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S공금]
15.5 황궁 무도회 이후
“야, 유디트.”
황궁 안이 아무리 넓다 한들 비슷한 나이를 가진 황녀, 황자들의 노선은 자주 겹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보다니 우연이네.”
더군다나 어느 한쪽에게 다른 누군가를 만날 의사까지 있다면, 지금처럼 길에서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난 김에 시녀들 떼고 잠깐 우리 둘이 얘기 좀 하자.”
황궁 연회가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2황녀 클로에가 웬일로 유디트를 달달 볶지 않고 대신 자리를 옮기자고 요구했다.
유디트의 뒤에 선 시녀들을 힐끔 쳐다보는 걸 보니, 아르벨라에게 이야기가 들어갈 것을 우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에의 시선을 따라 유디트도 불안한 눈으로 아르벨라가 붙여 준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뭐야, 나 바쁘거든? 빨리 대답해.”
클로에는 망설이듯이 어물거리는 유디트를 짜증스럽게 닦달했다. 그제야 유디트가 흠칫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요.”
“뭐? 이게 건방지게……. 하, 됐어. 나도 너 오래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그럼 따라와.”
눈을 치켜뜬 클로에가 먼저 휙 돌아서 걸어갔다. 유디트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아르벨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유디트의 옆을 지키라고 명령받은 건 아니었기에, 시녀들은 유디트의 의견을 따라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남았다.
* * *
“야, 너 요즘 살판났더라?”
“앗!”
단둘이 인적 없는 덤불 뒤로 오자마자 클로에가 유디트의 어깨를 짜증스럽게 밀쳤다.
유디트가 폭풍을 맞은 민들레처럼 잔디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 가련한 모양새에 클로에는 흠칫했다.
‘그, 그렇게 세게 민 건 아닌데?’
생각보다 유디트가 크게 넘어져서 당황하긴 했지만 클로에는 곧 마음을 다잡고 다시 눈을 치떴다.
“벨라 언니가 착해서 동정해 주니까 좋아? 요즘 진짜 꼴같잖아서.”
하지만 말을 이을수록 정말 진심으로 열이 올라 유디트를 향한 분노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언니가 요즘 너한테 잘해 주는 거, 그거 네가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 거지들한테 빵 쪼가리 하나 던져 주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언젠가부터 아르벨라는 예전과 달리 유디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조짐은 전부터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특히나 아르벨라와 유디트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클로에의 질투심도 나날이 치솟는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일전에 아르벨라가 그녀에게 ‘품위 있는 황녀가 되자’고 다정하게 속삭였던 말도 요즘은 약발이 떨어졌을 정도였다.
“황족들이 기부랑 자선 사업도 많이 하는 거 알고 있지? 벨라 언니는 네가 불쌍해서 적선해 주는 거지, 진짜 널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챙겨 주는 게 아니거든?”
그래도 아르벨라에게는 차마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지만 유디트에게는 달랐다.
착한 아르벨라가 유디트에게 동정심을 느껴 외면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유디트에게 주제를 깨닫게 해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언니 옆에 들러붙어서 귀찮게 굴지 말고 떨어져! 멍청하게 네까짓 게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란 말이야!”
유디트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위에서 쏟아지는 클로에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래서 클로에도 이 정도면 유디트가 말귀를 알아먹었겠거니 생각했다.
“……착각, 하면 안 돼요?”
“뭐?”
하지만 다음 순간 푸른 잔디 위로 흩어진 건 순종적인 답변이 아니었다.
유디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겁을 먹기는커녕 잔물살 하나 생기지 않은 고요한 황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클로에는 자존심 상하게도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생각하는 건 제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1황녀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 다른 사람들하고는 상관없잖아요.”
발칙하게도, 유디트는 클로에의 말에 이런 시건방진 소리까지 읊조렸다.
“2황녀님도 마찬가지고요.”
클로에는 너무 기가 차서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지금!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뭐라는 거야?”
이게 뭘 잘못 먹었나?
상상도 못한 일에 황당함이 커서 그런지, 클로에의 얼굴에는 분노보다도 어이없음에 가까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야, 요즘 벨라 언니가 좀 어울려 준다고 네가 진짜 우리랑 똑같은 황족이라도 된 줄 알아? 너, 너 그거 단단히 잘못 생각하는 거야.”
