사 제라드가 따르고 있었다.
검술 대회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에 멀리서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마리나도 아르벨라를 따라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곧 우승자가 가려지니까 다들 흥분한 거지요. 황녀님도 아시다시피 이런 대회 때는 우승자를 두고 판돈을 거는 것도 성행하잖아요. 게다가 소문을 들어 보니, 특히 이번에는 경우에 따라 배당률이 엄청날 거라고 하던데요?”
“흐음, 그래? 나도 언뜻 들었는데 혹시 오늘 준결승 경기를 하는 그 검은 갑주의 기사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처음에는 다들 이름 한번 들어 본 적 없어서 무시했는데, 불패로 준결승까지 올라오고 인기가 아주 많아졌대요. 더군다나 투구를 써서 얼굴이 코 밑으로만 보이긴 하지만, 마력석에 저장된 근접 영상을 보니 99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초절정 미남일 거라는 의견이 대세라던데…….”
“크흠! 큼.”
순간 아르벨라의 뒤에 서 있던 제라드에게서 사레에 들린 듯한 헛기침 소리가 작게 터져 나왔다.
아르벨라는 픽 웃으면서 다시 관중석의 계단을 올랐다.
“알겠느냐? 오늘 대회에서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
그러다 그녀는 가까운 귀족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압박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었다.
“그동안 널 후원한 우리 가문과 내 명예가 걸려 있으니 혹여 나를 부끄럽게 한다면 그땐 알아서 해라.”
“예!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꼭 격려가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아르벨라는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가문의 명예든 자기 명예든 스스로 지켜야지, 왜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 정도로 하찮은 명예인가 보지?’
“그레이엄 후작이 후원하는 기사도 준결승까지 올랐구나.”
“네,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에요.”
“황실 기사단 자리가 탐나는 상품이긴 한가 보네. 저렇게 다들 목을 매는 걸 보니. 이번 대회의 참가자 수도 어마어마했다고 들었는데.”
“음,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마리나가 심드렁하게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아르벨라를 뒤따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황녀님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듯이 푸념했다.
“제가 듣기로는 황녀님께 당당하게 검을 바치고 싶어서 의욕을 불태우는 청년들도 많다고 하던걸요. 지금도 저 열렬한 시선들이 안 느껴지세요?”
마리나의 말대로였다.
아르벨라가 처음 관중석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방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눈빛에 주변 사람들의 살갗이 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늘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던 아르벨라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날이 눈에 띄는 찬란함을 내뿜는 황녀님을 선망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세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아르벨라는 카뮬리타 최고의 전투 마법사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으니.
그런 만큼 오히려 아르벨라는 그녀의 눈길 한 번만 스쳐도 쉽게 생산되는 추종자들에게 지겨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야박한 황녀님이 아니었다.
아르벨라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듯이 손을 들어올리자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누가 들으면 대회가 시작된 줄 알았을 정도로, 우레 같은 환호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