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황녀님-60화 (76/203)

60화

* * *

마음속의 잡념을 밀어내기 위해 제라드는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 땀을 흘리다가 방으로 돌아가 씻고 나왔을 때, 시간은 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덮은 수건 밑으로 제라드의 날카로운 은회색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이 작은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밖으로 향했다.

제라드는 지금쯤 1황녀궁에 돌아왔을지 모를 아르벨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늘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유년 시절을 함께 한 소녀.

그리고 그 끔찍한 숲에서 그를 구해 준 소녀.

또 그보다 더 지옥 같던 백야의 전당에서 그를 꺼내 주고, 옆에 있어도 좋다고 말해 준 소녀…….

더군다나 그녀는 금단술을 사용한 죄로 형벌을 받은 그의 부친에 대해 알아봐 주겠노라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아르벨라는 왜 그에게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걸까?

제라드는 지난번 일 이후, 다시 1황녀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었다.

‘1황녀에게 검을 바치겠다고 맹세할 뛰어난 기사들이 주변에 널렸는데, 왜 고작 저런 이단자 따위를 종속 기사로 들였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라스너 출신이라고 해도 이제는 죄인의 아들일 뿐. 그런 자에게 1황녀가 너무 큰 자비를 베풀었다.’

‘늘 완벽하던 1황녀에게 이 일이 유일한 오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1황녀궁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부 그들의 주인인 아르벨라를 염려하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제라드가 1황녀궁 밖으로 나간 날 아르벨라에게 있었던 일도 그의 귀에 들어왔다.

“자선 행사 때 1황녀님께 감히 폭발 마법이 걸린 꽃다발을 선물한 미친놈이 있다면서요?”

“감히 우리 황녀님을 시해하려고 하다니, XX를 XX해서 XXX해도 모자란……!”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제라드는 아르벨라에게 가서 몸을 단련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제라드는 아르벨라가 그에게 기대하는 쓰임이 무엇이든 간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혼자 다짐했다.

나중에 황궁 밖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여기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제라드가 요즘 밤마다 단련에 열중하는 데에는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와아. 안녕, 제라드?”

달빛을 베일처럼 두른 소녀가 제라드의 앞에 나타난 건 그런 상념에 잠겨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제라드는 마침 머릿속에 떠올리는 중이던 사람이 갑자기 창밖에 나타나 깜짝 놀랐다.

평소보다 화려한 모습을 한 아르벨라는 꼭 밤공기의 요정 같았다.

반짝이는 금발이 별빛처럼 흩날리고, 흰 레이스가 붙은 옷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그 사이에서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보고 웃었다. 꼭 백야의 전당을 나오던 날을 상기하게 하는 미소였다.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제라드는 당황했다.

원래는 아르벨라가 이 정도로 가까워지지 않아도 저절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에 빠져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 같았다.

반면,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의 방 창문 밖에 나타난 아르벨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라드의 생각처럼 아르벨라는 실제로도 즐거운 상태였다.

그녀가 연회장에 첫등장한 순간부터 유디트와 춤을 추던 내내 따라붙던 경악 어린 시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배를 잡고 깔깔 소리 내서 웃고 싶어졌다.

그동안 자신에게 이런 반골 기질이 어디에 숨겨져 있었나 싶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규범을 준수하는 황녀님이었지, 이렇게 대놓고 앞에서 뒤통수, 아니, 앞통수를 친 적은 없었는데.

이러다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는 시선들에 중독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르벨라는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연회를 마치고 1황녀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들뜬 기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지, 왠지 이대로 그냥 잠들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그녀를 즐겁게 해 준 유디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새장 안에서 무럭무럭 크고 있는 또 다른 소년을 보러 왔다.

“밤이 늦었는데, 왜 지금 여기에…….”

제라드는 갑자기 나타난 아르벨라 때문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렇게 늦진 않았는데? 혹시 이제 잘 시간이었나? 아직 열두 시도 안 됐는데?”

아르벨라는 어느새 창틀에 걸터앉아 장난스럽게 다리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제라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이맛살이 살짝 구겨지자, 아르벨라가 짐짓 엄하게 호통을 쳤다.

