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사실 나는 제라드의 시선이 좀 찜찜했다.
언젠가부터 이 녀석은 가끔 나를 이런 눈으로 볼 때가 있었는데, 왠지 그게 꼭 내 병에 대한 뭔가를 눈치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긴 원래 감이 좋은 녀석이기도 했고, 또 미우나 고우나 4년이나 옆에 붙어 있었으니 내게 이상함을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오래 관찰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먼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그럼 난 먼저 가 볼 테니 수고해.”
하지만 이제는 소년보다 청년에 가깝게 되어 더 이상 귀엽지 않게 된 내 종속 기사 제라드는 기어이 나를 혼자 보내지 않고 뒤를 따라왔다.
“가시는 곳까지 따르겠습니다.”
뒤에서 들린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몸을 반쯤 돌려서 제라드를 쳐다봤다.
“제라드.”
방금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내가 혼자 가겠다고 말했잖아. 꼭 명령이란 말을 써야 알아듣겠어?”
달보다 밝게 빛나고 있는 은회색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곧 제라드가 나를 보던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가 건방졌습니다.”
제라드는 지난 4년 동안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예의 바른 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말은 저렇게 해도 실제로 반성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굴종을 모르는 저 천성이 어디 가랴.
그동안 황궁 예법을 착실히 몸에 익혀 어떨 때 주인의 비위를 맞춰야 할지 알고 있긴 하지만 단지 그뿐,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말이 정말 건방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내 앞에 조아려진 머리를 탐탁지 않게 내려다봤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날카롭게 말해 놓고, 이 또한 수상한 반응이었나 싶어 뒤늦게 경계심이 들었던 탓이다.
“참, 이럴 필요 없는데 너도 가끔은 귀찮게 군다니까. 정 따라오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결국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익숙해진 발소리가 따랐다.
조용한 밤공기 속에 울리는 그와 내 발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저 녀석이 바라는 대로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귀엽지도 않은 게.”
나도 모르게 툭 내뱉듯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또 공손함을 가장한 발칙한 대꾸가 이어졌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 나이에 귀여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요즘 시녀들한테 멋지단 말 좀 듣는다고 자신감이 생겼나 보지?”
제라드는 3년 전부터 생활 반경을 넓혀, 롬벨 경을 따라 황실 기사들과 실전 대련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이단자 출신인 제라드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3년이나 부대끼다 보니 조금씩 미운 정이 든 사람들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제라드가 1황녀궁 밖으로 나올 때마다 그를 힐끔거리는 어린 시녀들이 자주 보였다.
대련하는 제라드의 모습을 상기된 얼굴로 몰래 훔쳐보면서 저들끼리 꺅꺅거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꼭 시녀들뿐만이 아니었다. 내 어린 동생들도 이제 제라드를 볼 때면 깜짝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으니까.
‘예전에는 제라드를 마냥 경멸하던 클로에의 눈빛도 언젠가부터 전에 비할 수 없이 누그러졌을 정도이니 뭐.’
“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제게는 의미 없는 일이지만…….”
살짝 놀려 주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제라드는 들뜨거나 쑥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황녀님의 뒤에 서기에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라드를 놀려 주려다가 괜히 나만 기분이 미묘해졌다.
잠시 후 침실에 거의 다다라 제라드를 돌아봤다.
“제라드. 손 내밀어 봐.”
내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제라드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를 향해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대로 따라왔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빨리 손 내밀어 봐.”
재차 독촉하자, 제라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지못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잡고 마력을 움직여 그의 안에 밀어 넣었다. 맞잡은 제라드의 손끝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라드에게는 내 종속 기사인 그의 상태를 가끔 점검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제물의 온전함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제라드의 마력이 여전히 내 마력과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안심했다.
또 요즘은 특히나 전보다 자주 제라드의 마력을 확인하곤 했는데, 그건 사실 내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녀석은 내 제물이고, 내가 금단술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때가 되면 반드시 내 옆을 떠날 녀석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 진심을 꾸며냈어도, 나는 이 녀석을 기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된 거짓말에 가끔 나조차 헷갈리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이제 됐어. 침실은 바로 이 앞이니까 더 따라올 필요 없어.”
잡고 있던 제라드의 손을 놓고 웃었다.
“너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
장난스럽게 뒷걸음질 치는 동안 역시 제라드는 나를 더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바늘 하나 찔러 들 틈이 없을 것 같은 팽팽한 공기가 제라드의 주위에 맴도는 것 같았다.
