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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황녀님-67화 (83/203)

67화

* * *

할머니 테레사 델피니움을 오랜만에 만나고 온 데 이어 어머니와 밀리엄까지 상대한 탓인지 그날 밤에는 달갑지 않은 과거의 꿈을 꾸었다.

“황녀님, 일어나셨군요!”

“마리나……. 어머니는?”

마법사의 열병을 선고받고 반년이 지난 열 살의 어느 가을날.

처음으로 어머니가 열병을 앓는 내내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내 궁의 막내 시녀였던 마리나가 겨우 열이 떨어져 정신을 차린 내게 달려와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줬다.

“황후 전하께서는…… 그러니까, 황녀님이 주무시는 동안 함께 계시다 조금 전에 황후궁으로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건 마리나의 거짓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기는 어머니가 밀리엄의 회임 소식을 황궁의에게 처음 확언받은 때와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황후궁에 찾아갔다.

“황후 전하께서는 정원에 계십니다.”

황후궁의 시녀들은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나는 황후의 유일한 적장자로 그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딸이었고, 그 당시에는 아무 때나 황후궁을 오가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황후궁은 내 궁만큼이나 익숙했기에 당연히 안내도 따로 필요 없었다.

“아르벨라가 왔다고?”

“예, 전하.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지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니 조심해서 일어나십시오.”

어머니가 나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정원에 도착하자, 내 키만큼 높은 꽃 덤불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

“예, 황후 전하.”

“그 병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된 것이 많지 않지.”

어머니는 내가 쉽게 알아듣지 못할 낯선 대화를 그녀의 오랜 친우이자 황궁의인 레멘토 후작과 나누고 있었다.

“그럼 태아에게 전염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아직까지 그런 사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마력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미숙한 태아의 경우에는 특히…….”

마침내 꽃 덤불 사이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평소처럼 반갑게 그녀를 부르며 뛰어가려 했다.

아마 이어진 어머니의 말이 먼저 내 귀를 스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할 수 없군. 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아르벨라를 만나지 않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지금도 불안하다. 황궁에서는 그 아이를 피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한동안 친정에라도 가 있어야겠구나. 내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정양하러 간다고 하면 되겠지.”

흔들리는 붉은 꽃송이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읊조리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때 얼마나 차가웠는지 모른다.

“이 아이마저 아르벨라처럼 실패할 순 없어.”

바스락.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꽃 덤불을 팔로 건드려 난 소리에 어머니가 나를 발견했다.

그때 배를 감싸고 급히 뒤로 물러나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과거보다 오히려 지금 더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마마마…….”

“……가까이 오지 마라, 아르벨라!”

그건 분명 역병에 걸린 환자라도 보는 듯한 공포였다.

* * *

그동안 잊으려고 애썼던 과거의 일을 꿈에서 보게 되자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밖은 어두웠지만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아, 이런 꿈 꾼 거 진짜 오랜만인데.’

반갑지 않은 기억을 보게 되자 은근히 짜증이 밀려왔다.

사실 이 기억은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요 몇 년 동안 어머니와 자주 부딪치면서 그동안 서운하고 화가 났던 일들을 나도 모르게 하나둘씩 떠올린 게 문제였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무의식에 묻혀 있던 기억들까지 죄다 수면 위로 부상하고 만 것이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던 걸 떠올린 건 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내 과거의 한심함을 되짚으며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다 잔 듯해서 얼굴을 찡그린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방을 나섰다.

* * *

밤의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고요함이 좋았다.

가을이 되면서 살짝 공기가 쌀쌀해지긴 했지만 아직 밤 산책을 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 1황녀궁의 본궁을 빠져나가 회랑을 걷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차가운 손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바닥에 이어진 내 그림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버텼겠지만 지금은 쥐새끼 한 마리 없는 곳이었다.

“으, 흐으…….”

비틀거리다가 옆에 있는 벽을 짚고 몸을 기댔다.

심장에 급격한 통증이 발발하며 온몸이 금세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빌어먹을 마법사의 열병 증세도 전보다 심해졌다.

이제는 지금처럼 가끔씩 일상에서 열병을 동반하지 않은 통증까지 느낄 정도였다.

또각.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앞쪽에서 들려온 작은 발소리에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곤두섰다.

“황녀님?”

잠시 후 어른거리는 불빛 뒤에서 어린 시녀가 나타났다.

얼마 전 1황녀궁에 빈자리가 생겨 들어온 신입 시녀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란 듯이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이 시간에 왜 혼자 나와 계시나요?”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애써 풀고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왜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고 있지?”

다행히 목소리는 그럭저럭 무덤덤하게 흘러나왔다.

“아, 저는 저녁 시간에 식당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 잠깐 다녀왔어요.”

시녀가 다가오기 전에 몸을 꼿꼿이 펴고 평온한 목소리를 꾸며내서 그런지, 그녀는 내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녀님, 시간이 늦었는데 제가 모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녀님.”

그때 내 뒤쪽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지던 시녀의 말을 끊었다.

나를 비껴 시선을 옮긴 시녀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너는 그만 가 봐.”

나는 시녀에게 까딱 고갯짓했다.

시녀는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때쯤에는 나도 통증이 가라앉아서 마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마법으로 식은땀에 젖은 몸을 깨끗이 했다. 그 후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보았다.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이 시간에 아직 안 자고 있었어?”

회랑 한복판에 달빛을 맞으며 선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에 물든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거의 검은색처럼 보였다.

반면 머리칼 밑으로 드러난 은회색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어 한결 더 선명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침실 밖으로 나온 것을 느끼고 뒤따라 온 제라드였다.

나와 같은 18세가 된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소년이라 할 수 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굵직한 선으로 그려진 잘생긴 얼굴은 낮보다 밤에 더 묘한 인상을 풍기며 시선을 붙들었다.

성인 못지않게 체격이 커진 몸이 내가 서 있는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라드는 태양 아래에서 햇빛을 맞고 있을 때보다 지금처럼 어둠과 달빛이 뒤섞인 곳에 조용히 서 있을 때 더 그에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황녀님은 또 잠이 안 오시나 보군요.”

“그냥 그래. 나 때문에 나온 거면 그만 가 봐. 나도 다시 방으로 돌아갈 거니까.”

제라드가 내 말에 고개를 모로 슬쩍 기울였다.

“밤 산책을 나오셨던 게 아닙니까?”

“마음이 변했어.”

그냥 한번 이유 없이 변덕을 부려보는 양 심드렁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동 없이 서서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꼭 내게서 아주 작은 티끌 하나라도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 눈빛은 탐색적이고 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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