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시선들이 쏟아졌다. 먼저 입장해 있던 황녀, 황자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떠올랐다.
소란스러운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1황녀와 그녀가 대동하고 나타난 유디트를 보고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며 수군거렸다.
급작스럽게 몰려드는 시선과 목소리에 유디트가 움츠러들었다.
“고개 들고 허리 펴.”
아르벨라는 여전히 정면에 시선을 둔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웃어.”
유디트는 아르벨라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동시에, 아르벨라도 유디트에게 시선을 내렸다.
“봐. 얼마나 반짝거리니.”
연회장을 가득 채운 보석 장식과 샹들리에의 눈부신 빛이 아르벨라의 미소 위에 흩뿌려졌다.
정말……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유디트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아르벨라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이제는 조금도 의식되지 않았다. 무섭고 불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잠시 후 황비들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아르벨라에게만 눈과 귀가 열렸다.
한편, 연회장의 한구석에 서 있던 킬리안이 아르벨라와 유디트를 보고 얕은 웃음을 내뱉었다.
킬리안은 그들보다 먼저 입장해 많은 관심을 담은 숱한 시선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읊조려졌다.
“정말 파트너로 4황녀를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1황녀는 언젠가부터 그의 예측을 벗어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신기했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이제부터는 답장 보내지 마. 안부 편지도 더 보낼 필요 없어. 읽지 않을 거야.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킬리안은 손에 들고 있는 잔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오래전, 1황녀와 약혼 이야기가 구두로 오갈 때, 어느 날 갑자기 도착했던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원래도 달에 한 번 정도 안부를 확인했을 뿐 살갑게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그런 서신이 도착했을 때는 킬리안도 조금 묘한 심경을 느껴야 했다.
한편으로는 당혹감을 느꼈던 것 같다.
킬리안은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아르벨라는 이후로 정말 답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은 어쩌면 킬리안 인생의 가장 큰 의문점으로 남아 있었다.
하여 오늘날까지도 아직 그때의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스스로조차 이유를 알 수 없게도, 킬리안은 아직 1황녀 아르벨라가 보낸 그 마지막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킬리안의 기분은 왠지 전보다 더 이상했다.
얼마 전 사냥 대회 때 보니, 아르벨라는 약혼자 후보 중 하나였던 바비 몬테라와 줄곧 친분을 이어 온 듯했다.
킬리안은 그게 몹시 거슬렸다.
그렇다 해서 과거의 일을 지금까지 줄곧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것도 아닌 주제에 이런 기분은 도대체 무엇인지, 킬리안도 알 수가 없었다.
킬리안은 멀어지는 1황녀 아르벨라의 뒷모습을 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오늘도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연회장의 입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세드릭 황제 폐하와 샤렐 황후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르벨라의 입술에 한결 뚜렷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 드디어 오늘의 주역께서 입장하시는군.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황족들도 제국의 가장 높은 해와 달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고개를 들라.”
연회장의 한가운데 당도해서야 황제의 말이 떨어졌다. 아르벨라는 기꺼이 그 말대로 따랐다.
1황녀로서 그녀는 황제와 황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배알할 수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두 사람의 시선은 1황녀 아르벨라와 그 옆에 붙어 선 4황녀 유디트에게 닿았다.
“1황녀…….”
샤렐 황후의 굳은 입매가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세드릭 황제의 얼굴도 차갑게 식었다.
모두가 숨기려 들던 황실의 치부를 버젓이 만인의 앞에 데리고 나왔으니 당연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오셨습니까?”
아르벨라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또 당연한 일이지만, 황제와 황후 부부는 수많은 귀족들이 보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르벨라를 꾸중하지 못했다.
“연회를 시작하라!”
세드릭 황제가 꿈틀거리던 입술을 열어 외친 뒤 다소 거칠게 망토를 펄럭이면서 상석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그에게 길을 열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벨라도 전부터 자각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녀는 좀 못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겨야 할 약점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는 황족들 사이에서 나쁜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웃을 수 있었다.
“아, 뭐야. 진짜네.”
그리고 여기 반골 기질이 있는 또 한 사람, 라미엘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킥킥 웃었다.
처음에는 아르벨라의 옆에 찰싹 붙은 유디트를 보고 불쾌했지만, 지금은 예상 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르벨라 말처럼 정말 재미있잖아.”
이내 잠깐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금 연회장 안을 휘감았다.
아르벨라의 미친 짓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디트, 우리 춤출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음악 속에 울렸다.
유디트는 황제와 황후가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저도 모르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퍼뜩 아르벨라를 올려다봤다.
연회장을 꾸민 꽃과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미소 지은 아르벨라가 그녀를 상냥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유디트의 얼굴이 점점 활짝 피어났다.
아르벨라는 유디트의 궁에서 지난번 함께 춤 연습을 하다가 그녀가 용기 내어 말했던 것을 기억해 준 게 분명했다.
“네……!”
유디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르벨라의 말이 맞았다. 낯선 상황,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유디트는 아르벨라가 있어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유디트의 세상이 소리 없이,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확실하게 변했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그들 두 사람이었다.
* * *
그 시각, 제라드는 낮에 배운 검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요즘 매일 밤마다 체력을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제라드에게 익숙해진 일과였다.
1황녀 아르벨라의 명으로 롬벨 경이라는 기사에게 검술을 배운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제라드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육신도 이미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었기에, 일단 기본이 잡히자 모두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식으로 검을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또래의 소년들보다 많이 늦은 편이었기에, 대신 그는 남들보다 두 배의 연습량을 갖기로 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 1황녀궁 밖으로 나갔을 때 겪었던 일을 떠올리면, 그는 자다가도 머리에 피가 쏠렸다.
그때, 눈앞에서 요동치는 1황자 라미엘의 마력은 강대했고, 제라드는 손에 무기 하나 없는 맨몸이었다.
그가 곁눈질로 배워 익힌 마법은 진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마법이라 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거기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조악했다.
숲에서 그를 사냥하던 인간들과 짐승을 피해 도망쳤을 때도, 또 백야의 전당에서 탈출을 시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라드는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때의 무력감을 곱씹으며 주먹을 쥔 손에 세게 힘을 주어야 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아예 흉이 생길 지경이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러다 또 어떤 밤에는 무력감과 맞먹을 정도의 큰 자괴감을 느끼며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앞으로 최소 5년 동안은 나랑 같이 있어야 하거든. 그게 널 백야의 전당에서 빼 오는 조건이었어.”
사실 아르벨라가 제라드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좌절감이나 실망 따위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핑계 아래, 이곳에 더 머물 수 있어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옆에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여기에 있어서.
사실 라스너 저택은 그에게 돌아가야 할 집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래서…….
“하지만 네가 정 내 옆이 싫어서 5년이 지나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땐 네가 말없이 내 앞에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게.”
오히려 아르벨라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