제라드는 내가 이런 식으로 마력을 이용해 그의 속을 헤집어대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내가 잡았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고, 가라앉은 눈으로 멀어지는 나를 씹어 삼킬 것처럼 주시하고 있었다.
꼭 언제 눈앞에 있는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을지 가늠하는 육식 동물 같았다.
이럴 때의 제라드는 몇 년 전의 소년 시절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아무리 매끄러운 광택이 나게 표면을 갈고 닦아 놨어도, 그 거친 본질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몇 번이나 그랬듯이, 그것을 내 손으로 예쁘게 깨부숴 주고 싶은 마음에 갈등을 느끼며 제라드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 * *
제법 후덥지근한 낮 시간임에도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안녕하신가, 후작?”
“1황녀님?”
나를 보자마자 그레이엄 후작이 흠칫했다.
밝은 햇볕 아래에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론 금방 얼굴을 다시 펴긴 했지만,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던 걸 이미 다 봤다.
“1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레이엄 후작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서둘러 인사했다. 그레이엄 후작도 표정 관리를 하며 내게 다가왔다.
“말씀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연히 이 앞을 지나다가 후작이 보여서 와 봤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내가 이 근처를 그냥 우연히 지나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후작은 또 사냥을 하러 나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요 몇 년 동안 사냥에 부쩍 재미를 들린 것 같던데.”
가늘게 웃으며 꺼낸 말에 그레이엄 후작이 입매를 꿈틀거렸다.
그가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일부는 사냥터 한구석에 놓인 수레를 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수레에는 방금 사냥한 것 같은 짐승들의 사체가 실려 있었다.
“예, 주변에 사냥을 취미로 둔 귀족들이 많아 종종 동행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맛을 알겠더군요. 1황녀님도 사냥을 즐기시지요?”
“나야 사교 목적이지. 원래 피를 보는 건 그리 즐기지 않아.”
내 겸손한 말에 그레이엄 후작이 ‘퍽이나 그러시겠군.’ 하는 얼굴로 삐뚤게 웃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내 뒤에 선 제라드에게 닿았다.
“이제는 그 종속 기사도 곧잘 데리고 다니시는군요. 아예 직속 호위로 삼으실 예정입니까?”
그레이엄 후작의 말대로 작년부터는 가끔 제라드를 데리고 외출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험적으로 동행을 제안했는데, 제라드는 예전처럼 기회를 엿봐서 도망치려 하거나 허튼짓을 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순진한 녀석이라 그런지, 5년 안에 그가 사라지면 그 책임을 내가 대신 져야 해서 곤란하다는 말을 아직 그대로 믿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종종 그를 데리고 궁 밖에 나오기도 했다.
아직은 공식적인 자리에 제라드와 매번 동행하는 건 아니었지만, 서서히 롬벨 경과 외출하는 비중을 줄이고 대신 제라드를 수행원으로 두는 횟수를 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건데, 역시 그레이엄 후작은 제라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제라드에 대해 입에 올릴 때마다 말투나 눈빛이 은근히 날카로워서 눈치를 챘었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더 노골적이었다.
그건 단순히 다른 사람들처럼 제라드가 금단술을 사용한 죄인의 아들이란 이유에서 기인하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는 4년 전에 제라드와 그의 부친에 대해 겉핥기로만 정보를 수집하고 추가적인 사항은 더 조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제라드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점점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중간에 살짝 다시 조사를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쥬논 그레이엄 후작과 글렌 라스너 백작이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의 라이벌이라 하면 뭔가 귀여운 어감이었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상당히 치열한 경쟁을 했던 듯했다.
알고 보니 글렌 라스너 백작은 당시 백야의 전당을 제외하고 가장 큰 마법 기관이었던 ‘네피림’의 의장까지 역임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또 다른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게 쥬논 그레이엄 후작이라고 한다.
참고로 그 네피림은 현재 갈가리 분해되었다.
글렌 라스너 백작이 영지에 틀어박히고 나서 1년인가 2년인가가 지났을 때쯤, 여러 가지 문제가 연거푸 터져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그레이엄 후작이 있다는 게 학계 정설…… 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매우 신빙성 있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중년의 질투는 추했다.
정작 제라드는 그레이엄 후작에 대해 부친에게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 같던데, 후작 혼자만 학창 시절의 시기심을 징그럽게 이어가고 있는 셈이 아닌가.
“애초에 내가 데리고 다니는 기사가 제라드 하나밖에 없으니 그런 구분은 별 의미 없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부터 1황녀님의 곁을 지키던 롬벨 경이 있지 않습니까?”
“롬벨 경은…….”
-크르릉!
그 순간 숲에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