“어허, 너 표정이 왜 그래? 황녀님 앞에서 무엄하구나!”

……역시 뭔가 좀, 이상한데.

지금 아르벨라는 왠지 평소보다 표정이 풍부하고 감정 표현도 많았다.

제라드는 설마 하는 생각에 물었다.

“1황녀님. 혹시 술이라도 드셨습니까?”

“아닌데, 지금 내 나이에 무슨 술이야? 너 이게 뭔지 몰라?”

오히려 아르벨라가 제라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하긴, 넌 깡촌에서 왔으니까.’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선심 쓴다는 듯이 제라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르벨라가 마신 건 절대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 미성년 귀족들이 흔히 마시는 음료였다.

알코올 대신 마법사들이 새로 조합해 만든 성분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체내의 마력을 살짝 건드려 술을 마신 것과 비슷한 효과를 냈다.

그래 봤자 기분이 살짝 들뜨는 정도였고, 후유증과 부작용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할 수 있지!”

아르벨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난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아하하 소리 내 웃었다.

제라드는 잠깐 그 미소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아르벨라가 이토록 해맑게 웃는 건 과거의 영상 마력석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왠지 무척 낯선 느낌이었다.

그때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르벨라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휩쓸었다.

그 무게 때문에 아르벨라의 몸이 한순간 뒤로 기울어졌다. 동시에 제라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리를 박찼다. 알고 있었지만 제라드는 야생 동물처럼 움직임이 굉장히 빨랐다.

그래서 아르벨라의 몸이 완전히 창밖으로 기울기 전에 그녀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가까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제라드는 자신을 말끄러미 보고 있는 맑은 푸른 눈동자에 왠지 숨이 약간 막히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잖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흔들리는 커튼 속에 스몄다.

그때, 아르벨라가 짓궂은 장난을 친 아이처럼 제라드를 보며 웃었다.

“잡았다.”

그 말은 제라드의 입이 아니라 아르벨라의 입에서 나왔다.

어느새 제라드의 손을 맞잡은 아르벨라가 몸을 움직였다. 제라드의 몸도 달빛에 휩쓸려 창틀 밖으로 기울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제라드는 아르벨라의 손을 잡고 밤하늘에 떠 있었다.

“우리 춤추자, 제라드.”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선율 속의 음표처럼 부드럽게 물결쳤다.

“오늘 연회장에서도 다들 내가 춤추는 것만 쳐다봤어. 얼마나 재미있었는데.”

아르벨라는 제라드를 붙잡고 정말 춤을 추듯이 스텝을 밟았다.

제라드는 그런 그녀를 엉겁결에 따라갔다.

“너도 어디 가서 황녀님이랑 같이 춤췄다고 자랑해도 좋아.”

꼭 발밑에 밤하늘 색 융단이 깔린 것처럼 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 같은 자리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제라드는 아찔한 기분에 혼미함마저 느꼈다.

“잠깐만…….”

“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괜찮아. 난 가르치는 것도 잘하거든.”

아르벨라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감미롭게 귀에 울렸다.

“자, 나만 따라와. 내 얼굴 보고.”

제라드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아르벨라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금 후회했다.

“그래, 그렇지.”

꼭 잘했다고 칭찬하듯이 푸른 눈동자가 만족스러움을 담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갸름하게 접혔다.

제라드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얼마 전 밤에 정원에서 아르벨라가 멋대로 마력을 움직여 그의 속을 주물렀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르벨라에게 뒤덮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온몸이 간지럽고, 굉장히 견디기 어려운…… 그런 낯선 감각에 제라드는 집어 삼켜졌다.

그는 오늘처럼 이상한 밤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연회장처럼 아름다웠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같았다.

지금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과의 춤이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르벨라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입술을 뗐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남자 스텝을 밟고 있었네.”

또다시 아르벨라가 아까와 비슷한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었다.

제라드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미안해.”

줄곧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이 밤바람에 쓸려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온실에서의 일도,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그리고…….”

아르벨라는 그저 제라드의 얼굴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고마워.”

그러다 이내 그녀가 소리 없이 조용하게 웃었다.

한밤중의 짧은 무도회.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열네 살의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