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표현 재밌네. 듣고 보니까 진짜 수박 쪼개진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이 정말 내키지 않는 듯이 마뜩잖은 눈으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라미엘이 실소했다.
“넌 저런 걸 보고도 되게 침착하네? 역시 우리 누이야.”
“맞습니다! 아르벨라 황녀님이 원래 대범하시지요.”
아부에 소질이 있는 세르쥬 백작이 라미엘의 말에 얼른 맞장구쳤다.
“그냥 하늘에 구멍 좀 생긴 것뿐인데 뭐. 조사 보낸 사람들은 아직이고?”
나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예, 부유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들을 보냈는데 곧 돌아올 것 같습니다.”
평소의 내 성격대로 잘난척하느라 놀란 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척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정말 하늘이 기괴하게 찢어진 걸 보고도 큰 동요가 생기지 않았다.
저 현상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도 저 균열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다고 서술되었다.
하지만 사실 책에서 저건 그렇게 중차대하게 다뤄진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이야기의 감칠맛을 위해 넣은 조미료 같았다고나 할까?
이 정체불명의 균열은 나중에 점점 커져, 얼마 후에는 저 안에서 기이한 괴물까지 튀어나오게 된다.
괴물이 나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균열이 저절로 닫힌다고 책에 적혀 있던 기억이 났다. 그
러나 한번 그러고 끝인 게 아니라 얼마 후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또 생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의 크기도 점점 커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괴물의 수도 많아졌다고 했지, 아마?’
급기야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 이야기의 막바지에는 결국 하늘 전체가 덮일 정도의 균열이 나타나 거대한 재앙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세계가 위태로워지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여주인공 유디트가 놀라운 힘으로 균열을 닫으면서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진다.
결국 유디트는 영웅이 되어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이미 병증에 의한 마력 소실로 약해진 나는 뒷전으로 물러나 굴욕감에 휩싸인 채 그 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내가 금단술에 손을 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최후의 균열이 나타나기 전에 발생한 다른 자잘한 균열들은 카뮬리타에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것 같던데…….’
책에서 본 유디트의 일상도 저 균열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진 않았고 말이다.
그냥 여주인공 유디트가 이렇게 대단하다! 우리 유디트가 이 소설에서 이렇게 최고 세다! 이런 걸 드러내기 위한 배경 설정이자 장치일 뿐일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나도 저 괴상한 현상을 보고도 큰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흐음, 그런데 막상 직접 보니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한데?’
하늘의 균열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저기에서 풍겨져 나오는 마력 파장이 낯설지가 않았다.
‘저런 느낌을 어디서 내가 또 경험해 봤더라?’
아, 그러고 보니 그 꿈속의 공간. 내가 본 세계의 이면하고 왠지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기도…….
“이런, 귀한 분들께서 저희 영지의 일을 해결해 주시러 오셨군요.”
내 귀에 뱀처럼 차갑고 미끄덩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1황녀님. 그리고 조카님.”
“외숙부.”
“라미엘 황자님. 조카님이 이렇게 직접 와 주다니 든든하군요.”
나는 무심코 얼굴을 구겼다.
‘아, 대충 좌표만 보고 위치를 찍어서 몰랐는데 여기가 그레이엄 후작 영지였어?’
재수가 없으려니까.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아무리 제 어머니의 명이라고는 하나 라미엘이 이렇게 직접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에 온 이유가 이제야 완전히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게으르긴 해도 담이 작지는 않은 녀석이 아까부터 은근히 긴장한 것처럼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었던 이유도.
나는 그레이엄 후작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그레이엄 후작……. 저택에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작년에 클로에와 함께 그레이엄 후작을 만났을 때 쎄한 느낌을 받고 나도 라미엘처럼 그림자 사역마를 만들어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레이엄 후작은 잠잠했다.
자선 행사 때 폭발 마법이 걸린 꽃다발을 나한테 보낸 사람으로 그를 의심했으나, 꼬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 괜한 기우였나 싶었지만…….
‘내 촉이 그레이엄 후작에게 뭔가 있다고 말해 주고 있어.’
그러나 그레이엄 후작가의 보안은 철통같아서 이 나조차도 결계를 쉽게 깰 수 없었다.
사실은 그래서 더 수상했다. 그렇다고 강행 돌파하자니, 그럴 만한 명분이 아직 없었으니까.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1황녀님과 1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떨떠름한 인물의 출현은 그레이엄 후작에서 그치지 않았다.
넌 또 왜 갑자기 튀어나와?
“베른하르트 소공작? 여기에서 만날 줄 몰랐는데.”
오늘도 잘생긴 얼굴을 한 킬리안 베른하르트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 현상이 생긴 위치가 저희 베른하르트 영지와도 가까운 곳이라 확인 차 와 보았습니다.”
하기야 여기가 출입 금지 지역도 아니고, 대략의 위치만 알면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니 킬리안이 방문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것은 그레이엄 후작만이 아니었다. 킬리안은 그레이엄 후작과는 다른 의미로 이상했다.