“저도 알아요.”
클로에가 현실을 일러 주듯이 내뱉은 말에 유디트는 여전히 동요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속삭였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저는 제대로 된 황녀도 아니니까, 상전 취급할 필요도 없다고.”
그런데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는 동안 클로에는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궁에 있는 시녀만도 못하고, 아예 황궁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게 저라고.”
유디트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평소처럼 클로에의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움츠러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제 앞에서는 다들 말조심도 안 하는걸요. 제 욕도 하고, 다른 사람들 얘기도 하고, 남이 들어도 될 얘기, 들으면 안 될 얘기, 가리지 않고 소곤거리고…….”
클로에는 자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잔잔한 황금색 눈에 어째서인지 뒷목이 시려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를 가도, 제가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신경을 안 쓰더라고요, 다들.”
그리고 이어진 유디트의 말은 더욱이 클로에를 소름 끼치게 했다.
“그러니까, 2황녀님. 저는 사실 이 황궁에 있는 사람들의 비밀을 제일 많이 알아요.”
“뭐…… 뭐라고?”
“2황녀님이 가진 비밀도 저는 알고 있어요.”
그 순간 클로에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고?’
순간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교차하다가 곧 새하얘졌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어디서 같잖은 수작을 부리냐고 당장 호통을 쳐야 했는데…….
입술이 딱 달라붙어 아무 말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유디트는 얼어붙은 클로에를 가만히 보다가 풀밭 위에서 일어났다.
치마에 풀이며 흙이 묻은 게 보였지만 유디트는 그것을 굳이 털어내지 않았다.
“2황녀님.”
클로에는 자신을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움찔했다.
“지금처럼 2황녀님이 저를 괴롭히셔도 괜찮아요. 그럼 1황녀님이 저를 더 신경 써 주시니까요.”
유디트가 처음으로 클로에를 보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1황녀님과 저를 떨어뜨리려고 방해는 하지 마세요. 제가 이 이상 더 간절해지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지, 저나 2황녀님이나 모르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마 누군가 대뜸 다가와 클로에의 뺨을 때렸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놀랐을 것이다.
클로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눈앞에 둔 기분으로 유디트를 망연히 바라봤다.
유디트가 먼저 그런 클로에를 스쳐 지나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클로에의 입에서 한참 후에야 기가 찬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 지금, 지금 도대체 이게 뭐야……?”
혼자 남은 클로에가 뒤늦게 얼굴을 하얗고 빨갛게 번갈아 물들이며 유디트가 사라진 곳을 돌아봤다.
“저, 저 여우 같은……! 지금까지 다 내숭이었……!”
곧 황당함과 분노를 담은 외침이 풀숲 위로 쏟아졌다.
왠지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이 토끼가 아니라 뱀 새끼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기분이었다.
* * *
열 살 봄.
유디트가 하늘에 걸린 태양처럼 늘 멀리서만 바라보며 동경하던 1황녀 아르벨라를 마음에 직접 담은 건, 꾸며지지 않은 그녀의 민낯을 처음 본 날이었다.
그때 유디트가 아르벨라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태생부터 남들과 출발점이 달랐기에, 유디트를 멸시하고 제 앞에서 기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유디트가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는 듯이 사과하면, 얄팍한 만족함을 느끼며 선심 써 준다는 양 자리를 떠나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2황자 로이드가 끈질겼다.
유디트는 그가 풀어 놓은 사냥개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실수로 황궁의 가장 높으신 분들, 즉 고위 황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원에 잘못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디트는 산책을 나온 듯한 1황녀 아르벨라를 목격했다.
연둣빛 잎사귀와 흰 꽃들 사이에 서 있는 유디트의 이복 언니.
자신과 달리 고귀하고 아름다운 황녀님.
누구보다 황족다운 황족.
유디트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소녀…….
눈과 귀가 있는 이상, 카뮬리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1황녀 아르벨라를 모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디트도 비록 반쪽짜리라고는 하나 황궁에서 지내며 아르벨라를 본 적이 자주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늘 자신감 넘치고 또 태양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는 그녀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