‘나만 보면 자꾸 실실 웃는단 말이야? 내가 웃긴가?’
“앗! 저기, 마법사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침 잘되었군.”
세르쥬 백작의 말처럼 때마침 멀리서 로브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래 봤자 아직은 거리가 멀어 작은 점일 뿐이었다.
우리는 다 같이 마법사들을 향해 이동했다.
* * *
“다녀오셨어요, 황녀님?”
“그래.”
1황녀궁에 돌아오자마자 마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땠어요? 저 흉측한 형상은 도대체 뭐래요?”
“아직 알아보는 중이야.”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균열로 황궁에도 큰 소란이 일어났다.
나와 라미엘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황제는 크게 심각해하며 소란을 떨었고, 그 결과 조만간 부유 마법과 이동 마법, 또 탐지 마법 등이 가능한 마법사들로 조사단이 꾸려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균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겠지.
‘물론 조만간 균열에서 처음으로 괴물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괴물이든 뭐든 그냥 마법으로 죄다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사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는 균열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도대체 저기에서 뭐가 나온다는 건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래가 적힌 책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니, 별 것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괴물이라도 한 마리 떨어져서 그레이엄 후작이 망해 버리면 좋겠지만.’
마침 위치도 딱 후작네 영지 위고, 아주 좋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균열을 향해 여러 가지 마법적 테스트를 해 봤을 때도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 진심으로 아쉬워할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다. 괴물이 떨어지면 무고한 영지민들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르는데.
“제라드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롬벨 경과 대련 중이에요. 테스트를 통과하면 황실 기사단에 데려갈 거래요.”
오, 제법이네.
확실히 제라드는 몸을 쓰는 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라스너 백작가에서 정식으로 검을 배운 적도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빨랐다.
오죽하면 처음에는 슬슬 게으름을 피우며 대충 제라드를 가르치던 롬벨 경이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더군다나 내가 지시한 바도 아닌데 제라드를 황실 기사단에도 데려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훈련시키고 싶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제라드 녀석, 요즘은 혼자서 몰래 마법도 공부 중인 것 같았다.
『황녀 유디트의 빛나는 세계』에서처럼 킬리안 베른하르트의 뒤를 잇는 마검사라도 될 생각인가?
“황녀님, 다음 일정 시간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아, 그래. 준비하자.”
나도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기에, 제라드에 대한 생각을 금방 지우고 걸음을 서둘렀다.
* * *
첫 균열이 하늘에 생겨나고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간밤에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 새벽부터는 날이 맑게 갰다.
산천초목을 적셨던 빗물은 낮 동안 완전히 말라 한결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그런 오후에 아르벨라는 황도를 걷다가 황후 샤렐과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서늘히 내뱉는 소리에 아르벨라는 반응하지 않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좋은 오후입니다, 황후 전하.”
황후도 그냥 평소처럼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좋으련만, 오늘은 작정했는지 아르벨라에게 거리를 두고 서서 예리하게 날이 선 목소리를 재차 흘려보냈다.
“예전에는 좀 더 영특한 아이였거늘. 왜 요즘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전부 제 살 갉아먹기밖에 안 되는 한심한 일뿐이란 말이냐?”
아르벨라는 힐끗 시선을 들었다.
아르벨라처럼 시녀가 들어 주는 양산을 쓴 샤렐의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아르벨라에게 꽂힌 붉은 눈만큼은 그 속에서도 시린 광채를 내며 빛나고 있었다.
샤렐 황후가 지금 아르벨라에게 이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라드가 황실 기사단의 연무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 때문이겠지.’
그는 롬벨 경의 테스트를 훌륭히 통과해 이제 황실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되었다.
샤렐 황후는 아르벨라의 큰 오점이나 마찬가지인 이단자 출신의 종속 기사가 이렇게 황궁 안을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이 큰 불만인 듯했다.
“그리 보이셨나요?”
작게 떼어진 아르벨라의 입술에서 피식,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 전하와 제가 닮은 점이 있다면, 아마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점일 겁니다.”
샤렐은 평온하게까지 느껴지는 아르벨라의 차분한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너는, 이런 짓거리가 정말 네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천한 것들만 골라서 네 옆에 두는 게?”
아르벨라의 입에서 좀 더 노골적인 실소가 새어 나온 건 그때였다.
그녀는 잠깐 샤렐의 얼굴을 말없이 보다가 말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황후 전하께서는 정말 제게 관심이 없으신가 보군요.”
순간 부채를 쥔 샤렐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겠다고요?”
“…….”
“그렇겠지요. 이렇듯 알고자 하지도 않으시니.”
샤렐의 입술이 작게 열렸으나 결국 그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벨라도 이제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상관없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평안한 오후 보내십시오, 황후 전하.”
처음 보았을 때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한 아르벨라가 먼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아르벨라가 완전히 스쳐 지나기 전, 미동 없이 서 있던 샤렐 황후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계속 황후 전하라고,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냐.”
아르벨라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짤막하게 답했다.
“알면서 물으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